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8화. 나도 미친놈이었군. (3)
남궁도위는 있는 힘껏 검을 움켜잡았다.
도움이 될 자신이 있었다. 차이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 차이가 그리 크다고 생각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큰 역할을 하기는 어려워도 한 사람 몫은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앞서 달리는 이들에게 따라붙는 것조차 버거웠다.
‘대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한둘이 아니다.
“제길!”
카가각!
그가 휘두른 검이 마교도의 목에 박혔다. 창궁무애심법을 바탕으로 한 정순한 내력이 가득 실린 검이 연약한 인간의 목을 찔러 냈음에도, 그의 검은 목뼈까지 꿰뚫고 들어가기는커녕, 겨우 한 치밖에 파고들지 못했다.
“카하아아악!”
목에 검이 박힌 마교도가 악을 쓰며 남궁도위의 배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그 순간.
파아아아앗!
가공할 속도로 날아든 검이 마교도의 목을 단숨에 쳐 날렸다.
“괜찮으십니까!”
남궁도위는 대답 대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윤종 도장.’
알고 있다. 윤종은 강하다.
한때는 저 화산오검이라 불리는 이들이 그 실력에 비해 너무 과도한 명성을 얻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분명 화산검협 청명은 평가절하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의 강자지만, 나머지는 자신의 실력보다는 그런 청명의 명성에 기대 이름을 알렸을 거라고.
그러니 다른 이들 역시 청명을 제외한 오검보단 남궁도위가 한 발짝 더 앞서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이들이 보여 주는 모습을 지켜본다면 모두 제 생각이 완벽하게 틀렸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정말 이렇게나 차이가 났던가?’
청명이 강한 건 익히 알고 있었다. 백천이 강한 것도 잘 안다.
하지만 윤종이나 조걸이 이렇게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손쉽게 마교도들의 목을 쳐 날리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혼란스러웠다. 실력이 비슷해도 혼란할 마당에 이렇게 격차까지 클 줄은 몰랐다.
‘빌어먹을.’
괜한 고집을 부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도움이 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그는 이들의 발목이나 잡아 대는 얼간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 아니었어도 이들의 속도가 반보는 더 빨라졌을 터.
윤종과 조걸이 중간중간 뒤를 힐끔대며 안위를 살펴 올 때마다 그의 안에 존재하던 자부심이 산산조각 나 심장을 찌르는 기분이었다. 그 모든 관심과 염려가 호의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파아아앗!
전방에서 붉디붉은 검기가 화려하게 피어올랐다. 선명한 노을빛의 검기가 어마어마한 수의 꽃잎으로 화해 앞을 막아서는 마교도들을 순식간에 휩쓸었다.
짧은 대화조차 필요하지 않다.
어째서 이들을 뚫어야 하는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누구도 묻지 않으며 의심하지 않는다.
저곳에 이정표가 있으니까.
선두에서 솟구치는 붉은 검기가 천 마디의 말보다 더 강하게 모두를 이끌고 있었다.
남궁도위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나서고 싶지만 지금 그는 이들에게 방해가 될 뿐이다. 차라리…….
“남궁도위!”
바로 그때 날카로운 청명의 음성이 귀를 파고들었다.
“예?”
“앞으로 나와, 이 새끼야!”
머리가 생각하기도 전의 몸이 먼저 청명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반사적으로 땅을 박찬 남궁도위가 앞서 달리는 이들을 뚫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청명의 바로 뒤에 도착한 순간, 청명이 남궁도위의 어깨를 움켜잡고 강하게 끌어당겼다.
“멍청한 새끼가 왜 뒤에 처져 있어! 남궁세가 놈이!”
“예?”
“앞이야!”
청명이 남궁도위를 앞으로 밀쳤다.
“선두에서 뚫어! 그게 남궁세가다! 머리 비우고 적이 보이면 그냥 닥치는 대로 휘둘러!”
“도, 도장.”
“뭐 해!”
남궁도위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마교도들을 순간 멍하니 보았다. 하지만 그건 찰나였다. 이내 남궁도위의 두 눈에서 강렬한 눈빛이 뿜어져 나왔다.
으득.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 남궁도위가 지체 없이 검을 들어 올렸다.
“흐아아아아압!”
단전에서부터 막대한 내력이 뿜어졌다. 동시에 그의 검 끝에서 어마어마한 검기가 솟구쳤다.
검 끝에 어리는 백색 광영. 남궁도위는 있는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남궁을 상징하는 눈부신 백색 검기가 포탄처럼 앞으로 쏘아졌다.
콰아아아아앙!
밀려오던 마교도들이 검기가 일으킨 폭발에 휘말려 사방으로 튕겨 나간다.
검을 쥔 남궁도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
그는 화산의 검수들처럼 정교하게 검을 쓸 수는 없다. 그들처럼 정확하게 적의 약점을 노릴 수도 없다. 인정할 수 있다. 아직 그는 부족하다.
하지만 막대한 내력으로 상대를 쓸어 버리는 것은 그의, 아니 남궁세가의 장기가 아니던가?
‘여기가 내 자리다!’
황제는 가장 뒤에서 적을 기다린다. 하지만 제왕은 가장 선두에서 적을 섬멸하는 법. 남궁의 이름을 가진 이가 서야 할 곳은 이곳, 선두밖에는 없다!
“보여?”
남궁도위의 뒷머리를 붙든 청명이 그의 고개를 강제로 돌려 한 곳을 보게 했다.
남궁도위의 눈에 삐죽이 솟은 주루의 모습이 들어왔다.
“저기다!”
남궁도위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까지 길을 열면 돼. 뒷일은 우리가 알아서 한다. 아무 생각 하지 말고 가진 거 모조리 퍼부어!”
“예!”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한 남궁도위가 검을 고쳐잡았다.
이런저런 설명 같은 건 없다. 거의 강요에 가까운 지시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청명의 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좌우로 유이설과 백천이 따라붙었다. 그리고 혜연이 남궁도위의 머리 위로 솟아오르며 양팔을 앞으로 뻗었다.
“우오오오오오오오!”
혜연에게서 상서로운 불광이 사방으로 파도처럼 퍼져 나갔다.
거의 완벽하게 펼쳐진 불광보조(佛光普照)가 마교도들을 점점 뒤로 밀어 냈다. 거리가 생긴 순간,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백천과 유이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검을 휘둘렀다.
매화, 그리고 매화. 그리고 또 매화!
분분히, 점점이 피어오른 매화가 환상처럼 흩날린다. 세상이 온통 휘날리는 매화로 가득 채워진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소가주!”
“소협!”
이윽고 재촉하듯 터진 목소리에 남궁도위가 반사적으로 내력을 끌어 올렸다.
“오오오오오오오!”
그의 검이 위에서 아래로 수직으로 내리그였다.
황금빛 불광과 붉은 매화 잎이 가득한 세상에 새하얀 빛줄기가 벼락처럼 내리꽃혔다.
콰아아아아앙!
터지고 휩쓸고 또 밀어 낸다.
남궁. 화산, 소림. 정(正)을 수호하는 세 문파. 지금은 조금 이를지 모르나, 언젠가는 그 문파를 각각 대표하게 될 이들이 선두에 서서 모두를 이끌기 시작했다.
남궁의 패(覇), 화산의 환(幻), 그리고 소림의 중(重).
그 무학의 성질은 다르지만, 추구하는 바는 다르지 않다. 그러니 조화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아니, 조화란 애초에 서로 다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던가?
“갑니다!”
“예!”
남궁도위가 이를 악물고 달려 나가는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좌우와 뒤로 백천과 유이설, 혜연이 빠르게 따라붙었다.
자신감이 붙은 남궁도위의 어깨를 본 청명은 호흡을 조절했다. 그러다 검을 살짝 내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눈치도 좋게 일행의 가장 후미로 물러선 임소병이 뒤를 노려 오는 마교도들을 밀어 내고 있었다. 청명과 눈이 마주치자 그가 얼굴을 왈칵 일그러뜨렸다.
“아니! 왜 나만 이런…….”
하지만 채 불만을 토하기도 전에 청명이 임소병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모든 과정을, 장일소가 서늘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새끼 범을 키우는 것 같군.’
저놈 입장에서는 사실 스스로 나서서 처리해 버리는 쪽이 편할 것이다. 일반적으로야 다른 이들의 손을 빌리는 게 편하겠으나, 이 정도 차이가 나 버리면 일을 맡기고 지켜보는 쪽이 더 번거로우니까.
하지만 저 화산검협은 이 지독한 상황 속에서도 저 애송이들을 성장시키는 걸 잊지 않는다.
“어이, 사파 놈.”
“흐음?”
그때 난데없이 들려오는 청명의 목소리에 장일소가 눈살을 찌푸렸다.
“눈알 적당히 굴리고 할 일이나 해. 구경하러 온 건 아니겠지? 아무리 날로 처먹는 게 사파의 습성이라지만, 여긴 네 집이잖아?”
장일소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금 천하를 통틀어 그의 앞에서 뻔뻔하게 저런 말을 늘어놓을 수 있는 이가 또 있을까?
“안 그래도 슬슬 본격적으로 움직일 참이었지.”
장일소의 전신에서 새파란 불꽃이 솟구쳤다.
창염투살(蒼炎鬪殺). 단혼염강(斷魂炎剛).
살아 있는 듯 새파란 혀를 날름대며 앞으로 돌진한 푸른 불꽃이 마교도들을 뒤덮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쏟아져 나왔다.
강철보다 더 단단하면서도 끔찍한 열기를 전하는, 어마어마한 불꽃. 불꽃에 찢겨 나간 이들의 상처는 순식간에 익어 버렸다. 흰 연기가 여기저기서 피어올랐다.
“쯧쯧. 저항하지 않았으면 곱게 죽을 수 있었을 텐데.”
쓰러진 채 발버둥 치는 마교도의 머리를 짓밟아 터뜨리며 장일소가 앞으로 빠르게 달렸다.
그러면서도 청명에게 웃으며 말 거는 걸 잊지 않았다.
“주교란 놈을 찾아낸 모양이군?”
“진즉에.”
“쓸모가 많네. 생각보다 더.”
쿡쿡 웃은 장일소는 반쯤 허물어진 주루를 올려다보았다. 눈빛에 얼핏 광기가 스쳤다.
“저긴가?”
“그래.”
“주교라. 주교…….”
슬쩍 미소가 스치는 얼굴이 요사스러웠다.
“주위에는 놈을 지키는 호위가 버티고 있을 테고?”
“집법사자.”
“응?”
“놈들끼리는 집법사자라고 하지. 주교를 수행하는 수족들이야. 과거 중원에서는 마장(魔將)이라고도 불렸던.”
“재미있는 것을 많이 아는군.”
장일소의 눈이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그래, 시간 끌 것 없지. 이 귀찮은 것들을 떨쳐 낸 뒤에는 그 집법사자를 죽이고 주교의 목까지 날려야지. 애초에 우리는 그걸 위해 온 거잖니?”
시간을 끌면 상황이 어찌 변할지 모른다. 이곳으로 출발하기 전보다 마교도들의 수가 늘어났다는 것은, 앞으로도 더 많은 전력이 충원될 수 있다는 뜻이다. 시간을 끌수록 이쪽이 불리해질 것이다.
‘단번에 머리를 노려야 해.’
그렇기에 이 험지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온 것이 아닌가. 지금 그들에게는 외곽부터 느긋하게 길을 열어 갈 시간이 없었다.
‘주교가 있는 곳까지만 도착하면 된다.’
그 뒤에는 그가 저 잘 벼려진 칼을 휘둘러 주교의 목을 벨 것이다.
하지만 이어 들려온 청명의 말이 그의 계산을 완전히 흐트러뜨렸다.
“틀렸어.”
“흐음?”
장일소의 색 옅은 두 눈에 의문이 스쳤다. 청명은 싸늘하게 말했다.
“집법사자가 아니야.”
청명의 시선은 앞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집법사자‘들’이다.”
순간 장일소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도 느낀 것이다.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내며 이쪽을 향해 섬광처럼 날아드는 이들의 존재를.
청명이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그래. 저게 진짜다.”
그 순간, 마교도들 너머의 부서진 건물 위로 십여 줄기의 검은 인영이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