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0화. 있더라고, 미친놈이 하나. (5)
남궁세가가 부두에 정박된 배에 올라타 매화도로 향하자 상인들은 그 광경을 보며 뛸 듯이 기뻐하고 환호성을 질러 댔다.
“남궁세가!”
“빌어먹을 수적 놈들아! 네놈들 세상인 줄 알았겠지!”
흑룡왕의 지시로 수적들은 이곳의 상인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수십 년 동안 수적들에게 시달려 온 앙금이 모두 풀릴 리는 만무했다.
사실 수적들이 당하는 모습이 통쾌했던 것도 있지만, 그들이 흥분하고 들뜬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남궁세가 덕분에 연이은 패배에 대한 공포감이 사라진 것이다.
과거에는 딱히 신경도 쓰지 않았던 사파가 사패련을 조직하더니, 일순 구파를 패배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고 강북으로 밀고 들어오기까지 했다.
이러다가 정말 강북이 저들의 손아귀에 넘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공포. 평생을 저 수적들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이 한 번의 승리로 단숨에 해소된 것이다.
“그럼 그렇지! 구파일방이 참고 있을 리가 없지!”
“예끼! 이 사람아, 구파라니! 남궁세가는 오대세가일세!”
“아! 그게 그거 아닌가!”
매화도로 진격하는 남궁세가의 배를 보는 세인들의 가슴이 부풀었다. 단숨에 사파를 주살하고 그들을 지키는 정파의 모습이야말로 지난 삼 년 동안 그토록 바랐던 모습이었으니까.
남궁세가 역시 치욕스러운 장감참변의 원인을 제공한 문파였지만, 그 악감정은 적어도 이곳에 있는 이들의 가슴속에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저기까지 가도 되는 건가? 그래도 섬인데.”
“멍청한 소리는! 자네가 생각하는 걸 남궁세가가 모르겠는가? 다 생각이 있으니 저러는 거지!”
“그래. 그렇겠지?”
위풍당당하게 나아가는 배를 보며 상인들의 두 눈엔 희망의 빛이 차올랐다.
“전속으로 전진해라!”
갑판에 선 남궁황이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적들이 태세 정비 할 틈을 주지 마라. 놈들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있는 이 틈에 빠르게 적을 무너뜨린다!”
“가주!”
그때 우려 섞인 얼굴로 주변을 살피던 남궁명이 다급하게 말했다.
“적은 수적입니다! 조심스레 나아가도 위험할 수 있습니다! 부디 속도를 늦춰 주십시오!”
남궁황은 못마땅한 얼굴로 남궁명을 흘끗 보았다.
“저 하찮은 수적 놈들을 그렇게까지 경계해야 한단 말인가?”
“하찮다고 경계를 늦추다간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저들을 경계하는 것이 어렵습니까? 아니면 찰나의 실수로 추락할 남궁세가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 어렵습니까?”
순간 노기가 차오른 듯 남궁황이 남궁명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남궁명도 쉬이 물러서지 않았다. 한참 남궁명을 노려보던 남궁황의 고개가 이내 천천히 끄덕여졌다.
“속도를 늦춰라! 배가 피해를 입지 않도록 조심스레 나아간다! 창궁검대는 수면을 경계하고! 일부는 물로 뛰어들어 수적이 배로 접근하는 것을 막아라!”
“예!”
명령을 들은 창궁검대가 크게 복명했다. 그리고 일부가 주저 없이 장강으로 뛰어들었다.
“감사합니다, 가주!”
남궁명이 크게 읍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남궁황이 짧게 혀를 찼다.
“창궁대주!”
“예, 가주님!”
그리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언(苦言)을 멈추지 마라.”
“…….”
“그리고 함부로 고개 숙이지 마라. 창궁대주는 가주에게 직언할 수 있는 위치. 이는 감사할 일이 아니다!”
“그러겠습니다, 가주님!”
남궁명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이렇기에 그는 남궁황을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누구보다 과격한 이인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 해서 폭군이냐 하면 그건 결코 아니었다.
남궁황은 사리에 맞고 이치에 맞는 말이라면 언제든 들을 수 있도록 귀가 열려 있는 사람이다.
모자라는 부분이 있다면 그가 채우고, 남궁도위가 채우면 된다. 그것이 가문이며 가족 아니겠는가?
“가주님.”
그때 남궁도위가 전방을 살피며 말했다.
“섬에 화포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저 매화도……라 불리는 곳은 과거 벽력문이 사용했던 백뢰포로 무장하였다 합니다.”
“백뢰포라.”
남궁황이 코웃음을 쳤다.
“수적들끼리의 전쟁이라면 도움이 되겠지. 하지만 내가 지키는 배에 화포 따위가 닿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는 날카롭게 섬을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경계해야 할 것은 오직 흑룡왕과 흑룡채뿐이다. 그들이 매화도에 없다면 저 수적들 따위는 남궁세가를 막을 수 없다. 아니, 그들이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지!”
남궁황이 원하는 것은 강북을 수복하는 것 따위가 아니다.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매화도를 온전히 손에 넣어 적의 목에 비수를 겨누는 형상을 만드는 것. 매화도가 수적에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가 느꼈던 감정을 저들이 고스란히 돌려받는 것이었다.
‘삼 년의 기한까진 이제 고작 한 달 남짓.’
그 기한이 지난다면 남궁세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강남으로 진출할 것이다. 저 간악한 사패련을 모조리 처단하기 위해서.
“상황은?”
“수적들은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강 아래에서도 딱히 접근하는 이는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흥. 그래도 아주 머저리들은 아닌 모양이로군!”
남궁황이 입꼬리를 뒤틀며 웃었다.
수공?
분명 수적들이 익힌 수공은 물속에서 그 위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그래 봐야 가진 실력의 격차를 완전히 뛰어넘을 수는 없는 법이다.
동일한 실력을 가진 이들 중 수공을 익힌 이와 익히지 않은 이가 물속에서 겨룬다면 그 결과가 빤할 것이다. 하지만 창궁검대와 저 어설픈 수적 놈들의 실력이 같을 수는 없다.
그 사실은 이미 삼 년 전에 증명된 것.
삼 년 전이라는 말을 머릿속에 떠올린 남궁황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창궁대주!”
“예, 가주님!”
“주변을 확실하게 경계해라! 멀리서 수적 놈들이 진을 치고 있다가 우리가 섬에 상륙한 뒤 포위해 올 수도 있다!”
“확인하겠습니다!”
“매화도에 상륙한 후, 일부는 배에 남아 기다린다! 혹시 문제가 생기면 바로 빠져나올 수 있도록!”
“예!”
삼 년 전의 쓰디쓴 상처가 남궁황에게 ‘신중’이라는 단어를 알려 준 셈이다. 하지만 그건 다시 말하자면 장일소가 남궁황에게 입힌 상처가 여전히 그에게 생생한 고통을 주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흑룡왕! 장일소!’
으드드득.
남궁황이 이를 갈아붙였다.
시시때때로 뼈를 긁어 대는 이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저 흑룡왕의 목을 베고, 장일소를 갈아 마시지 않는 이상은 풀리지 않을 것이다.
“단숨에 부순다!”
“예!”
이윽고 배가 매화도를 지척에 둔 순간.
“쏴라아아아아!”
콰아아아아아앙!
그들이 탄 배를 향해 백뢰포가 불을 뿜었다. 일반적인 화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위력을 가진 포탄이 배를 단숨에 부숴 버리겠다는 듯 날아들었다.
“잔재주를 부리는구나!”
단숨에 선수로 뛰어오른 남궁황이 빛살처럼 검을 휘둘렀다. 뿜어져 나간 백색의 검강이 날아드는 포탄을 쳐서 그 방향을 뒤틀었다.
퍼어어어어엉!
포탄이 떨어진 수면 위로 거대한 물기둥이 치솟았다. 퍼져 나가는 새하얀 포말이 흡사 폭죽 같았다.
“두려워할 것 없다! 나아가라!”
“충!”
그 광경에 사기충천한 창궁검대가 함성을 내질렀다.
콰아아아앙! 콰아아아앙!
백뢰포가 연이어 불을 뿜어 대었지만, 포탄은 남궁황의 검을 피하지 못했다. 날아드는 포탄을 모조리 날린 남궁황의 눈가가 일순 일그러졌다.
“오오오오오!”
이내 그의 검이 검강을 발출했다.
크게 요동치는 수면을 가르며 나아간 검강은 매화도의 강변에 설치된 백뢰포의 포대에 그대로 틀어박혔다.
콰아아아아앙!
백뢰포는 물론, 포를 쏘기 위해 몰려 있던 수적들까지 일시에 피떡이 되어 나가떨어졌다.
“창궁검대! 상륙한다!”
“가주님! 아직 거리가 있습니다!”
“승기를 잡았을 때 몰아붙여야 한다! 만일을 대비해 창궁대주는 배에 남아 퇴로를 확보해라!”
“예!”
“도위!”
“예!”
“창궁검대를 이끌고 내 뒤를 따라라! 단숨에 몰아친다!”
“예!”
남궁황이 선수를 박차고 물을 향해 뛰어들었다.
파아아앗!
그리고 발이 닿기 무섭게 수면을 박차며 앞으로 나아갔다.
등평도수(登萍渡水).
거대한 체구와 패도적인 검이 무색하도록 날래고 뛰어난 경공이었다. 그가 박차고 달리는 게 수면이 아니라 단단한 지면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물 위를 박차고 달려오는 남궁황의 모습에 수적들은 사색이 되어 우왕좌왕했다.
단 한 명의 절대고수가 전장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 주는 광경이었다.
이윽고!
콰아아아아앙!
수면을 재차 박차고 뛰어오른 남궁황은 포탄이 떨어지는 것처럼 매화도의 땅에 내려섰다. 수적들은 달아나지도 못하고 얼어붙은 채로 눈앞의 절대고수를 망연자실 바라보았다.
“아……. 아아…….”
남궁황은 검을 늘어뜨린 모양으로 오연히 수적들을 응시했다. 눈에 금방이라도 찢어 죽일 듯한 살기가 어려 있었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쩌면 수적들에게 대비할 틈을 주는 짓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남궁황의 행위는 분명 확실한 효과를 발휘했다.
수적들이 기가 질린 채 저항할 의지를 잃어 가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단언컨대.”
남궁황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매화도에 퍼져 나갔다.
“이 시간 이후로 이 섬에 발을 디디고 버티는 놈들은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기껏해야 명령을 듣는 게 전부인 네놈들에게 베푸는 마지막 자비다. 당장 이 섬에서 꺼져라!”
촤아아악.
그 순간 남궁황을 따라 배에서 뛰어내렸던 창궁검대가 남궁도위를 위시로 하여 매화도에 발을 디뎠다. 파도가 치는 강변을 가르며 남궁황의 뒤에 정렬한 창궁검대의 모습은 위용이 넘쳤다.
“남궁도위!”
“예, 가주님!”
“경고는 끝났다! 적을 주살해라! 이 섬 위에 남궁의 이름을 쓰는 이들 외에는 아무도 남기지 마라!”
“충!”
단악검 남궁도위가 선두에 서서 쇄도했다. 일제히 검을 뽑아 든 창궁검대가 그 뒤를 뒤따르는 순간, 마지막까지 가까스로 유지되던 수적들의 이성이 끊어졌다.
“으, 으아아아아악!”
“이건 개죽음이야!”
“무, 물로 뛰어들어!”
그들은 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등을 보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멈춰라! 이 개 같은 놈들아! 당장 멈추지 못하겠느냐! 어디 수로채의 호걸들이 적을 앞에 두고 등을 보이느냐! 이 자라만도 못한 놈들! 당장 멈춰!”
구유노괴 여달이 분기탱천하여 목에 피가 맺히도록 소리쳤지만, 그의 목소리는 수적들의 귀에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장강수로채의 호법이라고는 하나, 그는 결국 저 제왕검 남궁황에 비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그를 믿고 남궁황에 대항하고자 하는 수적이 있을 리 없다.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선택할 수 없는 길이다.
“이……. 이이…….”
여달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떨렸다.
이곳마저 빼앗긴다면 흑룡왕은 반드시 그를 찢어 죽이려 들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버틴다면 흑룡왕이 아니라 남궁황의 손에 찢겨 죽을 것이 분명하다.
빠른 죽음과 조금 더 느린 죽음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가 쉬이 움직이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남궁황! 남궁화아아아앙!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줄 아는 것이냐!”
그 어떤 것도 선택하지 못한 여달이 그 분노를 남궁황에게 토해 냈다.
“흑룡왕께서 노하실 것이다! 그분이 크게 진노하실 것이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줄 알고는 있느냐! 네놈의 짓거리가 이 장강을 피로 물들일…….”
그 순간 남궁황이 먼 거리를 단숨에 격하고 날아와 여달의 머리 위로 검을 내리쳤다.
콰아아아앙!
여달이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평소의 그라면 아무리 상대가 남궁황이라 해도 이렇게 일격에 나동그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전의가 꺾인 그는 제대로 된 대항은커녕 방어조차 하지 못했다.
“흑룡왕의 분노?”
남궁황이 꿈틀거리고 있는 여달을 향해 이를 갈며 다가갔다.
“그 전에 나의 분노를 감당할 생각을 했어야지! 나는 삼 년 전부터 지금까지 쭈욱 분노하고 있거늘.”
“크흐……. 머저리 놈이…….”
여달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패군께서 반드시 네 목을 취하실 것이다. 너는 해서는 안 될 짓을…….”
서걱!
결국 여달의 머리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한번 계속 지껄여 봐라. 지껄일 수 있다면 말이다.”
여달의 목을 단숨에 베어 낸 남궁황은 미련도 없이 고개를 들어 매화도를 둘러보았다.
“흥!”
흑룡왕의 분노? 그건 오히려 그가 바라던 바다.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다. 사파 놈들 따위는 이제 남궁세가의 이름만으로도 벌벌 떨게 될 것이다!”
그날, 창천남궁세가가 수로채를 몰아내고 매화도를 완전히 점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