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5화. 벌써 시작되었을지도 모르죠. (5)
“화산검혀어어어어업!”
홍대광이 문을 쾅 박차고 들어오자 청명의 눈꼬리가 대번에 뾰족해졌다.
“아니, 근데 이 양반이 여기가 무슨 거지 굴 앞마당쯤 되는 줄 아나?”
“지,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화산검협!”
“왜요, 또?”
“나, 남궁세가가!”
남궁세가라는 말이 나오자 백매관에 둘러앉아 있던 이들의 눈이 일제히 가늘어졌다.
“남궁세가가 수로채에 포위당했다!”
“…….”
청명이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자, 홍대광이 답답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며 달려와 얼굴을 들이밀었다.
“주 전력이 매화도에 갇힌 채로, 수로채의 배에 둘러싸였단 말이다! 지금 당장 어떻게 하지 않으면 모조리 몰살당할지도 모른다. 내 말 듣고 있…….”
“아! 거 더럽게 땍땍거리네, 시끄럽게!”
청명은 가까이 놓인 홍대광의 볼을 손가락 끝으로 꾹 눌러 밀어 냈다. 다른 이들이 이리 달려들었다면 대번에 주먹을 날렸겠지만, 아무래도 길바닥을 구르며 사는 거지다 보니 닿는 면적을 최대한 줄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화산이 제자들이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이 예의 바르네. 손도 쓰고.”
“응. 나는 발로 밀어 낼 줄 알았는데.”
“애가 그래도 많이 착해졌어. 옛날 같았으면 신발 바닥으로 걷어차 버렸을 텐데. 흐뭇하구나.”
“…….”
저기요? 이게 예의가 바른 거라고요?
대체 화산 놈들은 무슨 어둠을 겪고 있는 건가, 순간적으로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의 홍대광에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 어떻게 하냐?”
“뭘요?”
“남궁세가 말이다! 남궁세가!”
청명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홍대광을 바라본다.
“남궁세가 뭘요?”
“어떻게든 해야 할 것 아니냐!”
“남궁세가를요?”
“그래!”
“제가 왜요?”
홍대광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다 죽는다니까? 이대로는 몰살이라고 하지 않느냐!”
“아이고, 저런. 그래서 어떻게 한대. 쯧쯧쯧.”
홍대광이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그…….”
뭔가 더 말해 보려 했지만 그 전에 청명이 짜증 가득 실린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근데 이 아저씨는 내가 무슨 도깨비 방망이인 줄 아나! 문제만 생기면 달려와서 징징대게!”
“…….”
“지들이 생각 없이 들어가서 포위됐으면 지들이 알아서 해야지. 뭔 세 살짜리 애들도 아니고, 사고는 지들이 치고, 해결은 내가 하나?”
“마, 맞는 말이기는 한데, 그래도…….”
“그러니까 애초에 거긴 왜 기어들어 가냐고. 그 인간은 미치려면 곱게 미칠 것이지. 거기가 어디라고 씩씩하게 들어가냐고! 숭어가 뛰면 망둥어도 뛴다더니, 내가 하면 지들도 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보지?”
남궁황이 착각을 한 이유도 이해가 간다.
삼 년 전 전력으로만 따지면 감히 남궁세가와 비교도 하기 힘들었던 게 화산이다. 그런데 심지어는 그 화산도 아닌 녹림의 일부가 섬을 점거하고 강남과 수로채를 동시에 견제하는 걸 봤으니, 자신들도 그게 가능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야 그렇겠지.’
하지만 매화도의 실상은 그런 게 아니다. 매화도는 장일소와 청명이 서로의 필요에 의해 맺은 조약의 결과다.
방어가 쉬워서 적의 습격을 막아 낼 수 있었던 곳이 아니라, 공격해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막을 필요가 없었던 것뿐이다.
화산이 물러나며 조약의 존재가 사라지는 순간 모든 게 바뀌었다. 이제 매화도는 적의 땅 한가운데에 놓인, 탈출로 없는 험지에 지나지 않는다. 점거할 수 있다면야 막대한 이득이 보장되지만, 애초에 점거가 불가능한 땅이 되었다는 의미다.
막말로 그 섬을 두고 사패련과 구파가 쟁탈전을 벌인다고 치자.
그럼 어느 쪽이 유리하겠는가?
‘수로채를 보유한 사패련이 무조건 먹을 수밖에 없는 땅이지.’
그래서 청명도 임소병도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발을 빼 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 위험한 땅에 생각 없이 마구잡이로 들어갔으니…….
약하면 맞고, 모르면 맞고, 깝치면 맞는……. 아, 마지막은 빼고.
여하튼 무지하면 맞아야 한다는 건 강호의 진리가 아니던가?
“그래도 옛날에는 남궁세가 놈들이 생각이라는 게 제법 있었던 것 같은데.”
사고 치는 건 보통 팽가였고, 남궁세가는 그걸 수습하는 역할이었다. 그런데 대체 백 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남궁세가가 저 꼴이 났…….
“잠깐만.”
“응?”
“혹시나 싶어서 묻는 건데, 남궁황 그 아저씨 있잖아요.”
“응? 남궁가주? 남궁가주는 왜?”
“그 양반 어머니가 누구예요?”
그 순간 홍대광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화, 화산신룡. 무, 물론 네가 거칠 것이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그건 좀 선을 넘은 것 같…….”
“아오, 씨!”
청명이 다짜고짜 홍대광을 걷어차 굴려 버렸다.
“이 양반이 갑자기 사람을 패륜종자로 만들고 있어!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요?”
그 말을 들은 화산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지.”
“하고도 남지.”
“기사멸조도 숨 쉬듯이 저지르는데 저 정도야 뭐.”
근데 이 새끼들이?
“그게 아니라 모계가 어디냐고! 가문! 가문!”
“아, 가문?”
안도의 한숨을 내쉰 홍대광이 머릿속을 뒤졌다.
“어디 보자……. 내가 알기로는 현 남궁가주의 모친은 팽씨로 알고 있는데…….”
“아, 그죠?”
그래. 역시 그럼 그렇지.
그 피가 어디 가나.
그제야 풀리지 않는 의문이 풀렸다는 듯 청명이 개운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쩐지. 어쩌다 남궁세가에서 그런 양반이 나왔는가 했더니만.”
일반적인 문파에서는 그럴 수 있다. 문파란 하나의 가치를 두고, 수많은 이들이 모여드는 곳이니까.
하지만 가문이란 피로 이어지는 곳. 비슷한 기질을 타고난 이들이 비슷한 교육을 받다 보면 결국은 결이 비슷해질 수밖에 없지 않던가?
물론 남궁황은 팽가의 기질이 섞였다는 것을 감안해도 정도가 좀 과하기는 하지만…….
“청명아.”
“응?”
그때, 청명에게 다가온 오검 중 백천이 물었다.
“어떻게 될 것 같으냐? 남궁세가가 그곳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렵겠지.”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냐?”
“흐음. 그게…….”
청명이 턱을 문질러 댔다.
“예상대로 흘러간 거기는 한데, 또 조금 다르기도 하단 말이야.”
남궁세가가 완전히 낭패를 볼 것이란 사실이야 눈에 뻔히 보인다. 이 시대의 무인들은 대규모의 전쟁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그러다 보니 지형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하지 못한다.
물론 병법이야 배웠겠지. 하지만 자신의 무력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남궁세가가 매화도로 진격할 것까지는 예측했는데……. 문제는 흑룡왕이야.”
“흑룡왕?”
“생긴 건 다짜고짜 매화도로 돌진해서 너 죽고 나 죽자를 시전할 것같이 생겨서는…… 의외로 노회하단 말이지. 늙은 너구리같이.”
“사람을 외양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지만…….”
이 말에는 백천도 공감했다. 삼 년 전 장강에서 본 흑룡왕은 말 그대로 패도의 화신 같아 보였으니까. 그가 이끄는 수로채와 남궁황이 이끄는 남궁세가가 맞붙었는데, 이런 양상이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만약에 그 흑룡왕이라는 놈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성격 폭급한 놈이라서, 포위한 김에 몰아서 섬멸하겠다고 섬으로 쳐들어간다면 오히려 남궁에도 활로가 열릴 거야.”
그 말을 듣던 백천이 안색을 굳혔다. 청명이 이렇게 말할 때는 언제나 다른 상황을 염두에 둘 때니까.
“만약.”
백천이 어둑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흑룡왕과 수로채가 섬으로 쳐들어갈 생각이 없으면 어떻게 되느냐? 어느 쪽의 구원이 먼저 도착하느냐의 싸움이 되는 거냐?”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되겠지. 그런데…… 그렇게 되질 않을 거야.”
“응? 어째서냐?”
“흑룡왕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까.”
“그게 무슨…….”
잠깐 고개를 갸웃하던 백천은 순간 뭔가가 떠오른 듯 흠칫했다.
“그…… 그래. 그렇구나.”
둘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 조걸이 의아한 눈으로 번갈아 보다 물었다.
“사숙.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저도 알아듣게 설명 좀 해 주십시오.”
“……남궁세가를 포위하고 있는 흑룡왕도 구원이 도착하는 쪽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거다.”
“그렇죠. 그 사람도 바보는 아닐 테니까.”
“하지만 생각해 보거라. 만약 흑룡왕이 보기에 구파 쪽의 구원이 먼저 도달할 것 같다면? 독 안에 든 먹이를 그냥 순순히 풀어 주겠느냐?”
“……아니죠.”
백천이 입술을 살짝 깨문다.
“최소한 구원이 당도하기 전에 남궁세가의 전력을 최대한 깎아 놓으려는 시도라도 하겠지. 서로 대치한 채 시간만 보내는 일 같은 건 벌어지지 않는다는 소리다.”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흑룡왕의 입장은 또 다르지. 사패련이 먼저 도착한다는 건 남궁세가에게 멸문을 의미하지만, 구파가 먼저 도착한다는 건 수로채에게 그냥 조금 더 귀찮은 상황에 불과해.”
“강 위니까?”
“그래.”
청명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예전에는 이런 대화를 하면 설명하느라 청명의 입이 바빴다. 하지만 이제는 백천 쪽에서 먼저 상황을 이해하고 그보다 먼저 대답을 내놓는다.
“어쨌거나 남궁이 할 수 있는 일은 버티는 것밖에 없어. 지금은 그게 전부지.”
“버틸 수 있을까?”
“남궁황은 미친놈이지만, 멍청이는 아니야. 버티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문제는…….”
청명의 얼굴이 살짝 비틀어졌다.
말을 고르는 듯 잠시 시간을 끈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람이 언제 무너지는 줄 알아?”
“…….”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백천은 차마 무어라 딴죽을 걸지 못했다. 그 목소리에 어린 알 수 없는 무거움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너지는 순간은 힘들 때가 아니야. 힘든 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어.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을 때는 말이야.”
“…….”
“사람이 무너지는 건 바로 희망이 끊기는 순간이야.”
청명이 슬쩍 조소했다.
“나도 궁금하네. 전쟁을 계산해서 하려고 하는 그 양반이 과연 저 남궁세가를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 용의가 있으실지 말이야.”
딱히 이름이 나온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모두는 청명이 지칭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서, 설마…….”
“그냥 생각이야, 생각. 아직 이뤄지지 않은.”
청명은 과하게 나가지 말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하지만 그 태연하고 가벼운 손짓과는 달리 눈빛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만약에…….”
청명이 살짝 뜸을 들이고는 말을 이었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 내가 생각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남궁세가는 살아서 지옥을 보게 될 거야.”
순간 정적이 흘렀다. 모두가 입을 열지 못했다.
“뭐, 우리야 굿이나 먹고 떡이나 먹으면 되니까.”
“청명아. 그렇다면 우리가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
“응?”
“그렇게 남궁세가가 위험하다면…….”
“사숙.”
청명은 백천의 말을 짓누르듯 끊었다.
“전장에 나서는 순간 모든 판단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하는 거야.”
“…….”
“내가 나서서 도와주는 게 당연하다 여기는 사람은, 위기에 처했을 때도 누군가가 당연히 나서서 도와줄 거라 여기게 되지. 그 안일함이 목숨을 앗아 간다.”
백천이 입을 다물었다.
“그게 전장이고, 그게 전쟁이야. 잊지 마. 그 안일한 판단으로 내가 아닌 내 사형제가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명심하마.”
고개를 끄덕인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모두 똑똑히 지켜봐 둬. 언젠가는 우리가 겪을 일이 될지도 모르니까.”
어쩐지 목이 타는 느낌에, 모두가 마른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