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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934화 (935/1,567)

934화. 벌써 시작되었을지도 모르죠. (4)

너무도 긴 밤이었다.

일생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그 밤 동안 남궁세가의 검수들은 언제 수적들이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공포에 내도록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섬을 빠져나가려는 시도는 할 수도 없었다. 검은 어둠이 내린 강이 얼마나 위험한지 이미 뼈저리게 경험하지 않았던가.

결국 남궁세가의 검수들은 뜬눈으로 밤을 꼬박 지새워야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동이 터 왔을 때, 그들은 짙은 어둠보다 더 깊은 절망을 직면해야 했다.

남궁명이 신음하듯 말했다.

“……수로채의 전투선입니다.”

“으음.”

남궁황이 눈살을 찌푸렸다.

동쪽에서 떠오른 해가 강을 비추는 순간, 강 한중간에 뜬 섬을 넓게 포위한 배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커다란 화포로 무장을 하고 있었다.

“……미꾸라지 새끼가.”

남궁황은 이를 뿌드득 갈았다.

한눈에 보아도 장강에 있는 수적선을 있는 대로 끌고 온 듯했다. 포위망 바깥으로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내보내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창궁대주.”

“예, 가주님!”

“돌파는?”

남궁명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렵습니다, 가주님.”

“이유는?”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강변까지의 거리가 너무 멉니다. 무리한다면 아예 건널 수 없을 거리는 아니지만…… 저 수적선에서 쏟아지는 화포와 화살을 막아 내며 강변에 도달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남궁황이 입술을 깨문다.

“내가 단독으로 강을 건너는 것은 어떤가? 창궁대원들은 몰라도 나와 장로들이라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

“……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남궁명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뗐다.

“그렇게 가주님과 장로님들이 포위망을 돌파하여 뭍에 닿는다고 한들…… 달라질 게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곳은 섬이다.

사람을 뭍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서는 배가 필요하다. 남궁황이 물가로 가 배를 구해 다시 섬으로 온다고 해도, 그 홀로 저 많은 배들을 무슨 수로 상대하겠는가?

쏟아지는 포격에 결국은 구해 온 배도 침몰하고 말 것이다.

“그래도 지금보다는 나아지지 않겠느냐?”

“가주님…….”

이내 꽉 깨물린 남궁명이 입술이 희게 질렸다. 내뱉기에 퍽 민망한 말이지만,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가주님과 장로님들께서 이 섬을 빠져나가는 순간, 저들은 가주님을 기다리지 않고 섬으로 공격해 들어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으음.”

이어질 이야기를 듣지 않고도 이해한 남궁황이 침음성을 흘렸다. 남궁명이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섬에 남은 이들은…….”

“몰살당하겠지.”

나직이 중얼거린 남궁황이 눈을 감았다.

문파에 있어서 절대고수란 문파 전체 전력의 절반 이상을 담당한다. 남궁황이 없는 남궁세가는 절대 수로채를 당해 낼 수 없다.

이유야 간단하다.

섬을 넓게 포위한 배들 사이로 검은 선박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흑룡선…….’

저 배엔 흑룡왕이 타고 있을 것이다.

굳이 장로들을 따질 것도 없다. 남궁황 한 명이라도 발을 빼는 순간 흑룡왕은 분명 이곳으로 배를 몰아 상륙을 시도할 것이다. 남궁황이 없는 남궁세가에서 누가 흑룡왕을 상대하겠는가?

달아날 곳 없는 독 같은 섬에서, 흑룡왕은 독 안에 든 쥐 떼 사이로 뛰어든 고양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결국……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로군.”

“가주님…….”

남궁황의 얼굴은 담담했다. 딱히 노한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남궁명과 남궁도위는 똑똑히 보았다. 꽉 쥐어진 그의 주먹에서 핏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만큼 주먹을 움켜쥔 채 노기를 누르고 있는 것이다. 다른 남궁세가의 가솔들에게는 결코 그런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며 말이다.

“흥!”

짧게 코웃음을 친 남궁황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쳐들어올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들이.”

이내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크게 퍼져 나갔다.

“어차피 저 머저리들은 섬으로 접근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대치가 이어질 뿐이다. 쓸데없이 자리를 지켜 힘을 빼지 말고 모두 가서 쉬어 두거라. 전각도 충분하니 쉬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남궁세가의 검수들이 불안한 눈길을 보내오니 남궁황은 다시 딱 잘라 말했다.

“걱정할 것 없다. 이 섬에서 잠시 버티기만 하면 다 해결이 될 터이니!”

“가주님…….”

“창궁대주!”

“예, 가주님!”

“대원들의 조를 짜 교대로 쉬게 해라. 경계는 하되 과히 힘을 뺄 필요는 없다! 배가 섬으로 접근하는 것만 경계하도록 해라.”

“예!”

남궁명이 대원들을 불러들여 빠르게 조를 짰다. 그리고 남는 인력들을 반강제로 전각 안에 밀어 넣었다.

불안에 휩싸인 대원들은 밖이 보이지 않는 전각 안으로 들어가 쉬는 것이 못내 불안한 눈치였지만, 밖을 지키고 있는다 해서 딱히 방도가 없는 것도 사실이라 결국은 남궁명의 지시에 따랐다.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남궁황이 조용히 남궁명과 남궁도위를 따로 호출했다. 다른 가솔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까지 자리를 옮긴 그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얼굴로 두 사람에게 물었다.

“이제부터 어찌해야 한다고 보느냐?”

그도 멍청이는 아니다.

상황이 지독히 나쁘게 흘러가고 있음을 이해 못 할 리가 없었다.

“가주님…….”

남궁명이 굴욕감이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은 도리가 없습니다.”

“……도리가 없다?”

“예, 가주……. 우선은 이 섬을 지켜야 합니다. 어설프게 포위를 풀려고 했다가는 남궁은 그날로 끝장이 날 것입니다.”

“…….”

“가주께서 하신 말씀이 옳습니다. 아무리 수로채라고 한들 남궁이 지키고 있는 섬에 상륙할 엄두는 내지 못할 겁니다.”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럴 필요가 없는 거겠지.”

정곡을 찔린 남궁명이 입을 꾹 다물었다.

범이 덫에 걸렸다 한들, 아직 힘이 남아 있는 범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자살 행위다. 노련한 사냥꾼이라면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범이 힘이 빠지기를 기다릴 것이다.

저항할 힘조차 잃었을 때, 느긋하게 다가와 가죽이 상하지 않게 그 숨통을 끊어 놓겠지.

“좋다. 당장은 그 수밖에 없다고 치자. 그럼, 버티면 상황이 달라진단 말이냐?”

“……구원이 올 것입니다.”

“구원?”

남궁명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우리 남궁이 수로채에 포위당한 것을 저 소림이나 구파가 반길 리가 없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도우러 오기만 한다면, 저 포위를 풀고 이 섬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남궁황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너는 이미 저들의 힘을 겪지 않았더냐?”

“가, 가주님.”

“우리는 저들의 습격에 대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삼 년 전의 수전을 우리가 일방적인 승리로 장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가 저들보다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저 패군이 우리를 흑룡채로 끌어들이기 위함이었음을 아직도 모르느냐?”

“…….”

“그런데 소림이 강 위에서 저들을 상대할 수 있다고? 너는 정말 그리 생각하느냐?”

“가주…….”

화가 나 윽박지르는 목소리가 아니다.

오히려 지독할 정도로 담담하게 상황을 묻는 말이었다.

“그렇다 한들 소림입니다.”

“…….”

“그들의 힘으로 온전히 우리를 구원하기는 어려울지 모르나, 적어도 활로는 열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구나.”

남궁황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어깨가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작아보였다.

“과욕이었는가?”

“……가, 가주.”

“소림의 그늘에서 벗어나 남궁의 이름으로 온전히 서기 위해 시작한 일이거늘, 되레 적에게 사로잡혀 소림의 구원을 기다리는 꼴이 되었구나. 내 자신이 우스워 참을 수가 없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아버님.”

그때 남궁도위가 단호하게 말했다.

“전투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중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전투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

“어떤 굴곡을 겪더라도 마지막에 승리할 수 있다면 결코 패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남궁의 핏줄이 아니었다면, 남궁이 처한 위기가 아니라 지금 아버님의 태도를 비웃었을 겁니다.”

“도위야!”

남궁명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지만, 남궁황은 그 말을 듣고 되레 웃어 버렸다.

“맞는 말이지. 천하의 남궁황이 우는 소리라니.”

껄껄 웃어 댄 남궁황이 이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어느 때고 기회는 있는 법이지. 이 포위를 버텨 낼 수만 있다면, 저들 모두를 이 차가운 강바닥에 처박을 순간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럴 것입니다, 아버님.”

“도위.”

“예, 가주님!”

남궁황이 단호하게 지시를 내렸다.

“가솔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다독여라.”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가주님. 남궁의 검들은 결코 나약하지 않습니다. 이 정도로 마음이 꺾일 거였다면 감히 남궁의 이름을 쓸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남궁황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이 어느새 이토록 성장하여 그의 힘이 되어 주고 있다. 저 한마디 한마디가 오히려 그보다 더 가주 같지 않은가?

“창궁대주.”

“예, 가주님.”

“소가주를 도와주게.”

남궁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그럴 것입니다.”

남궁명과 남궁도위는 깊게 허리를 숙이고 자리를 떠났다. 홀로 강가에 남은 남궁황은 조용히 고개를 돌려 섬을 포위한 배들을 보았다.

‘소림의 구원이 올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된다고?’

남궁황이 입꼬리를 뒤틀었다.

‘명아 놈도 거짓말이 능숙하군.’

아니, 사실 이건 거짓말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 말은 분명 사실이니까.

그저 말하지 않은 것이 있을 뿐이다.

소림이 이 상황을 알고 움직이기 시작할 상황이라면, 저 패군 역시 움직일 터.

만약 패군과 만인방이 저 소림보다 먼저 이 장강에 당도한다면?

‘그때는 여기가 나와 남궁의 무덤이 되겠지.’

그 패군이라면 절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들 테니 말이다.

“하하.”

자조적으로 웃어 버린 그는 저 멀리 보이는 흑룡선을 노려보았다.

“설사 내가 여기서 죽는다 해도, 네놈의 목만은 가지고 갈 것이다. 흑룡왕!”

그가 뿜어낸 기세가 장강의 물결을 타고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 기세는 강 위에서 섬을 바라보고 있던 흑룡왕에게도 똑똑히 전해졌다.

“남궁황.”

흑룡왕의 입가에 득의양양한 미소가 어렸다.

남궁황이 뿜어내는 기세는 과연 위협적이었다. 삼 년 전 그와 손을 섞었을 때보다 더욱.

하지만 그뿐이다. 맹수가 가장 흉폭하게 날뛸 때는 바로 덫에 걸렸을 때다. 저 기세는 거꾸로 남궁황이 현재 처한 상황을 말해 줄 뿐이다.

“련주에게 연락을 보냈느냐?”

“예, 흑룡왕이시여!”

“좋군.”

흑룡왕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그럼 어디…… 저 독 안에 든 쥐를 천천히 요리해 보실까?”

입술 새로 참지 못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피가 마른다는 게 어떤 뜻이지 똑똑히 알게 해 주마, 제왕검.’

이제 곧, 남궁의 피로 이 강이 붉게 물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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