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0화. 너희가 시작한 싸움이야. (5)
마침내 당가마저 매화도에 상륙했다.
부릅뜬 눈으로 지켜보던 법정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이게…… 이게 무슨 일인가?’
저건 미친 짓이다. 목판을 발판 삼아 강을 건넌다고?
‘말이야 쉽지!’
언제든 끊길 수 있는 길이다. 만일 수로채의 대처가 조금만 더 빨라서 저들이 강의 중앙에 도달했을 때에, 앞뒤의 목판을 모조리 부숴 버리기라도 했다면 화산과 당가는 저 일엽편주(一葉片舟)만도 못한 목판 위에 고립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 뒤에는 무슨 참상이 벌어졌겠는가?
저런 건 전략이라고 할 수 없다. 뒤를 논할 수 없는 건 전략이라 부를 가치도 없다.
배수진은 적어도 상대에게 제대로 된 피해라도 입히고 몰살당하는 전략이다. 하지만 저건 단 한 부분이라도 삐끗하는 순간 상대에게 큰 피해도 입히지 못하고 그저 지옥으로 떨어지는 미친 짓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어째서 저게 통한단 말인가!”
당혹과 노기, 그리고 억울함이 뒤섞인 법정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어째서 저 무모하기 짝이 없는 방식이 그 대가를 치르지 않는 것인가!
지옥의 불구덩이로 기름을 지고 뛰어든 이들이 멀쩡히 불을 통과해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다.
상식적으로야 그 광경을 보며 혀를 차던 이들이 옳겠지만,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리고 나면 뻔히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들이 모조리 천치에 등신이 되어 버리지 않는가?
지금 소림이 딱 그 꼴이었다.
몇 번을 다시 생각해 봐도 그가 내렸던 판단이 옳다. 저 수로채와 만인방이 지키고 있는 장강으로 뛰어드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저 방식으로 매화도까지 무사히 도착할 확률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할 정도였다 해도, 그걸 저 천우맹이 실제로 성공시켜 버린 이상, 지금까지 이곳에서 머뭇거린 소림은 그저 머저리가 되어 버릴 뿐이다.
“이……!”
법정이 화를 삭이지 못하고 주먹을 떨며 강 건너를 노려보았다.
겉만 보는 이들은 저 화산과 당가가 사패련의 허를 찔러 도박에 성공했다고 말하겠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게 아니다.
이 모든 일이 벌어진 이유는 단 하나다.
“장…일소…….”
법정이 이를 갈아붙였다.
머리를 쓰는 일에 대해서는 마귀나 다름없는 장일소가 법정도 생각한 것을 놓쳤을 리 없다. 평소의 그라면 분명 느긋하게 화산과 당가가 강의 한중간까지 오기를 기다렸다가 앞뒤의 목판을 부수어 그들의 발을 묶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장일소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지 않은 정도가 아니다.
만인방의 배는 매화도의 건너편, 그러니까 강남 쪽에서 매화도를 포위하고 있다. 저 화산과 당가가 결코 닿을 리 없는 그곳을.
겉으로 보기에야 저 매화도를 포위한 채 남궁세가를 압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금 장강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서 손을 뗀 채 방관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저 화산과 당가가 남궁을 무사히 구출해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처럼!
“장일소! 이 개 같은 작자가!”
법정의 입에서 처절하기 짝이 없는 고함이 쏟아져 나왔다.
그 지독한 악의(惡意)에 몸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그가 지금 보고 있는 광경을 세상 누구도 믿어 주지 않으리란 점이다.
누가 믿겠는가?
그가 옳은 소리만 늘어놓고, 이 모든 것이 장일소의 계략이었다고 목놓아 외친다 해도, 그 누구 하나 법정의 말을 들어 주지 않을 것이다.
고작해야 위기에 몰린 소림의 발악이라 치부하며 그를 비웃겠지.
이곳은 백척간두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
“방장…….”
법정이 굳은 얼굴로 돌아보았다. 함께 상황을 지켜보던 종리형이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모르되, 이곳에서 구경만 하고 돌아간다면 천하의 비난이 우리를 향할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무언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무엇을? 대체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저 화산과 당가가 뚫어 놓은 길을 지금이라도 뒤따라가 생색이라도 내란 말인가? 천하의 구파일방이 천우맹을 따라가 보고자 아등바등 뒤라도 쫓으란 말인가?
법정의 안색을 살피던 종리형이 초조한 얼굴로 덧붙였다.
“물론 어려운 결단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지켜보느니, 무엇이라도 하는 것이…….”
“기다리시오.”
“방장!”
“내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소이까!”
순간 아연함에 종리형이 얼굴을 굳혔다. 법정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실망감이 두 눈에 여실히 묻어났다.
하지만 법정은 그저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안 된다.’
갈 수가 없다.
설명하기는 어렵다. 아니, 아무리 설명해 봐야 종리형 같은 인사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지금이라도 저 강에 뛰어든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저 패악무도한 장일소는 화산과 당가는 내버려 둔 채, 지독할 만큼 소림만 노릴 것이다.
화산과 당가는 어렵지 않게 해낸 일이거늘, 소림은 그들을 뒤쫓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는 말을 천하에 퍼뜨리기 위해서.
법정은 알 수 있었다.
저 장일소가 장강 위에 펼쳐 놓은 지독하고 악랄한 덫을.
‘빌어먹을.’
적어도 이곳에 자오개라도 있었다면, 그가 왜 움직이지 못하는지를 이해하고 변호해 주었을 것을!
하필이면 그 자오개가 다른 곳도 아닌 저 화산에 붙어 버렸다. 아마 그는 지금쯤 저 쾌도난마로 진격하는 이들 사이에서 화산이 이룩하는 모든 일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있을 것이다.
“으…….”
심장이 불에 타는 것만 같다.
마치 이 장강에서 벌어진 모든 일이 바로 그들, 소림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 안배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럼 돌아가기라도 하시지요.”
순간 냉소 섞인 목소리가 툭 날아들었다.
자문의 방장에게 내는 목소리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을 만큼 차가운 목소리였다.
법정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니, 혜방이 조소를 머금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서지 않고 지켜보기만 할 것이라면 굳이 이곳을 지키고 있어야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혜방.”
“아니면, 이곳에서 지켜보며 배우기라도 하란 겁니까? 저 화산의 영웅적인 활약을? 그게 아니면 검은 무복을 입은 혜연이 남궁을 구해 내는 광경을?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기 위해선 소림의 황포가 아닌 화산의 검은 도포를 입기라도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닥치지 못할까, 이놈!”
듣다 못한 법계가 호통을 쳤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도 미미하게 힘이 빠져 있었다. 지금 자신이 아무리 준엄하게 죄를 묻는다 한들 그 말이 먹힐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혜방은 법정과 법계를 빤히 보다 입을 열었다.
“예전에 장로께서 제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차게 가라앉아 있었다.
“스스로의 불법을 추구하는 것만이 길은 아니다. 진정한 불자라면 제 몸을 불태워 소신(燒燼)하는 한이 있더라도 가여운 중생들을 불도로 이끌 줄 알아야 한다. 멀리서 그들의 고(苦)를 지켜보기만 하는 것은 위선이며 죄악이다.”
순간 법계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지금 누가 죄악을 저지르고 있습니까?”
“이, 이놈이…….”
“예.”
혜방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사문의 존장을 음해한 죄, 결코 가볍지 않겠지요. 저는 참회동에 들어가 스스로를 되돌아보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차마 이 꼴을 더는 지켜보지 못하겠다는 듯이.
“이, 이놈이! 당장 멈추지 못하겠느냐?”
하지만 혜방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혜방을 바라보던 몇몇 소림승이 경멸 어린 시선으로 법계를 일별하고는 따라 몸을 돌렸다.
혜방을 비롯하여 수십에 달하는 소림의 무승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장강에서 멀어져 갔다.
“저, 저…….”
크게 당혹한 법계는 그 광경을 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무리 방장과 뜻이 맞지 않는다 해도 어찌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단 말인가. 소림의 문도가 방장의 명을 어기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소림의 계율원주인 그로서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우드드득.
주먹을 움켜쥔 그도 결국은 떠나가는 이들을 잡진 못했다. 그저 눈을 질끈 감아 버릴 뿐이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 냉혹한 강호에서 보신(保身)하는 법을 가르치기에는 저들이 너무 맑고 깨끗하다. 거기에 대고 흙탕물에 몸을 굴리는 법을 좀 배우라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는 법정도 저들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방장.”
그때 종리형이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말 이대로 지켜보기만 하실 겁니까?”
“하면!”
그 순간 법정의 입에서 발작처럼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신경질적인 목소리였다.
“그리 생각한다면 공동은 나서면 될 일이 아니오? 공동은 소림을 방패막이로 쓰지 않으면 스스로 결정조차 하지 못하는 거요?”
종리형이 입술을 짓깨물었다.
굴욕감과 노여움이 뒤섞인 얼굴로 법정을 노려보던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장의 뜻,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획 몸을 돌려 법정에게서 멀어졌다.
으득.
피가 나도록 주먹을 움켜쥔 법정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장일소, 그리고…… 화산검협!’
그는 매화도와 그 너머 강 위에 유유히 떠 있는 배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이 굴욕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
“흐음.”
커다란 화방(畵舫: 꽃배) 위에서 강 건너를 바라보던 장일소가 조용히 웃었다.
“방장이 화가 많이 난 것 같지 않니?”
호가명이 노골적인 비웃음이 서린 얼굴로 답했다.
“그래 봐야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겁니다. 한번 제 발을 멈춘 이는 어떻게든 이유를 찾아내기 마련이니까요. 본인이 스스로와 싸우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네 말이 맞다. 다만…….”
장일소가 미묘한 얼굴로 제 턱을 쓸어내렸다.
“아쉽긴 해. 이만큼 건드려 놨으면, 악에 받쳐서라도 뛰어들 만한데. 겁 많은 늙은 너구리는 과도하게 신중하단 말이야.”
“조금 더 도발합니까?”
“내버려 둬라. 그 신중함이 오히려 제 목을 죄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멍청한 놈에게 굳이 현실을 알려 줄 필요는 없겠지.”
장일소는 조소하며 강 건너를 넘겨다보았다.
스스로의 총명함을 과신하는 이들은 자신이 틀렸단 사실을 인정할 줄 모른다. 오히려 자신이 옳은 것을 세상 모두가 몰라준다고 여길 뿐. 멍청한 이들보단 저런 이들을 다루는 게 몇 배는 더 쉽다.
저곳에서 발을 떼지 못한 일은 이제 두고두고 소림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이 장강에서 벌인 일의 목적은 과하게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 이제 남은 것은…….”
장일소의 시선이 천천히 매화도로 옮겨졌다.
그 순간이었다.
파아아아아앗!
수로채의 통제에서 벗어나 매화도로 진격하던 한 척의 배에서 한 줄기 검은 선이 솟구쳤다. 마치 검은 유성처럼 매화도를 향해 날아든 그는 매화도의 대지에 틀어박히듯 착지했다.
순간 장일소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무려 이십여 장이 넘는 거리를 단 한 번의 도약으로 뛰어넘어 버리다니…….
“예상이라는 게 의미가 없는 놈이라니까.”
그는 한껏 미소를 띤 채 매화도에 도달한 이를 응시했다.
검을 역수로 틀어잡은 채 전장의 최전선을 향해 일직선으로 내달리는 청명의 모습을 말이다.
“이제 절정이로군.”
장일소가 기름한 눈을 휘며 붉은 입술을 혀로 천천히 핥았다.
그 모양새가 마치 먹음직스러운 먹이를 앞에 둔 독사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