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0화. 지금 뭐라고 했어? (5)
흑귀보(黑鬼堡) 항주지부 지부장 양곤(楊坤)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저 멀리서 뇌성벽력이 치는 소리가 살짝 들린 것도 같았지만, 이내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지금 그는 사소한 데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골치가 아프군.”
사패련주가 장강을 점거하고 있는 이상, 흑귀보 역시 빠르든 늦든 결단을 내리게 될 것이다. 보주가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수로채를 집어삼킨 만인방에게 고개를 숙이고 굴복하게 될지,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게 될지가 갈린다.
‘아니, 아니지.’
살아 보면 세상일이라는 게 그리 극단적으로 흐르지만은 않는다. 어쩌면 이대로 서로 감정을 가진 채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사패련이라는 틀만 유지해 나갈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게 가장 현실적인 예측이다.
“진짜 생각할수록 골치가 아프다니까.”
양곤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는 강호의 정세 자체를 뒤흔드는 일에는 딱히 신경을 기울이고 싶지 않았다. 항주를 잘 관리하고, 때때로 뒷골목에 숨어들어 항주의 탈환을 노리는 하오문도들을 색출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빠개질 것 같았다.
양곤은 제 주제를 알고 가진 것에 만족하고 사는 것이 인생의 승리자가 되는 방법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는 현인 중의 하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조직에 몸을 담은 이에게 선택권이란 주어지지 않는다.
“대부께선 어떤 결정을 내리시려나…….”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양곤이 입맛을 다셨다.
사실 강호의 정세고 나발이고 그런 건 딱히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금대부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선택이 흑귀보에 가장 이득이 되느냐일 테니까.
하지만 양곤의 머리로는 어느 쪽이 훗날 흑귀보에 더 많은 재물을 가져다줄지 감히 예측하기 어려웠다.
“휴우.”
그는 결국 고개를 젓고 말았다.
어떤 선택이건 제발 피바람만은 불지 않았으면 했다. 이제 인생의 말년에 접어든 나이에 전장에 나서서 비명횡사하는 것만은 절대 사양이니까.
그런 생각으로 양곤이 서류에 낙관을 찍으려던 바로 그때였다.
쾅!
방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얼굴에 새파랗게 질린 이가 안으로 뛰어들었다.
“지, 지부장님!”
“무슨 일이냐?”
양곤이 짐짓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일갈했다.
“하, 항주 번화가에 웬 놈들이 나타났습니다. 이, 이 미친놈들이 지금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여 대고 있습니다.”
“뭐?”
양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들이 아무리 사파라지만, 자기 구역에서 잔인한 일이 벌어지는 건 막아야 한다.
더욱이 만금대부는 사람이 곧 돈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아는 이다. 흑귀보가 관리하는 항주에서 그 돈과도 같은 사람이 죽어 나간다? 그건 모조리 항주 지부장인 양곤의 책임이 될 것이다.
“어느 미친놈들이 감히 항주에서!”
양곤의 두 눈에 불꽃이 튀었다.
강호에서 적당히 굴러먹은 이들은 감히 항주에서 문제를 일으킬 생각을 하지 못한다. 흑귀보의 영역 안에서 사고를 친다는 건 곧 흑귀보를 적으로 돌리겠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때때로 강호의 정세를 이해하지 못하는 애송이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세력의 균형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런 일을 벌이고는 한다.
“애들을 모조리 끌어모아라.”
“예? 모, 모조리 말입니까?”
“그래.”
양곤이 차게 일갈했다.
“최근에 안 그래도 분위기가 느슨해진다 싶었다. 한번 다잡을 필요도 있겠지.”
“아, 알겠습니다!”
“움직여라!”
“예!”
사내가 밖으로 튀어 나가자 양곤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쯧.”
그는 조금 전과는 영 다르게 지친 낯으로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느 애송이들이 또.”
사실 노성을 내지르며 명령하긴 했지만, 그는 딱히 화가 나진 않았다. 꽃에 벌이 꼬이는 것처럼 항주의 밤거리는 자신이 강하다고 착각하는 애송이들을 불러 모은다. 익숙한 일이란 뜻이다. 이번에도 적당히 정리만 해 주면 될 터.
다만 그의 내심을 수하들에게 내보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는 내심과 외적인 모습을 분리하는 데 능했다.
“간만에 기강 한번 잡겠군.”
그렇게 양곤은 가벼운 마음으로 내실을 나섰다.
“……지부장님.”
“…….”
“지, 지부장님. 이걸 대체…….”
양곤은 얼빠진 모습으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가 일이 생각보다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건, 공포에 질려서 달아나는 인파를 처음 맞닥뜨렸을 때였다.
항주는 환락의 도시다. 그러다 보니 필연적으로 크고 작은 사건이 끊이지 않고 벌어지는 곳이다. 길거리에서 시비가 나 사람 몇 죽어 나가는 정도는 그저 여흥으로 지켜볼 수 있을 정도다.
그리고 맹세컨대 양곤은 이곳 지부장이 된 이후, 단 한 번도 항주 사람들이 이렇게 공포에 질려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잠깐 놀랐던 그는 각오를 굳혔다. 눈앞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결코 놀라지 않고 냉정하게 대응하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 굳은 각오는 항주의 상황을 대면한 순간 맥없이 녹아내렸다.
“……이게…… 어…….”
양곤의 손이 덜덜 떨렸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짓뭉개져 있었다.
나무도, 건물도, 땅도, 심지어는 그 안에 있었을 사람마저도.
지독한 태풍에라도 휩쓸린 듯 박살이 난 전각들의 잔해 사이로 조금 전까지는 분명 살아 있었을 사지가 뒤섞여 있다. 사람이 전각과 함께 갈가리 찢긴 것이다.
“우욱!”
누군가가 헛구역질하는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그들은 사파다. 살인에 대한 거부감 따위는 딱히 없다. 양곤 역시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죽인 사람의 수가 몇인지 헤아릴 수도 없다.
하지만…….
그가 저질러 왔던 건 살‘인’이었다.
즉, 양곤은 누군가를 죽일 때 자신이 죽여 숨통을 끊은 이가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 광경은 뭔가?
무너진 담과 지붕, 기둥과 흙더미들이 살아 있던 무언가와 제멋대로 뒤섞이고 범벅되어 버린 이 광경을 과연 ‘살인’이라 칭할 수 있을까?
‘아니야…….’
이건 재해다.
이렇게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지 않은 것을 구분하지 않고 휩쓸어 버리는 건, 감정이 없는 존재만이 저지를 수 있는 일이다.
또옥. 또옥.
잔해 사이로 삐죽이 솟은 시신의 손끝에서 검붉은 핏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양곤마저도 속에서 구역감이 치밀어 오르는 통에 입을 다물었다.
항주의 불야성.
이 광경을 하늘에서 바라본다면, 드넓은 대지에 넓게 펼쳐진 불빛 한쪽 구석이 짐승이 베어 문 것처럼 시커멓게 물들어 있을 것이다.
짐승과 인간을 구분하는 것. 양곤은 그걸 불빛이라 생각한다. 어떤 짐승도 인간처럼 불빛을 만들어 내지는 못하니까.
이곳에는 어둠이 짙게 내려앉았다. 이는 더 이상 여기에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어느 미친 것들이…….”
누군가의 신음 같은 말에 양곤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래. 이건 누군가가 저지른 짓이다. 그 말인즉, 이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만들어 낸 이가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단 뜻.
그렇게 생각하자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하지?’
달아날까? 아니면 공격할까?
정상적으로 판단하자면, 당연히 찾아내서 공격해야 한다. 그는 이 항주를 책임지는 흑귀보의 지부장이니까.
하지만 이 지극히 파멸적인 광경 앞에선 당연한 판단에도 의심이 앞섰다.
정말 인간이 이런 광경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인두겁을 쓴 사람이?
그런 존재를 공격하면…….
“지부장님!”
망연히 생각에 잠긴 양곤을 누군가가 격하게 불러 깨웠다.
“저, 저기…….”
그리하여 양곤은 보았다.
모든 것이 뒤섞여 잿빛으로 물든 세상. 저 멀리서 보이는 불빛 외에는 그저 짙은 어둠에 잠겨 버린 그 공간의 끝에서 피처럼 붉은 장포를 걸친 누군가가 느릿하게 다가오고 있는 모습을 말이다.
양곤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자다.
저자가 바로 이 모든 일을 벌인 흉수다.
저벅. 저벅. 저벅.
태연하게 다가오는 붉은 장포의 사내를 홀린 듯 바라보던 양곤은 순간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그 바람에 뒤에 서 있던 이의 가슴에 등이 부딪혔다.
적을 보고 겁에 질려 물러서는 것은 추태다. 하지만 지금 양곤은 체면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그의 얼굴은 점점 새하얗게 질려 갔다.
수많은 위기를 겪고 이겨 내며 이 자리까지 올랐지만, 이런 상황에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 그가 아는 가장 강한 것의 위세를 빌리는 것뿐이었다.
“여, 여기가 흑귀보의 영역이라는 걸 알고도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이냐!”
그러자 느릿하게 걸어오던 사내의 걸음이 멈췄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핏빛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양곤은 심장이 욱신대며 아파 오는 걸 느꼈다.
“……흑귀보?”
사내가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그런 곳도 있었던가…….”
“……네, 네놈…….”
“상관없다.”
양곤이 무어라 더 말을 하려던 순간 사내는 무심하게 툭 말허리를 잘랐다.
“소속이 무엇이든, 성별이 무엇이든, 나이가 무엇이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너희가 지금 살아 있다는 것뿐이다.”
“…….”
양곤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사내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아하니…… 꽤 이름이 있는 놈들 같은데, 잘됐군.”
누군가가 비명처럼 양곤을 불렀다.
“지, 지부장님!”
순간 흠칫한 양곤은 핏발이 선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시커먼 옷 일색인 무리가 어느새 나타나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대체 언제……?’
“모조리 죽여라.”
사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방에서 지독한 살기가 쏟아졌다. 그건 인간이 내뿜는 살기라기보다는 차라리 굶주린 짐승이 보이는 날것의 무언가 같았다.
진득하고 숨 막히는 기운이 몰아치기 무섭게, 마기를 휘감은 무리가 검은 파도처럼 양곤과 수하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으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순식간에 휩쓸리기 시작한 그들을 가만 지켜보던 붉은 장포 차림의 사내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때, 그의 앞에 검은 옷으로 전신을 감싼 괴인 하나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푹 숙인 고개가 차마 눈도 못 마주치겠다는 듯 조심스러웠다.
“주교시여.”
“……뭐냐?”
“이 이상 하실 생각이십니까?”
주교라 불린 이의 차가운 시선이 부복한 이의 뒷머리로 쏟아졌다.
“불만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돌아가라. 목숨은 거두지 않겠다.”
“불만이 있을 리 있겠습니까. 저는 주교를 따르는 몸입니다. 다만…… 신성한 전언대로라면 저희는 모습을 감춘 채, 그분의 재림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
“교의 늙은이들이 지껄이는 고리타분한 말을 똑같이 반복할 셈이냐?”
“저는 그저…….”
“멍청한 소리.”
주교는 차갑게 일갈했다.
“그분께서 꼭꼭 숨어 모습을 감춘 우리를 홀로 찾아내실 수 있을 만큼 전능(全能)하신 분이라면, 어째서 저 불신자들의 손아귀에 운명의 종언을 맞이하셨단 말이냐.”
“그건…….”
남자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교리에 위배되는 말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 배교자란 누명을 홀로 벗어 낼 만큼 위치가 높지 않았다.
“의심하지 마라!”
주교의 새빨간 눈이 혈광을 내뿜었다.
“진정으로 그분의 신실한 종을 자처한다면, 그분께 우리의 존재를 알리는 게 당연할 터!”
“…….”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죽이고 또 죽여라. 세상 어디에서도 우리가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너희가 죽인 이들의 피가, 너희가 바친 희생이 우리가 그분께 바치는 한 줄기 등불이 될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비로소 진실로 그분의 재림을 목도할 수 있을 것이다.”
“따르겠습니다.”
주교가 장포를 펄럭이며 돌아섰다.
교는 그저 인내하고 인내한다. 살아남은 이들이 죽어 가고, 새로 태어난 이들이 늙어 가도록, 그저 기다리고 또 기다릴 뿐이다.
그는 더는 참아 낼 수 없었다.
‘그분께서 진실로 재림하셨다면 반드시 우리의 목소리에 화답하실 것이다.’
반드시.
그것이 ‘신’의 의무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