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9화. 지금 뭐라고 했어? (4)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찬 실내.
“열어.”
“죽었어.”
“빌어먹을, 이 판도 털렸군.”
골패 짝이 쉴 새 없이 돌았다.
걸린 판돈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눈치챈 구경꾼들까지 몰려들었지만, 정작 골패가 오가는 원탁 위로는 묘한 침묵이 내려앉고 있었다.
“삼.”
“나도 삼이오.”
“크흐. 나는 사다. 이번에는 내가 먹었군.”
웬만한 이는 평생 동안 만져 보기도 어려운 액수의 은원보가 장난감처럼 휙휙 오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이들의 눈도 탐욕으로 점차 붉게 물들어 갔다.
“졌군.”
붉은 장포 차림의 낭인이 손에 들린 골패를 원탁 위로 툭 던졌다. 한 번에 세 개의 은원보를 잃었지만, 사내의 태도에선 어떤 아쉬움도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
‘멍청한 놈이.’
채규는 만면에 떠오르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눌렀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해도 저 낭인은 지금 아마 피가 마르고 입이 바짝 탈 것이다. 도박판에 앉는 이들의 신분이야 천차만별이지만, 판돈을 잃어 가는 이들이 느끼는 감정은 대동소이하니까.
초조해지고 있다는 티를 내지 않는다는 점은 인정해 줄 만하다. 여기가 아니라 다른 도박장이었다면 적당히 돈을 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 환희원은 태연함을 가장하는 것만으로 빠져나갈 수 있을 만큼 녹록한 곳이 아니다.
조금씩 아주 천천히.
이곳은 늪이 사람을 삼키는 것처럼 야금야금 돈을 갉아먹는다.
“이!”
“오.”
“육이다.”
“……빌어먹을. 뭔 육이 뜨고 난리야.”
“무조건 먹을 줄 알았는데, 젠장!”
“저 형씨 운이 좋구만. 한 판에 얼마를 가져가는 거야.”
큰 판에서 이긴 붉은 장포 앞에 은원보가 우르르 쌓였다. 그가 지금껏 잃은 돈의 절반 정도가 순식간에 복구되었다.
그러나 기분이 나쁜 듯 오만상을 찌푸린 채규의 내심은 달랐다. 이유야 간단하다. 이건 그가 일부러 잃어 준 판이기 때문이다.
머저리가 아닌 이상 제 판돈이 줄어 가는 걸 모를 리는 없다. 배짱 좋은 놈이야 마지막 판돈이 바닥날 때까지 일발역전을 노리겠지만, 대부분은 반쯤 돈을 잃고 나면 겁을 집어먹고 판을 떠 버리기 마련이다.
‘그럴 수야 없지.’
그러니 중간중간 적당히 맛을 보여 줘야 한다. 패 한 번만 잘 들어오면 잃은 돈을 단번에 만회할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도록 말이다.
‘흐흐.’
채규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도박은 돈을 따는 재미로 하는 것이지만, 한 인간이 파멸에 빠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여흥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오늘 이 원탁은 정말 완벽한 판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요.”
“일.”
“사. 흐흐흐.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골패 짝이 다시 왔다 갔다 하며 낭인 앞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은원보가 다시 조금씩 줄어들었다. 그 어마어마한 돈을 모두 잃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건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평범한 이라면 정신이 나가고도 남을 만한 상황이다.
하지만 붉은 장포의 낭인은 여전히 처음과 다름없는 무심한 눈으로 원탁을 응시할 뿐이었다.
이윽고.
“내가 이겼군.”
채규가 득의양양한 얼굴로 원탁에 놓인 판돈을 쓸어 모았다. 그와 그의 동료 앞에는 은원보가 탑을 이루었다. 하지만 붉은 장포의 낭인 앞에선 더 이상 은원보를 찾아볼 수 없었다.
“어이구. 판돈이 다 사라지신 것 같은데.”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세 사내가 겸연쩍은 듯 웃었다.
“혹시 남은 돈 있수? 없으면 이만 빠지셔야 할 것 같은데.”
붉은 장포의 낭인이 가만히 시선을 내려 제 판돈이 쌓여 있던 곳을 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남은 돈은 없군.”
“쯧쯧쯧. 오늘 운이 없는 날이셨군. 다음에 또 합시다.”
“그런 날도 있는 거지. 이거나 받아 가슈.”
사내들이 각기 제 앞에 놓인 은원보 중 하나를 집어 장포의 사내 앞으로 쓱 밀었다.
은원보 세 개.
평범한 이에게는 어마어마한 돈이지만, 오늘 낭인이 잃은 돈을 생각한다면 돈이라고도 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그 세 개의 은원보를 빤히 바라보던 낭인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돈은 없지. 하지만 걸 건 있다.”
“여긴 돈 아니면 안 받수.”
“받게 될 거야.”
“……음?”
채규가 살짝 눈을 찌푸리며 사내를 바라보았다.
‘쯧쯧. 돈만 잃고 가는 게 나았을 텐데.’
탁자 아래로 손을 내린 채규가 허리춤의 도 손잡이를 슬그머니 움켜잡을 때였다.
“그 전에…… 하나 묻지.”
“……뭐요?”
낭인은 천천히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그러더니 고개를 뒤로 늘어뜨리며 젖혔다.
채규의 목덜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뭐지?’
본인의 변화를 스스로 이해할 수 없었던 그는 당황했다. 딱히 눈앞의 사내가 두려운 것도 아닌데, 왜 몸이 이리도 반응한단 말인가?
그때 낭인의 목소리가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즐거운가?”
“…….”
경계심으로 번뜩이던 채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다.”
낭인의 고개가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길고 지저분한 앞머리는 여전히 그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때문에 채규는 그가 어떤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즐거운가?”
“……미친놈이…….”
채규가 좌우에 앉은 이들과 눈빛을 교환했다. 혹여라도 허튼수작을 부리면 언제라도 대처할 수 있도록 말이다.
낭인이 말했다.
“판돈이라. 그래, 남은 돈은 없지. 하지만 아직 걸 것은 남아 있다.”
“……그게 뭐지?”
“목숨.”
낭인의 거무튀튀한 입술이 섬뜩하게 말려 올라갔다.
“……빌어먹을. 여긴 돈 아니고는 안 받는다니까!”
“뭐해? 이 새끼 끌어내지 않고!”
그때 낭인이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붉은 장포가 흔들렸다.
“오해가 있는 모양이군. 내 목을 걸겠다는 게 아니야.”
“……뭐?”
“내가 아니라, 너희의 목숨이다.”
“……미친.”
“아니,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목숨. 더 나아가 이 항주에 있는 모든 이들의 목숨. 이 중원에 있는 모든 자들의 목숨일지도 모르지.”
채규는 불현듯 이 상황이 몹시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
그는 평소 저런 개소리를 들어 주고 있을 사람이 아니다. 이곳에서 판돈을 잃고 난리 치는 놈들을 그가 얼마나 많이 만났겠는가. 평소의 그라면 이미 도를 뽑아 저놈의 팔다리 중 하나는 잘라 내고 내쫓았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목을 잘라 버리든가.
그런데…….
‘나는 왜 저 개소리를 잠자코 들어 주고 있는 거지?’
“묻겠는데.”
낭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희의 목숨은 얼마지?”
“…….”
“그 목숨이 있기에 이렇게 삶을 시궁창에 처박아 대며 즐거워할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러니 묻는 거야. 그 목숨값이 얼만지. 그래야 그 돈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채규의 옆에 앉아 있던 귀견수(鬼見愁) 염호(廉昊)가 더는 참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쳤다.
“이 빌어먹을 놈이 감히 어디서 난장이냐! 내 목숨값이 얼마면 왜! 그걸 왜 네놈이 받느…….”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낭인이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고함을 내지르던 염호의 몸이 원탁 위로 휙 날았다. 마치 어딘가에 묶여 끌려가는 것처럼.
‘뭐?’
그 급격하고 부자연스러운 광경이 순간 채규를 얼게 했다.
쿠당탕탕!
원탁에 널려 있던 골패 짝과 은원보가 사방으로 튕겨 나가며 흩뿌려졌다.
기껏 따 놓은 돈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채규의 눈은 은원보로 향하지 않았다. 아니, 향할 수가 없었다. 낭인의 손이 원탁 위로 엎어진 염호의 얼굴을 움켜잡고 있었으니까.
‘어, 어떻게……?’
채규의 등을 타고 끈적한 땀이 흘렀다.
‘격공섭물(隔空攝物)?’
그게 아니고서야 설명이 되지 않는 광경이다.
하지만 그 해석도 말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물건 하나를 기운으로 끌어당기는 일도 까마득한 경지에 오른 이나 가능하다.
그런데 어떻게 물건도 아니고 사람을 기운으로 끌어당긴다는 말인가? 그것도 귀견수 염호 같은 이를!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규가 당황한 사이에, 붉은 장포 차림의 낭인은 느릿한 손짓으로 제 손에 잡힌 염호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왜 내가 받냐고?”
사내의 검은 입술에 귀기 어린 미소가 그려졌다.
“이유는 너무도 간단하지. 지금 너희의 목숨은 그저 저당 잡힌 것에 불과하니까. 이 중원의 모든 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그저 교에서 아직 너희의 삶을 허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끄……. 끄어어…….”
“그런데…… 아쉽구나. 아무리 봐도 네놈들의 목숨값은 한 푼을 넘지 못할 것 같으니까. 너무도 값싸고 쓸데없는 목숨들이군.”
“끄으……으아아아아아악!”
염호의 전신에 새파란 핏줄이 돋아 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온몸에 강침이 숱하게 박히기라도 한 듯 덜덜 떨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리고 그 순간 채규는 분명히 보았다.
의복 밖으로 드러난 염호의 몸이 마치 가뭄에 든 논처럼 말라 비틀어지며 쩌적쩌적 갈라지는 모습을 말이다.
‘저…….’
낭인은 그 와중에도 태연히 다른 한 손으로 천천히 제 앞머리를 넘겼다.
“어으…….”
채규가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앞머리를 넘긴 사내의 두 눈은 섬뜩할 정도로 붉었다. 붉은빛이 도는 수준이 아니다. 그 눈은 마치 피라도 잔뜩 고여 있는 듯 보였다.
거무튀튀한 입술과 창백한 피부, 핏빛 눈동자는 채규에게 이제껏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섬뜩함을 떠안겼다.
“끄아아아…….”
부들부들 경련하던 염호의 몸이 마침내 축 늘어졌다.
텅.
목내이(木乃伊: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진 염호의 몸이 원탁 위로 형편없이 널브러졌다. 오가던 돈과 골패 대신 원탁에 놓인 건, 이제 싸늘하게 식어 가는 처참한 시체였다.
“어…….”
“하찮은 것들.”
낭인의 기도가 한순간에 달라졌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그에게선 소름 끼치는 기운이 흘러나왔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히고, 전신의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 같은 기세였다.
“누…… 누구……?”
채규가 몸을 벌벌 떨며 간신히 물었다.
반항? 저항?
그런 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다.
무력의 차이를 논하기 이전의 문제다. 차마 형용할 수도 없는 격의 차이가 그를 독사 앞의 쥐새끼처럼 얼어붙게 했다.
“누구라.”
붉은 장포 차림의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대답하기 어렵군. 나는 이름이 없는 자니까.”
“…….”
그는 입가를 슬쩍 뒤틀며 냉소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건 그저 이름을 얻기 위한 발악에 불과할지도 모르겠구나.”
동시에 그의 두 눈에서 시뻘건 혈광이 흘러나왔다.
채규는 그 말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딱히 그럴 필요도 없었다. 사람은 자신이 죽은 뒤의 일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채규의 몸이 사내의 손을 향해 빨려들어 갔다.
“커억!”
단번에 목을 움켜잡은 사내가 채규의 두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 하찮은 목숨값에 비하면 너무도 영광스러운 죽음이구나. 그렇지?”
“미…… 미친…….”
콰드드득.
전신의 뼈가 으스러지며 말려 올라갔다.
“끄……으아아……아악…….”
단말마조차 제대로 토하지 못한 채규의 시신이 바닥에 널부러졌다. 전신의 뼈가 뒤틀린 듯 곱은 시체는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경악, 불신, 그리고 무엇보다 큰 공포가 도박장 안을 짓눌렀다.
뱀 앞의 쥐처럼 굳어 버린 이들을 싸늘하게 응시한 사내는 독백하듯 입을 열었다.
“시신으로 산을 쌓고…….”
“…….”
“그 피로 바다를 만들 만큼, 죽이고 또 죽이고, 또 죽이면…….”
저벅.
그가 한 걸음을 내디뎠다.
“세상 모두가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게 되겠지. 그래, 세상 모두가 말이다.”
“……으으.”
누군가가 공포에 질려 흘린 신음이 정적으로 물든 도박장 안에 퍼져 나갔다.
두 눈으로 혈광을 뿜어내며, 사내가 한 손을 위로 치켜들었다.
기이이이이잉!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검디검은 기운이 마치 칠흑의 칼날처럼 도박장의 천장을 꿰뚫었다.
“천마재림 만마앙복!”
사내의 귀곡성 같은 울부짖음이 터질 듯 울려 퍼졌다.
“너희의 하찮은 목숨이 우리의 외침이 될 것이다. 이 세상 어딘가에 재림하신 그분께 보내는 우리의 절규!”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항주의 뒷골목을 빼곡하게 채운 전각들이 일시에 폭죽처럼 터져 나갔다.
그건 절규이자 비명. 백 년 만에 세상에 울려 퍼진 광신의 악다구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