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3화. 실망시키지 않는다니까. (3)
수십 척의 거대한 배가 일제히 뱃머리를 돌렸다. 그 여파는 실로 대단하여, 잔잔하던 장강의 수면을 뒤흔들어 놓을 정도였다.
밀려오는 파도에 조각배가 흔들렸지만, 정작 그 위에 선 장일소는 평지에 선 듯 평안해 보였다.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소림과 공동을 슬쩍 돌아보았다.
“한심한…….”
얼굴에 노골적인 경멸이 피어났다.
호가명은 조용히 그런 그의 표정을 살폈다.
구파의 수장이자, 강호의 북두라 불리는 소림이 저리 한심한 것들이라면 장일소의 대계(大計)가 이루어지는 날도 그만큼 빨리 올 터.
하지만 지금 장일소의 표정에 어린 감정은 분명 기쁨보다 짜증에 가까워 보였다.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십니다.”
“좋을 리가…….”
장일소가 심드렁하게 답했다.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허우적댈 때, 나를 지탱해 준 것은…….”
그의 얼굴에 순간 귀기가 스쳤다.
“언젠가는 저들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아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맹세였다.”
“…….”
“그런데…….”
잠깐 말을 멈춘 장일소가 경멸 어린 시선으로 소림을 노려보았다.
“강호를 좌지우지하는 작자들의 실체라는 게, 겨우 저런 거라니.”
붉은 입술 새로 자조적인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인간은 논리 속에 본심을 감춘단다. 아마 저들은 지금쯤 자신들이 나서서는 안 될 이유를 수십 가지는 만들어 내고 있겠지. 들으면 그럴싸하고 웬만해서는 반박할 수 없는 그런 논리를 말이다.”
장일소의 비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결국 파헤쳐 보면 그저 겁이 나는 것뿐이지. 한 번도 피를 흘려 무언가를 쟁취해 보지 못한 놈들은 얻어 낼 것의 가치보다는 잃을 것의 가치를 더 크게 느낄 수밖에 없으니까.”
다른 이가 이런 말을 했다면 호가명은 주저 없이 오만무도하다고 평가했을 것이다. 소림은 천하의 주인은 되지 못해도, 강호의 주인이라고는 할 수 있는 이들. 그런 이들에 대한 평가치고는 지나치게 단편적이니까.
하지만 적어도 장일소만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다. 장일소가 얼마나 처절하게 이 자리까지 올라왔는지, 호가명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알게 되겠지.”
장일소가 나직이 말했다.
“작은 것을 잃기를 두려워하는 이는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걸.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호가명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저들이 그걸 알게 될 때는 이미 모든 걸 잃은 뒤일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장일소가 쿡쿡대며 웃었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그리고 손에 들린 술병을 기울여 한 모금 들이켜더니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술을 장강 위에 부어 버렸다.
“뭐, 좋아. 얻을 것은 모두 얻었으니까.”
여전히 구파는 이쪽을 금방이라도 찢어 죽일 듯 노려보고 있다. 장일소는 그들이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지금 당장에야 사패련과 장일소에 대한 노기로 정신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분노가 가시고 나면 곧 알게 될 것이다. 자신들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죄악을 느낀 인간은 어떻게 할까?
반성? 사죄?
‘천만에!’
그럴 수 있는 인간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명백히 제 잘못으로 벌어진 일에도 변명거리를 찾고, 타인의 잘못으로 꼬투리를 잡으며 비난하는 게 인간이 아니던가?
균열을 만든 것은 장일소다.
하지만 그 균열을 잡아 벌리는 것은 다름 아닌 저들 자신이 될 것이다.
이젠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가 만들어 낸 상처가 곪고 또 곪아 살을 썩게 만들고, 뼈를 녹일 때까지.
그가 이곳에서 이루고자 하던 것은 이미 모두 이뤘다. 남은 것은 그저…….
“여흥이지.”
장일소의 시선이 매화도로 향했다.
“자…….”
그가 가볍게 목을 살짝 꺾으니 전신에 걸친 장신구들이 짤랑였다. 흡사 환호하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이제 저 가여운 남궁의 피로 이 무대의 마지막을 장식할 시간이구나.”
“모시겠습니다.”
호가명이 배를 흑룡선 쪽으로 몰아가려던 그때였다.
“아니. 거긴 이제 됐다.”
장일소가 한쪽 손을 들어 그를 말렸다. 호가명이 의혹 어린 눈으로 돌아보자 장일소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흑룡왕의 너무 봐서 이제 지겨우니 우리 배로 돌아가자.”
“……예, 련주님.”
작은 의혹이 일었지만, 호가명은 굳이 이유를 따져 묻지 않았다. 장일소의 모든 행동에는 언제나 계산이 깔려 있다. 이번에도 그가 짐작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거칠어진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는 조각배 위에서 장일소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이 강변에 자리한 구파를 넘어, 더 먼 곳으로 가 닿았다.
“그렇지?”
그의 뜻 모를 질문이 먼 허공으로 던져졌다.
“큭큭.”
옅은 웃음을 흘린 남궁명의 두 눈에 짙은 회한이 어렸다.
“끝끝내…….”
마지막 해가 뜨고 말았다.
기대 같은 건 진즉에 버렸다. 저들이, 소림을 비롯한 구파가 그들을 구할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상황이 이 지경까지 이르도록 지켜보지만은 않았을 테니까.
그래.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이 순간이 다가오니 남궁명은 자신이 저들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건 저들에 대한 믿음이 아닐지도 모른다.
협과 정이라는 두 글자를 숭상해 온, 그가 걸어온 길에 대한 믿음이다. 그가 지금껏 믿어 왔던 것이 완전히 거짓은 아닐 것이라는 구질구질한 미련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그의 삶을 비롯한 모든 것이 부정되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곳에 섰는가?’
남궁명을 더욱 분노케 하는 것은 저들이 보이는 구구절절한 미련이었다.
돕지 않을 거라면, 두 눈을 뜨고 그저 지켜볼 것이라면 차라리 단호하게 몸을 돌리기라도 할 것이지!
무엇을 위해 저기서 자리를 지키고 있단 말인가? 그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마음의 위안이라도 얻을 셈인가?
“……대주.”
끔찍한 감정의 격랑에 휩쓸리던 남궁명이 그 부름에 눈을 질끈 감았다. 차마 고개를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체 뭐라 말해야 한단 말인가? 마지막까지 버티고 또 버티라고 그토록 소리쳐 댔건만, 그가 이들에게 줄 수 있는 최후라는 게 겨우 이런 것이었나?
같은 길을 걷는 동료라 믿었던 이들에게 외면당하고, 승냥이 떼 같은 사파 무리에게 농락당하는 것?
남궁명이 무너지듯 고개를 숙이려던 바로 그때였다.
“전열을 갖추셔야 합니다, 대주.”
의외의 말에, 그는 덜덜 떨리는 턱을 꽉 악물고 뒤를 돌아보았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부상자를 돌보던 이도, 어떻게든 지친 몸을 회복해 최후를 대비하던 이도, 심지어는 얼마 전까지 사경을 헤매던 부상자들마저도.
하나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맞추고 있었다.
부들거리는 다리를 필사적으로 부여잡고, 금방이라도 끊겨 버릴 것 같은 의식을 어떻게든 다잡으며.
“……어차피 마지막 아닙니까?”
“…….”
남궁평이 그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누워서 적의 칼을 기다리는 취미 같은 건 없습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싸우다 죽겠습니다.”
“평아…….”
“맞는 말입니다.”
뒤쪽에서 큭큭거리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마침 지켜보는 관객도 있으니……. 남궁세가의 검수가 어떻게 죽는지 보여 줘야지요.”
“저 겁쟁이 놈들에게 말이죠?”
“그래, 그렇지.”
남궁명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모든 사태를 초래한 것은 남궁황을 비롯한 남궁세가 수뇌들의 실책이었다. 그 실책으로 말미암아 목숨마저 잃을 상황에 처했거늘, 이들 중 누구도 원망의 말을 입에 담지 않는다.
그가 저들의 입장이었다면 저리 의연할 수 있었을까?
남궁명은 그럴 자신이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미안하고, 더욱 고마웠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누군가의 입에서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적어도 소가주는 여기에 없잖습니까.”
“그러니까.”
“소가주까지 여기 계셨으면 정말 쫄딱 망할 뻔했지.”
순간 당황한 남궁명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런 게 아니다. 소가주께서는……!”
“압니다, 대주님.”
당혹에 물든 남궁명의 얼굴을 보며 남궁세가의 검수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소가주께서 저희를 구하기 위해 몸을 돌보지 않으신 거지, 혼자만 살겠다고 빠져나간 게 아니라는 건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행이라는 것 아닙니까.”
“적어도 명맥은 이어질 테니까.”
남궁 검수들의 눈에 결연한 의지와 독기가 서서히 차올랐다.
“복수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소가주께서 저희 젯밥 정도는 챙겨 주시겠지요.”
“그래, 그래. 그럼 됐지.”
남궁명이 고개를 숙였다.
살고 싶지 않은 이가 어디 있으랴. 적의 바짓가랑이라도 부여잡고 살려 달라 빌고 싶지 않은 이가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럴 수 없다.
그들을 살리기 위해 목숨 건 탈출을 감행했던 남궁도위와 저 차가운 장강 아래에 잠겨 있을 남궁황, 그리고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어 간 장로들을 생각한다면, 이젠 죽는 한이 있어도 저들에게 고개를 숙일 수 없다.
가주이기 때문에?
아니다. 같이 싸운 동료기 때문이다.
이곳에 남은 이들을 위해 죽어 간 이들에게 부끄럽고 싶지 않으니까.
“멍청한 놈들.”
남궁명이 급히 몸을 돌렸다. 이대로 이들을 보고 있으면 눈물을 쏟아 버릴 것 같아서였다. 이들의 말대로 이제 마지막이다. 그럼 적어도 추한 모습은 보여서는 안 된다.
“시간이 걸릴 것이다.”
“…….”
“어쩌면 백 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아무리 가문에 아이들이 남아 있다고 해도, 남궁이라는 이름의 위상을 되찾기 위해서는 그 정도는 필요할 터.”
검을 콱 움켜잡은 남궁명의 등을, 모두가 뚫어져라 보았다.
“그러니 등불이 되어 주자꾸나.”
남궁명이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가문에 남은 이들에게 앞으로의 시간은 지독한 어둠 속을 헤매는 것과도 같을 터. 그 시간을 버텨야 하늘에 떠오르는 태양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 긴 시간을 버텨야 할 후손들에게 자랑이 될 수 있는 죽음을 맞아라! 남궁의 검수들이 결코 비겁하지 않다는 것을 이곳에서 증명해라!”
모두가 검을 움켜잡았다.
무인은 그 죽음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법.
끝의 끝까지 와서야 그 말이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두가 이해했다. 망설임이 사라진 눈빛으로, 배에서 뛰어내려 섬으로 진격해 오는 수적들을 노려보았다.
“전열을 갖춰라!”
“충!”
가장 앞에 선 창궁검대의 생존자들이 목이 터져라 고함쳤다.
창천남궁세가.
사람은 죽는다. 하지만 그 이름은 남아 기억되는 법.
이 죽음으로 그들의 의지를 전할 수 있다면 결코 개죽음은 아닐 것이다.
“창천과 남궁의 이름으로!”
남궁명이 피를 토하듯 외쳤다.
“악적들을 주살해라!”
그러자 우렁찬 함성과 함께 남궁세가의 검수들이 상륙하는 수적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자리를 지켜 버티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들이 보여야 할 것은 끈질김이 아니라 의지니까!
‘소가주!’
검을 움켜쥔 남궁명 역시 빛살처럼 돌진했다.
‘반드시 살아남으시오! 반드시!’
지금 이곳에서 보일 우리의 의지가 남궁도위에게 이어지기를.
그리고 자라날 남궁의 아이들에게까지 오래도록 닿기를.
붉은 피가 솟구쳤다.
선두에 있던 남궁 검수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와, 수적들의 목이 잘려 나가며 솟는 피가 남궁명의 시야를 붉게 물들였다.
하지만 비명은 나오지 않는다. 남궁의 이름을 쓰는 이들 중 그 누구 하나 나약한 비명을 지르는 일이 없었다.
가슴에 베이고 팔이 끊어지는 순간에도, 그저 이를 악물고 한 번이라도 더 검을 휘두른다.
죽음. 그리고 또 하나의 목숨.
이 숱한 죽음들 속에 남궁명의 목숨마저 더하리라!
“남궁세가의 남궁명이 여기 있다! 이 개자식들아!”
남궁명은 어느새 앞장선 창궁검대의 머리 위를 뛰어넘어 수적들의 사이로 강하했다. 그가 쥔 검이 내리쬐는 햇살을 받아 한없이 눈 부신 빛을 내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