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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053화 (1,054/1,567)

1053화. 나도 미친놈이었군. (8)

완전히 무너져 버린 항주의 땅을 피로 물들이던 두 집단이 서로 다른 의미로 동작을 멈추었다.

“……주교…….”

적일의 턱은 숫제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이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애처롭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의 임무는 이 더러운 불신자들이 감히 주교의 휴식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주교를 모시는 집법사자로서 온당히 이루었어야 할 일.

하지만 그는 그 사명을 제대로 완수해 내지 못했다. 마침내 저들의 칼끝이 주교를 겨누고 만 것이다. 그 사실이 적일의 전신을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로 물들였다.

적일의 지시를 받던 마교도들 역시 그리 다르지 않았다. 모두가 폐허 속에서 홀로 우뚝 서 있는 단자강을 망연자실하게 보았다.

그리고 적일을 비롯한 마교도들이 더없는 실책을 저지르게끔 한 화산의 제자들은 그들과 다른 의미로 단자강을 응시하고 있었다.

‘뭐지?’

백천의 눈에 당혹이 스쳤다.

‘저자가 주교라고?’

홀로 서 있는 저 사내는, 백천이 생각해 온 주교와 너무도 달랐다. 그가 북해에서 보았던 주교는 괴물이라는 말이 아니고서는 표현할 수 없는 이였다. 인간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도무지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거대한 악의(惡意)의 결정체. 그게 백천이 기억하는 주교의 모습이다.

하지만 지금 그가 보는 이는…….

‘달라.’

큰 키와 비정상적으로 마른 몸이 묘하게 섬뜩하긴 했지만, 그가 기억하는 주교처럼 비인간적인 모습까지는 아니다. 오히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낭인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오싹.

머리로만 그랬을 뿐이다. 백천의 몸은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저 특별할 것 없는 외양 속에 숨겨진, 더없이 거대한 무언가를 말이다. 음울하고 어두운, 그렇기에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짓눌릴 듯한 짙고 짙은 심연을.

입술을 꽉 깨문 백천이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곁에 있는 이들의 얼굴도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그들 역시 백천과 같은 걸 느끼고 있는 것이다.

백천의 시선이 청명의 등에서 멎었다. 주교와 마주하고 있음에도 그 등은 조금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단자강이 천천히 제 손에 들린 잔을 내려다보았다.

술잔에 담겨 있던 붉은 빛의 술은 어느새 흙먼지에 뒤덮여 혼탁해졌다. 아무리 중원의 땅을 밟고 이곳을 차지한다 해도, 천마를 숭상하는 이들은 미주를 마실 자격이 없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말없이 그 술잔을 한참 바라보던 단자강이 천천히 술잔을 제 입가로 가져갔다. 그리고 이내 술을 털어 넣었다.

코끝을 향긋하게 간질이던 본래의 느낌은 온데간데없다. 향과 맛을 잃고 흙과 먼지 맛만이 남은, 구역질 나는 구정물에 불과했다.

하지만 단자강은 그 역겨운 구정물의 맛을 피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였다. 본래 그들이 마셔 온 것은 이런 구정물과 그리 다르지 않으니까.

역겨운 맛과 향이 입 안에 감도는 걸 음미하며 단자강은 천천히 술잔을 쥔 손을 펼쳤다.

쨍.

추락한 잔이 산산조각이 나며 흩어졌다.

“서글프군.”

흩뿌려진 백색 자기를 잠깐 보던 단자강이 시선을 옮겼다. 앞에 도달해 있는 두 사람에게로.

광대처럼 요란스러운 이와 검은 무복 차림의 눈이 차가운 검수.

이어 그들의 뒤쪽에 선 이들과, 겁에 질린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교도들의 모습까지 남김없이 두 눈에 담았다. 단자강의 눈빛은 여전히 다른 이가 의중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너희들이 누리고 있는 것들의 작은 편린조차도 내게는 허용해 줄 수 없다는 건가?’

단자강이 나지막이 웃었다. 하긴 저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단자강은 그들이 누리는 모든 것을 빼앗으러 온 침략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주, 주교시여!”

그때 적일이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 부복했다.

“주교께서 직접 나서실 일이 아닙니다. 이들은 제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단자강이 흘끗 적일을 보았다. 상태가 엉망진창이었다. 단자강의 입술 끝이 살짝 꿈틀했다.

“저의 불민함을 용서해 주시옵고, 제 실수를 제가 만회할 기회를…….”

“물러나라.”

“주, 주교시여.”

단자강의 시선이 선두에 서 있는 청명과 장일소에게로 향했다.

서로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한쪽의 기운은 거부감이 들 정도로 청량하고, 다른 한쪽의 기운은 구역질이 날 정도로 요사스럽다. 결코 섞이지 않는 물과 기름처럼 둘의 기운은 지독하게 상반되어 있다.

하지만 그 두 눈에 담긴 것은 다르지 않다.

명백한 적의.

노골적으로 쏟아지는 적의를 느끼며 단자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곳에…….”

하지만 그는 이내 말을 멈추었다. 자신이 이들과 ‘대화’하려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아 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지금까지 중원인들과 많은 말을 나누었다. 하지만 그건 ‘대화’라 부를 수 없는 것이었다. 입장을 전하기만 하는 것은 일방적인 통보에 지나지 않으니까.

하지만 지금 단자강은 이들에게 통보하려 하지 않았다. 이들에게 묻고 들으려 하고 있었다.

단자강은 살짝 눈을 감았다.

‘나는 흐려졌구나.’

이제 부정하려 해도 부정할 수 없다. 이제 어떤 일이 있어도 그는 교를 나설 때의 주교 단자강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순간이었다.

“젊은 놈이군.”

선두에 선 검은 무복 차림의 검수가 삐딱하게 웃으며 말했다. 노려보는 눈빛이 형형했다.

“우습지도 않네.”

“…….”

“천마를 본 적도 없는 놈이 존재하지도 않는 천마의 발바닥이나 핥아 대고 있으니 말이야.”

얼마 전까지의 단자강이었다면 저 말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감히 단자강의 앞이라 그 끓는 분노를 뿜어내지 못하고 억지로 삭이고 있는 저 교도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습게도 지금의 단자강은 저 말에 크게 분노를 느끼지 않았다. 그 역시 저 말이 그리 틀리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게 그의 무너진 신심을 증명하는 일임을 알고서도.

그렇기에 새삼 궁금해졌다.

“하나 묻겠다, 검수여.”

“우리가 서로 말을 주고받을 만큼 친근한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단자강이 나지막이 웃었다.

“부탁이라고 해도 좋겠지.”

그 말에, 청명의 눈에 살짝 이채가 어렸다.

‘백 년이라…….’

새삼스레 그 세월이 얼마나 긴 시간이었는지 실감이 났다. 설마 저런 말을 하는 주교를 이 두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지껄여 봐.”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말없이 청명과 장일소를 바라보던 단자강이 그 말라비틀어진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어째서 달아나지 않는가?”

“뭐?”

단자강의 무심한 시선이 청명을 꿰뚫었다.

“그대 정도 되는 이라면 이미 느꼈을 터. 아마도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단자강의 어조는 정해진 사실을 고하는 듯 단정적이었다.

“힘의 차이는 명백하다. 너희는 나를 막을 수 없다.”

이건 위협이 아니었다. 적어도 단자강의 입장에서는.

“그런데 어째서 달아나지 않는가? 어째서 저항하려 하는가? 결과가 정해진 싸움을 어째서 하려 드는가?”

이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일이다.

물론 저들이 강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저 정도라면 교에서도 주교 정도가 아니라면 적수를 찾기 힘들 정도의 고수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마주하는 순간 명백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승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그럼에도 어째서 저들은 저리 흔들림 없는 눈빛을 보이는가?’

대항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를 앞에 두고도 어째서 저들은 자신의 길을 저리 견지할 수 있는가?

의미 없는 질문이지만 단자강으로서는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단자강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그에게 돌아온 것은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별 머저리 같은 질문을 다 듣겠네. 마교 새끼들이 변방에서 흙만 파먹고 살더니 사상가라도 되셨나.”

주교에게 보이기엔 너무도 무례하며 무도한 감정이었다. 청명은 소리 내어 웃더니 되레 단자강에게 물었다.

“그럼? 적이 강하니까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복종이라도 하라고?”

“…….”

“잘 들어, 멍청한 새끼야. 너희 같은 겁쟁이 새끼들은 죽는 게 무서워서 있지도 않은 천마에게 벌벌 떨어 댈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럴 바에야 뒈지는 게 나은 인간이야.”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건가?”

“당연히 무섭지, 멍청한 새끼야.”

청명이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그런데 죽는 것보다 굴복하는 게 더 엿 같은 것뿐이야. 특히나 너희 같은 새끼들에게는.”

단자강이 막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옅은 비음이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흐으으음.”

단자강의 시선이 청명의 옆에 있는 장일소에게로 향했다.

온통 새하얀 얼굴에 그어진 피처럼 붉은 입술이 섬뜩하게 곡선을 그려 내었다.

“……하도 주교, 주교 해 대길래. 얼마나 대단한 인간인가 했더니.”

잠시 말을 멈춘 장일소가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조금 실망이로군.”

단자강의 눈썹이 불편하게 꿈틀댔다.

“하나 알아 두렴.”

장일소가 요사스럽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얼굴에 어린 귀기가 천하의 단자강마저 찌푸리게 했다.

“내 위에 누군가가 당연히 존재한다는 걸 인정해 버리는 순간, 사람은 끝나는 거란다.”

“…….”

“그게 지배하는 이와 지배당하는 이의 차이지. 그리고 나는 지배당하는 이는 무섭지 않거든.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결국 마찬가지야, 굴복을 선택하는 인간이란 건.”

까라락!

장일소의 반지들이 거칠게 마찰했다.

“그래서, 너는 어떤 인간이지?”

장일소의 말을 듣던 단자강이 조용히 웃었다.

‘지배당하지 않는 인간이라…….’

그는 이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는구나.”

“…….”

“너희 역시 알지 못해. 내가 원하는 대답은 너희에게는 없군. 아니……. 어쩌면 세상 누구에게도 대답을 듣지 못할지도 모르지.”

단자강의 입에서 허탈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지배당하지 않는다. 극복한다. 저항한다.”

중얼거림이 길어질수록 단자강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졌다.

“그건 진정한 공포를, 진정한 위대함을, 진정한 신성을 접해 보지 못한 이들이나 지껄일 수 있는 말이지.”

단자강의 발아래에서 검은 마기가 뭉클뭉클 흘러나왔다. 너무 짙다 못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어둠이 그의 발끝을 휘감고 돌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런 말을 지껄여 댈 생각이라면…….”

휘이이이이이이잉!

단자강이 흘려낸 마기가 점점 더 빠르게 회전했고, 이내 거대한 소용돌이로 화해 맹렬히 꿈틀거렸다.

“내가 알려 주마.”

단자강의 목소리 역시 점차 거칠어졌다. 그의 두 눈이 지독하게 짙은 핏빛의 안광을 뿜었다.

“진정한 절망이 무엇인지!”

콰아아아아아아아!

검은 마기가 마치 흑룡처럼 하늘 높이 치솟았다.

마침내 광기에 몸을 내던진 단자강의 입에서 지옥의 마귀와 같은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압도적이다 못해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가공할 마기의 향연 앞에, 세상이 공포로 물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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