1109화. 한 번씩은 소름 돋는다니까. (4)
“아우으으으으으!”
조걸이 힘차게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켰다.
“개우우운하다!”
이게 얼마 만에 자 보는 늦잠이던가?
저 마귀 새끼가 화산에 들어온 이후로 삼대제자의 삶에서 늦잠이라는 단어는 완벽하게 실종되었다. 밤잠이라는 단어도 온전히 유지하지 못할 판인데 늦잠이 말이나 되는 소린가?
하지만 오늘! 이 역사적인 날만큼은 저 망할 놈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의관을 정제한 조걸이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일어났느냐?”
“기침하셨습니까, 사형!”
“그래.”
윤종이 한껏 미소를 지으며 조걸을 마주했다. 그의 얼굴에도 반질반질 윤기가 돌고 있었다. 평소에는 얼굴이 퍽퍽한 것이 톡 건드리면 부스러질 것 같더니…….
“……정말 신기한 일이구나. 사람이라는 게 잠만 푹 자도 이렇게 몸이 좋아지는 것이었다니.”
“크! 그러니까요. 몸이 지금 같기만 하다면 청명이 놈이랑도 한 판 붙어 볼 만할 것 같습니다.”
“아니. 그건 너무 나갔고.”
피식 웃던 윤종이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잠깐만. 그러면…….”
“예?”
“……남들은 다 이렇게 살고 있었다는 거 아니냐?”
순간 두 사람은 멍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럼 이게 원래 제 몸 상태란 말입니까?”
“그렇지 않을까?”
“……미친, 이 좋은 걸 다른 놈들만 알고 있었네. 왜 나만 몰랐지?”
윤종이 눈가에 차오르는 물기를 닦아 내었다.
걸아. 그건 네가 몰랐던 게 아니라 잊은 거란다. 그리고 이제 곧 다시 잊게 되겠지. 화산에 마귀가 사는 한은…….
조걸이 우득우득 목을 꺾었다.
“어쨌든 기운은 넘치네요. 하루쯤 쉬라고 했으면 죄책감이 생겨서 슬금슬금 수련하러 나갔을지도 모르겠는데, 딱 반나절이라고 하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다 싶기도 하고.”
“나도 그런 기분이다.”
윤종이 피식 웃으며 연무장을 향해 걸어갔다. 해가 중천에 떴으니 이제 수련을 해야겠지.
“당가 분들은 고생을 많이 하셨겠죠?”
“그렇기는 하지만…….”
윤종이 어깨를 으쓱한다.
“명문을 쉽게 보지 말거라. 갑자기 당해서 당황하기는 했지만, 명문은 명문인 이유가 있는 법이다. 결이 달라 그런 것이지, 원래 하던 수련이 이보다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럴 리가요.”
“응?”
윤종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다가온 당소소가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었다.
“그랬으면 제가 화산에 처음 들어와서 그렇게까지 충격받지는 않았겠죠.”
“…….”
“결이 다른 것도 사실이긴 한데, 강도가 다른 것도 사실이에요. 화산처럼 미친 수련을 시키는 문파는 세상에 단 하나도 없어요.”
“그, 그래?”
“애초에 다른 문파에서는 이런 수련을 시키고 싶어도 못 시켜요.”
“왜?”
“사람이 못 버티니까.”
윤종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는 버텼잖느냐?”
“이 사형 말하는 것 봐.”
당소소가 황당하다는 듯 윤종을 바라보았다.
“아니, 천하를 다 뒤져 보세요. 화산처럼 영약을 퍼먹이는 문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
“화산의 자소단은 소림의 대환단에도 뒤지지 않는 영약이에요. 아니, 어떤 면에서는 대환단보다 더 대단한 영약이죠. 알고 계시는 거죠?”
“그, 그렇지.”
무려 그 약선의 비약이니까.
“소림에서도 대환단은 아무나 안 줘요. 재능이 검증된 이들 중에서도 고르고 골라서 겨우 한 알씩 내려 주는 게 대환단이잖아요.”
“그렇지.”
당소소가 미간을 확 일그러뜨렸다.
“그런데 화산은 그걸 무슨 보약 먹듯이 퍼먹잖아요.”
“…….”
“심지어는 혜연 스님이 화산에 와서 먹은 자소단 수가 소림에서 먹은 대환단 수보다 많을걸요?”
두 사람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따지면 혜연도 대머리고, 소림 무학을 쓸 뿐이지, 사실상 화산의 제자라고 봐야 한다. 사람은 더 많은 걸 얻어먹은 쪽에 충성해야 하는 게 도리 아니겠는가?
“그런 화산이니까 이걸 버티는 거지, 다른 문파 같으면 벌써 곡소리 여럿 났어요. 어릴 때는 몸이 못 버텨서 수련을 못 하고, 나이가 좀 들어 수준이 올라오면 수련하던 관성이 있어서 쉽게 못 바꿔요. 통제가 어려울 나이기도 하고.”
“하기야…….”
열 살짜리를 수련시키는 것과 서른 살짜리를 수련시키는 게 같을 수는 없다. 당연히 반발이 있을 것이다.
‘청명이 놈 같은 인간이 아니라면 말이지.’
반항하면 죽는다. 아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그리고 도망갈 엄두도 안 난다.
그런 인간이니까 화산 전체에 당가와 녹림, 남궁세가까지 들볶으며 패 대고 있는 거지…….
“아무튼 이건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 오라비나 동생들도 지금 죽을 맛일 거예요.”
“……그렇구나.”
“사람들이 화산의 핵심을 청명 사형으로 생각하는 면이 있는데, 제가 보기에는 자소단도 그에 못지않아요.”
“……그게 그 말 아니냐?”
“네?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자소단을 만든 게 청명이니까.”
당소소가 잠시 생각해 보는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그때 뭔가 생각하는 눈치로 말이 없던 조걸이 입을 뗐다.
“소소야.”
“네?”
“그럼 좀 이상한 게, 다른 문파들은 왜 그렇게 영단을 안 푸는 거냐?”
당소소가 ‘뭐 이런 생각 없는 인간이 다 있지?’라는 눈으로 조걸을 보았다. 그 눈빛을 받은 조걸이 목을 움츠렸다.
“아니, 사형 진짜 상인 집안 아들내미 맞아요?”
“그, 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이냐?”
“뭔 영단이 마음만 먹으면 뚝딱 만들어지는 건 줄 알아요? 영단이라는 건 최소한 귀한 영물의 내단이나, 몇십 년에 한 번 발견할까 말까 한 영약 정도는 있어야 조제가 가능한 거예요.”
“그, 그래?”
“당가의 천독단도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기 힘든 독물을 구해야 제조가 가능하다고요. 자소단이 정말 대단한 건, 어쨌거나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들어진다는 거예요.”
“아…….”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한 조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전되었다는 예전 화산의 자소단이 지금의 자소단보다 효능 면에서 나을 수도 있겠지만, 그때의 자소단 한 알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금 자소단 몇백 개를 만드는 노력이 필요할걸요?”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음?”
조걸이 히죽 웃는다.
“당가 사람들도 지금 체력이 달려 죽어 나가기 일보 직전이라는 의미로군.”
“……말은 맞는데.”
앞뒤로 말 다 잘라 먹으면 그런 의미기는 하지.
“흐흐흐. 그것도 재미있는 볼거리 같은데……. 어디 한번 구경하러 가 볼까나?”
조걸의 말에 윤종이 눈살을 찌푸렸다.
“소소 앞에 두고 할 말은 아닌 것 같기는 한데……. 너는 왜 그렇게 당가에 악감정이 많으냐? 사천 태생이.”
“사천 태생이라 그런 겁니다.”
“왜?”
조걸이 혀를 차며 윤종을 돌아보았다.
“그런 사형은 섬서 사니까 종남이 좋으십니까?”
“……그럴 리가.”
“비슷한 거죠. 어릴 때부터 당가만 보면 쫄아서 사는 게 버릇이 되다 보니 저도 모르게 반감이 생긴다고 할까. 이제야 극복하고 있는 거죠.”
윤종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넌 그거 평생 못 고친다.’
당장 소소만 봐도 아직 쪼는 놈이 무슨 수로 당가를 극복하겠는가?
아니……. 당가보다 소소가 더 무서운 건가?
낄낄대며 웃는 조걸과 고개를 내젓는 윤종, 그리고 복잡 미묘한 표정의 당소소가 연무장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어으……. 춥다.”
“갑자기 뭔 한기가…….”
세 사람은 동시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벌써 겨울인가?”
세 사람이 이미 연무장에 나와 도열해 있는 화산 제자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하자마자 뒤로 바짝 붙었다.
“사숙.”
“으……응?”
“분위기가 왜 이렇습니까?”
“어……. 그게.”
백천이 뭔가 말을 할 듯 입을 벙긋거리더니 이내 앞쪽을 향해 턱짓했다.
“직접 봐라.”
“네?”
세 사람은 백천이 가리킨 광경을 바라보았다. 셋의 입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벌어졌다.
“어…….”
“와…….”
“허…….”
딱히 별다를 건 없었다. 그저 당가 사람들이 그들의 앞에 도열해 있을 뿐이었다. 평소 수련을 시작하던 때처럼 말이다.
사소하게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아이고. 오라버니…….”
당소소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선두에 선 사천당가 소가주 당패의 얼굴이 검고 푸르게 물이 들어 있었다. 누가 보면 일부러 물감으로 칠을 했다고 여길 만큼 선명하게 말이다.
“모, 몰골이…….”
“대체…….”
부어터진 당가 사람들의 얼굴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얼굴을 보고 웃음을 터뜨릴 수 없었다.
퉁퉁 붓다 못해 단춧구멍처럼 작아진 눈 사이로, 원독에 찬 눈빛이 줄줄이 새어 나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화산…….”
“개새끼들…….”
“다 죽인다.”
조걸이 움찔하여 뒤로 주춤 물러섰다.
저기요? 그쪽 분들을 그렇게 만든 건 저희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런데 왜 애먼 데서 뺨 맞고 저희한테…….
“배신자…….”
“썩을 섬서 종자들.”
와…… 사패련을 맞닥뜨려도 저런 눈으로는 안 보겠다.
“크, 크흠.”
백천이 크게 헛기침을 했다.
“다, 당가주님께서 화가 많이 나셨었던 모양이구나.”
“……그런가 보네요.”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사, 사람을 저 몰골로.”
당소소가 즉각 반박했다.
“괜찮아요. 사천당가의 의술은 최고니까요. 딱 고칠 수 있을 만큼 패셨네요.”
“…….”
이럴 때는 확실히 알게 된다. 당소소의 피가 어디서 이어졌는지 말이다.
“다 왔어?”
그때 뒷짐을 진 청명이 심드렁하게 걸어 나왔다. 그러더니 서로 마주 선 당가와 화산을 슥 훑어보았다.
“어……. 원래 오늘 오후에는 따로 할 일이 있었는데.”
따로 할 일이라는 말이 터져 나오기 무섭게, 당가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청명을 향해 칼같이 돌아갔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지금 청명의 몸은 여지없이 오체분시가 났을 것이다.
“……그러기는 좀……. 어…… 힘들 것 같고.”
청명이 슬쩍 시선을 피하며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네 피가 이어지지 않아 다행인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면 어차피 친척들인데 가 봐야 어디로 가겠는가?
청명이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잔뜩 얼굴을 굳힌 당군악이 팔짱을 낀 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나는 절대로 한마디도 하지 않을 것이고, 교육에 관한 자네의 고유 권한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겠지만, 지금 다른 수련을 할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이 상황이 매우 불편하다.’라는 티를 팍팍 내며 말이다.
“어, 그……. 허허. 그냥 한번 붙어 보고 끝내기는 서로 아쉽겠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산 놈들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는 무척, 굉장히, 아주 많이 괜찮다는 듯이 말이다. 아쉬움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다는 듯이.
물론 청명은 모른 척했다.
“그러니 뭐 별수 없지. 오늘도 어제처럼 한 판 붙을 건데…… 이기는 쪽은 내일도 반나절 쉬는 걸로 하지 뭐.”
“자, 잠깐만, 청명아. 이건 아닌 것 같다.”
“눈빛 안 보여? 살인 난다니까?”
화산 제자들의 눈에, 그답지 않게 겸연쩍어하는 청명이 놈과 이제야 마음에 든다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짓는 당군악의 모습이 보였다.
“그럼, 시작하…….”
“죽여라!”
“모조리 쳐 죽여!”
“묻어 버려! 저 개종자 놈들!”
말이 채 끝나기도 무섭게 당가인들이 시퍼렇게 날 선 암기들을 소매에서 뽑아내며 달려들었다.
“히, 히이이익!”
“피, 피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암기들을 보며 화산의 제자들은 깨달았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