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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968화 (969/1,567)

968화. 너희가 시작한 싸움이야. (3)

흩날리는 핏방울의 중앙을, 섬뜩할 정도로 벼려진 검이 정확하게 갈랐다. 선연한 선을 그려 낸 검은 입을 벌린 수적의 목을 망설임 없이 그어 버렸다.

파아아앙!

손끝에 일말의 저항감마저 느껴지지 않는 완벽한 베기였다.

이 광경을 본 수적들의 심장엔 섬뜩함이 절로 내려앉았다.

정파 무리는 이 검을 본 그들의 심정에 절대 공감하지 못할 것이다. 이건 겪어 본 이만이 알 수 있을 테니까.

사람을 숱하게 죽여 본 이들은 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제아무리 살인에 익숙한 이라 해도 인간의 급소를 찌를 때에는 반드시 주저하는 마음이 작게나마 생기기 마련이다. 그건 의지나 결심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다.

하지만 저자의 검에는 그런 것이 없다.

사람의 목을 쳐 날리는 그 순간에도 일말의 망설임도, 흔들림도 보이지 않는다.

수도 없는 사람을 검으로 죽인 살귀나 펼칠 수 있는 검.

저런 검을 쓰는 이들이 어떤 존재인지 경험으로 이해하는 수적들은 피가 써늘하게 얼어붙는 느낌에 떨 수밖에 없었다.

“으…….”

그러니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저 살귀가 그 진득한 공포를 제대로 느낄 틈조차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쾅!

갑판이 터지도록 바닥을 박찬 청명이 수적들을 향해 쇄도했다.

“으아아아아아악!”

공포에 질린 이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발작처럼 작살을 내질렀다.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한 찌르기는 아니었다. 상대를 죽이겠단 의지가 아닌, 상대의 접근을 막고야 말겠다는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의도야 어찌 되었든 한 사람을 향해 수십 개의 작살이 날아드는 광경은 분명 무시무시하다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두 눈에 싸늘한 한기를 머금은 젊은 검수는 날아드는 수십 개의 작살을 보면서도 그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을 뿐이었다.

스슷.

그건 마치 환상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물러나도 된다. 받아쳐도 된다.

상대의 공격에 대응할 방법은 수십 가지도 넘을 것이다. 하지만 청명이 선택한 것은 가장 무모하면서도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스슷.

수십의 작살 사이로 드러난 미세한 틈을 향해 청명이 유령처럼 파고들었다.

카가강!

찔러 오는 작살을 살짝 옆에서 쳐 내고, 어깨를 뒤틀어 스쳐 지나간 작살을 밀어 낸다. 그렇게 작살의 숲을 헤치고 비틀며 제 공간을 만들어 낸 것이다.

수적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 순간 그들이 맞닥뜨린 건, 숱한 작살 사이에서 하얗게 웃는 한 마리 악귀였다.

팟.

좌측 아래로 겨눠진 검이 살짝 앞으로 나아갔다.

느릿하게 시작된 검격이 폭발적으로 가속하며 완벽한 직선을 그어 냈다.

순식간에 수적들의 목을 가른 붉은 검격이 또 연이어 한 수적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수적은 도망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짐승 같은 비명을 토했다.

파아아아앗!

아니, 토하려 했다. 하지만 그 비명이 입 밖으로 채 나오기도 전에 청명의 검이 그의 목을 쳐 날렸다.

단번에 다섯의 몸뚱이가 반으로 갈라졌다. 검에 실린 여력을 감당하지 못한 상반신이 잘려 나간 채로 허공에 솟구치며 팽이처럼 회전했다.

흩뿌려진 피가 장강의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졌다.

단 일 검에 십여 명의 명을 달리했다. 아직 채 쓰러지지 못한 하체들이 내뿜는 피를 보며, 수적들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이 배에는 여전히 수십의 동료가 있다. 그리고 적은 하나뿐이다.

하지만 지금 그런 사실들이 무슨 의미를 가지겠는가.

흩날리는 피를 맞으며 청명이 시선을 돌렸다.

아직 채 다 식지 않은 피로 붉게 젖은 얼굴에, 검은 머리카락이 들러붙어 있었다.

검디검은 눈동자가 어떤 감정의 빛도 띠지 않은 채 수적들을 응시했다.

“으, 으…….”

촤아악!

이윽고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낸 청명은 다음 먹이를 찾듯 움직였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사, 살려 줘어어어어!”

붕괴가 시작되었다.

수적들은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돌렸다. 제 작살이 동료의 몸을 찌르는지도 모르고, 앞에서 달리는 이를 잡아끌어 가며, 생에 다시 없을 속도로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머리에 든 것은 하나뿐이다.

살고 싶다.

저 악귀와 한 공간에 존재한다는 건 오로지 죽음만을 의미한다. 이 사실을 이해한 수적들에게 유일한 지상과제는 악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생존하는 것뿐이었다.

달아났을 때 돌아올 문책 같은 건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진짜 공포가 무엇인지를 알아 버린 이들에게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있겠는가.

머리가 텅 비어 버린 이들이 악다구니를 쓰며 배 밖으로 몸을 날렸다. 강 안에만 뛰어들면 저 악귀도 더는 쫓아오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번 피를 본 악귀에겐 자비가 없었다.

파아아아앗!

일말의 주저도 없이 움직인 검이 수적들의 등을 갈랐다. 갑판을 박차는 이의 발목을 내리찍고, 엎어진 이의 척추를 끊었다.

쾅!

다시 바닥을 박차고 솟아오른 청명이 배 밖으로 뛰어나가는 수적들의 등을 향해 검기를 줄줄이 뽑았다.

반월형의 검기는 감히 그에게 등을 보인 이들을 응징하듯 거침없이 몸을 베어 버렸다.

“아아아아악! 으악!”

“크아아아악!”

허공에서 검기에 꿰뚫린 수적들의 비명이 장강의 강물 위로 처절하게 쏟아졌다.

풍덩! 풍덩!

저 악귀의 검이 닿지 않을, 그토록 원하던 물속에 도달한 수적들은 안타깝게도 기뻐하지 못했다. 죽은 이는 기뻐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으니까.

탁!

갑판 위에 다시 내려선 청명의 시선이 앞에서 덜덜 떨고 있는 수적에게로 향했다. 발목이 잘려 갑판 밖으로 뛰어들지 못한 이였다. 그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더듬더듬 말했다.

“어, 어떻게 다, 달아나는 이를…….”

그러자 청명이 피식 웃었다.

“서로 죽이자고 싸우다가 등을 돌려 달아나면 그때부터는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건가?”

청명이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

“네놈들은 하고 싶은 짓거리 다 해 대면서, 우린 그래야 한단 말이지? 정파니까?”

그가 점점 다가올수록 수적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물론 그럴 수 있지. 그런 놈들도 있겠지. 하지만…….”

푸욱!

청명의 검이 무정하게 수적의 심장을 꿰뚫었다.

“나는 아니야.”

수적은 제 왼쪽 가슴에 틀어박힌 검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파앗!

검이 뽑혀 나가는 순간 절명한 그의 고개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더 이상 미련도 주지 않고 고개를 든 청명은 갑판 위에 서 있는 이가 없음을 확인하고 미련 없이 배를 박차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쾅!

그리고 수면을 박차 앞으로 나아가며 입꼬리를 뒤틀었다.

그가 향하는 곳은 화산의 본대가 아닌, 화산을 향해 접근하는 또 다른 배가 있는 곳이었다.

“이, 이 빌어먹을 놈들이!”

흑룡왕의 입에서 노호성이 폭발했다.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이 머저리 같은 놈들아!”

그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저 망할 화산 놈들이 지금 이 장강을 제멋대로 가로지르고 있건만, 그가 자랑하는 수로채의 수적들은 조금도 저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퍼부어 대는 화살도, 아래에서 찔러 대는 작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심지어 기껏 배치한 백뢰포마저도 순식간에 박살이 나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이해할 길이 없었다.

남궁세가도, 심지어는 저 소림도 수로채를 두려워한 곳이 바로 이 장강이다. 그런데 어떻게 화산은 수로채의 영역 위에서 되레 압도하며 싸울 수 있단 말인가?

“발판!”

흑룡왕이 목이 터져라 고함을 내질렀다.

“발판을 부숴라, 이 멍청한 놈들아! 맞서지 말고 발판을 부수라고! 물속으로만 끌어들이면 아무것도 아닌 놈들이다! 놈들의 앞에 있는 발판부터 노려!”

분명 그 판단은 정확했다.

때로는 아주 작은 요소가 어마어마한 차이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 모든 상황은 저 화산이 밟고 있는 작은 목판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떤 판단이든 신속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도하하여 가기엔 아득하게만 느껴지던 매화도도, 평지로 내달리면 순식간에 도달할 만큼 가까워졌다. 흑룡왕이 고함을 내질렀을 땐, 화산의 선두가 이미 섬에 거의 도달한 뒤였다.

“이 쥐새끼 같은 놈들이!”

흑룡왕은 흑룡선을 부숴 버릴 것 같은 패기를 내뿜으며 언월도를 치켜들었다.

고오오오오오오오!

도 끝에 가공할 기운이 어리기 시작했다. 핏발 선 그의 눈이 선두에서 화산을 이끄는 백천을 정확하게 쏘아보았다.

“죽어라아아아아아!”

콰아아아아아아아!

그의 언월도가 위에서 아래로 흉포하게 내리그어졌다!

도기가 백천을 향해 폭발적으로 뿜어졌다. 제왕검을 이 흐르는 물속에 잠들게 만든 바로 그것. 흑룡왕이라는 이름이 어째서 이 장강 위에서 공포로 군림하였는가를 여실히 증명하는 도기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아!

쏟아져 나온 도기는 대기를 찢어발기고, 그 기파만으로도 장강 수면 위에 긴 선을 그었다.

흑룡왕은 이 도기가 상황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저 얄팍한 검으로는 절대 막아 낼 수 없을 테니까.

그 순간 직선으로 내달리던 백천이 날아드는 도기를 슬쩍 일별했다. 하지만 그뿐.

백천은 분명 그 공격을 봤음에도 다시 앞을 보고 더 빠르게 달려 나갔다.

그 어이없는 상황에 흑룡왕이 헛바람을 집어삼킨 바로 그때였다.

“아—미—타—불!”

불호가 들려왔다.

중원의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지만, 감히 이곳, 이 장강 위에서만큼은 들릴 리가 없는, 들려선 안 되는 불호가 말이다.

“뭣?”

이윽고 백천을 향해 날아가던 도기 앞으로 누군가가 빛살처럼 솟아올랐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온 황금빛 웅혼한 불광이 태양처럼 빛을 쏟아내었다.

“소, 소림?”

흑룡왕이 두 눈을 부릅떴다.

“타아아아아아아압!”

솟아오른 혜연이 뒤로 힘껏 뺐던 주먹을 단번에 앞으로 내질렀다.

우우우우우우우웅!

그가 뿜어낸 백보신권(白步神拳)이 날아들던 도기와 충돌했다.

백천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 가던 도기가 위쪽으로 뒤틀리더니 화산의 제자들을 넘어 반대편에서 포위망을 조여 오던 수적선에 그대로 틀어박혔다.

콰아아아아아앙!

“아아아아아아아악!”

“무, 물이 들어찬다! 막아! 배가 가라앉는다!”

도기의 위력은 실로 대단해서, 수적선의 아래를 쩍 갈라 버렸다. 그 안으로 장강의 푸른 물이 소용돌이치듯 밀려들었다.

하지만 그 수적선의 광경 따윈 흑룡왕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그의 도기를 튕겨 내고 그 여파에 떠밀려 튕겨 나가고 있는 한 사람에게만 꽂혀 있었다.

저자는 화산의 제자들과 같은, 검은 무복을 입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정체는 명백하지 않은가?

의문은 오직 하나뿐이다.

“왜 여기에 소림이 있는 것이냐! 어째서!”

하지만 이곳에는 그의 고함에 대답해 줄 이가 아무도 없었다.

한편 혜연을 믿고 흑룡

왕의 도기를 무시한 백천은 더 박차를 가해 앞으로 내달렸다.

쾅!

잠시 후, 부숴 버릴 듯 목판을 박찬 백천의 몸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넘실거리는 장강 위로 도약한 그는 검은 선이 되어 푸른 하늘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마침내.

쿠웅!

백천의 두 발이 목판이 아닌 땅에 내려섰다.

바로 이곳, 매화도에.

“…….”

섬의 가장자리에서 맞닥뜨린 수적들은 질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바닥에 착지하느라 몸을 굽혔던 백천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장문인의 명을 받들어.”

“…….”

“수적들을 무찌르고 남궁세가를 구출한다.”

백천이 검을 들어 전방을 겨누었다.

“이행하라!”

그 순간.

뒤이어 매화도에 도착한 화산의 검수들이 백천을 스쳐 지나가며 수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흐아아아압!”

“무찔러라!”

그들의 검 끝에서 일제히 붉은 검기가 피어올랐다. 검기는 이내 화사하게 피어나 매화도의 한편에 그 이름에 걸맞은 붉은 매화를 피웠다.

실로 아름답고, 또 강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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