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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919화 (920/1,567)

919화. 있더라고, 미친놈이 하나. (4)

고오오오오오!

검 끝에서 백색 기운이 소용돌이쳤다. 그렇게 한껏 압축된 기운은 단번에 분출되며 전방을 휩쓸어 버렸다.

콰아아아아앙!

일격으로 앞쪽에서 달려들던 수적들을 한꺼번에 쓸어 버린 남궁황이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흑룡왕!”

사자가 포효하는 듯한 목소리.

그 목소리는 단번에 적의 전의를 꺾어 놓았고, 아군의 사기를 끌어 올렸다.

“어디 있느냐, 흑룡왕! 겁을 집어먹고 도망이라도 친 것이냐! 당장 이리 나와라! 못다 한 승부를 내겠다!”

콰아앙!

남궁황이 내밟은 진각이 사위를 뒤흔들었다.

‘저 괴물 놈이!’

그 무시무시한 기세에 장강수로십찰채의 호법인 구유노괴(九幽老怪) 여달(餘獺)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남궁세가가 검을 쓰는 문파답지 않게 패도를 추구하는 것은 유명하지만, 저 남궁황의 검은 그런 남궁세가에서도 특별하다 못해 괴이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마치 검으로 화포를 쏘아 내는 것 같지 않은가.

‘팽가의 도가 차라리 더 부드럽겠다!’

이미 한번 눈으로 본 적 있는 검이지만, 그때와는 또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그 이유가 지난 삼 년간 남궁황의 무위가 비약적으로 높아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이 흑룡왕이 아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여달이 그걸 알 만큼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탓이다.

“흑룡와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앙!

“비, 빌어먹을!”

산산조각 나서 날아가는 전각을 보며 결국 여달은 다급하게 외쳤다.

“후퇴해라! 당장 후퇴해!”

“호, 호법님! 흑룡왕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을 사수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머저리 같은 놈들아! 어차피 막아 봐야 못 지키잖느냐! 그리고 남궁황은 누가 상대하느냐? 지금 이곳에 흑룡왕께서 안 계시는데!”

“그, 그건……!”

“닥치고 당장 후퇴하라고 해! 애들 다 죽기 전에!”

이곳에 수로채의 전력이 모여 있었다면 여달도 물러난다는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궁세가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수로채 역시 신주오패 중 한자리를 차지하던 곳 아닌가.

고수들끼리의 소수 격전이라면 남궁세가를 당해 내기 어려울 테지만, 전면전이라면 오히려 수로채가 남궁세가를 압도할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은 병력이 부족하다.

흑룡왕은 매화도를 오가는 물류량을 늘리기 위해 장강의 상선들을 보이는 족족 공격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장강 위에는 평소의 배가 넘는 수적선이 오가고 있다는 의미다.

당연히 이곳을 지키는 수적의 수가 적을 수밖에 없다.

“물러나라! 당장 물러나! 배에 올라라! 섬으로 후퇴한다!”

여달은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개 같은 남궁세가 놈들!”

아마 부두를 내어 주고 매화도로 후퇴한다면 흑룡왕은 그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명령을 수행하지 못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니까.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낫지.’

먼 곳에 있는 흑룡왕의 분노보다, 당장 눈앞에 있는 남궁황의 검이 더 무서웠다.

콰아아아아앙!

이 순간에도 남궁황이 휘두른 검에 또 수적 여럿이 피떡이 되어 날아가고 있다.

“후퇴해라! 어서어어어어!”

그의 명령에 수적들은 사색이 되어 뒤로 돌아 달렸다.

아니, 사실 그가 명령을 내리기 전부터 하나같이 어떻게든 달아날 생각밖에는 하지 않고 있었다.

남궁황의 무위는 실로 압도적이었다. 애초에 이곳에 모인 어중이떠중이들이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어떻게 저 무능한 정파 놈들이 저렇게 빨리 움직일 수가 있었지?’

흑룡왕이 이곳에 병력이 충분치 않을 걸 알면서도 자리를 비우기로 결정한 이유는, 입으로만 한참을 떠들어야 간신히 움직이는 정파 놈들이 제대로 대응해 오려면 열흘은 족히 더 걸릴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설마 이런 시기에 이토록 갑작스레 남궁세가가 들이닥칠 것이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호법님!”

“안다!”

여달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더는 꾸물거릴 수도 없었다. 더 지체하다가는 당장 그의 목이 날아갈 판이다.

“배를 띄워라! 당장 승선…….”

하지만 명령을 내리던 여달의 눈이 순간 크게 뒤흔들렸다.

커다란 전각들 사이로 난 대로, 그러니까 남궁황과는 다른 길을 통해 백색의 무사들이 밀려오고 있었다. 창궁검대였다.

그리고 그 선두에서 섬전같이 검을 휘두르는 젊은 무인이 보였다. 한눈에 보아도 상대할 수 있을 만한 기세가 아니었다.

“배, 배를 버려라! 빌어먹을, 배를 두고 간다! 그냥 뛰어들어! 섬으로 헤엄쳐라!”

느긋하게 배를 띄울 시간 따윈 없었다. 눈치 좋게 미리 배를 띄웠던 이들은 어찌어찌 승선할 수 있었지만, 부두에 정박해 있던 배 중에 물가를 향해 나아간 것은 겨우 두 척뿐이었다.

배에 오를 시간이 없다는 것을 직감한 수적들은 앞다투어 장강에 뛰어들었다.

“비, 비켜!”

“잡지 마, 이 새끼야! 나오라고!”

“이 개자식들아!”

아비규환.

무인이든 군인이든 마찬가지다. 머릿속에 명령이 남아 있고, 스스로 지켜야 할 것이 있을 때는 제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그 통제가 사라진 순간 남는 것은, 살아남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몇백의 겁쟁이뿐이다.

수적들은 제 동료를 잡아당기고 밀치며 장강으로 뛰어들었다. 서로 먼저 앞서 나가려다 뒤얽혀 넘어지고, 반사적으로 제 옆으로 병장기를 휘둘러 대는 이도 수두룩했다.

“아아아악!”

“이, 이 개자식이 나를 찔러?”

차라리 질서정연하게 물러섰다면 이미 탈출하고도 남았을 이들이, 조금이라도 먼저 가려다 상황을 더욱 지체시켰다. 그리고 남궁세가의 검은 그런 이들의 등을 냉정하게 꿰뚫었다.

“아아아아악!”

“달아나라고! 남궁세가가 온다!”

첨벙! 첨벙!

물로 뛰어든 수적들은 능숙하게 자맥질하며 매화도로 나아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 빠른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미처 물로 뛰어들기 전에 남궁세가의 검을 맞아야 했던 수적들을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서 맥없이 쓰러졌다.

이윽고.

“흥!”

남궁황의 발이 물가에 닿았을 때, 수적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물로 뛰어들어 쏜살같이 달아나는 수적과 물에 닿지 못한 시신으로.

남궁황의 눈이 노기로 들끓었다.

“이런 어중이떠중이들에게!”

압승.

일방적이라는 말로도 표현이 불가능한 압승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은 남궁황에게 조금의 기쁨도 주지 못했다. 이런 어설프기 짝이 없는 놈들이 두려워 화의를 맺었던 자신에 대한 혐오감만 증폭될 뿐이었다.

“이……!”

남궁황의 눈이 뱃머리를 돌리고 있는 배 두 척으로 향한다.

“비켜라!”

옆을 지키던 창궁검대를 뒤로 물린 남궁황은 검을 머리 위로 힘차게 들어 올렸다.

고오오오오오오오!

그의 검에 다시 한번 짙은 백색 기운이 휘돌았다.

머리 위로 일 장 남짓이나 치솟은 검기가 검을 중심으로 뭉쳐 들었다.

“아, 안 돼!”

“뛰어내려! 당자아아아아아앙!”

배 위에서 그 광경을 본 수적들은 사색이 되어 비명을 지르더니 배 밖으로 몸을 날렸다. 저 검에 백색의 기운이 뭉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미 그들은 충분히 본 것이다.

쾅!

강하게 진각을 밟은 남궁황은 이내 검을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발출된 기운이 화포처럼 쏘아져 배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배에 틀어박힌 검강이 배를 이루는 목재를 말 그대로 분쇄한다. 직접적으로 검강에 닿은 목재는 가루가 되어 비산했고, 검강에 닿지 않는 부분조차 그 여력을 감당하지 못해 산산조각 났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순식간에 배 하나가 통째로 폭발하며 장강의 수면으로 흩뿌려졌다. 그 가공할 광경에 수적들은 물론이고 창궁검대마저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남궁황의 시선이 아직 남아 있는 배로 향한다. 하지만 눈치 빠른 수적들은 이미 필사적으로 배를 탈출해 장강으로 뛰어든 뒤였다.

“쳇!”

저 배는 부숴 봐야 의미가 없다 판단한 남궁황은 검을 회수했다.

드넓은 장강을 빽빽하게 채우며 필사적으로 헤엄쳐 매화도로 향하는 수적들의 모습이 징글징글했다.

“……빌어먹을. 흑룡왕 놈!”

이쯤 되면 남궁황도 알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흑룡왕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흑룡왕은 교활한 놈이지만, 싸움을 피하는 놈은 아니다. 그가 여기에 있었다면 벌써 그의 앞을 가로막아 왔을 것이다.

“가주님. 완승입니다!”

“……완승?”

남궁황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지시에 따라 전각 안으로 피해 있던 상인들이 어느새 몰려와 뒤에서 만세를 부르짖고 있었다. 감히 강북 땅을 밟았던 수적들은 모조리 죽이거나 쫓아냈다는 의미다.

“흥!”

하지만 남궁황은 이 정도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뭐가 완승이냐!”

“예?”

“당연히 가져야 할 곳을 다시 얻어 내는 것이 언제부터 승리였다는 말이냐! 승리란 남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었을 때나 붙일 수 있는 말이다! 내 집에 든 도적을 물리쳤다고 해서 승리라는 말을 쓰지는 않는다는 소리다!”

남궁명이 그 말에 고개를 숙였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처리할 수 있는 수적 놈들 따위가 무서워서 삼 년이나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니…….”

남궁황이 이를 갈아붙이며 두 눈에 불을 켰다.

이따위 승리로 그들의 지난 시간을 보상받을 수는 없다. 이곳에는 흑룡왕도, 수로채의 정예인 흑룡채도 없었다. 이런 어중이떠중이들 따위, 천 명을 죽인다고 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배를 준비해라!”

“가, 가주님?”

“저기!”

남궁황의 턱이 장강 중앙에 있는 섬으로 향한다.

“저곳은 강북이냐? 강남이냐?”

“……그, 그건.”

남궁명이 차마 대답하지 못하자, 곁에 서 있던 남궁도위가 대신 입을 열었다.

“저곳은 강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남도 아닙니다. 말 그대로 섬이니까요.”

“그래!”

남궁황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소리친다.

“아무리 실수로 맺어진 조약이었다고 한들, 조약은 조약. 기한이 지나기 전에 남궁은 강남땅을 밟지 않는다. 남궁이 스스로 내뱉은 말을 반드시 지킨다는 의미다!”

“예, 가주님.”

“하지만 저곳은 강남이 아니지!”

남궁황의 두 눈이 불꽃을 내뿜었다.

“배를 준비해라. 더러운 수적 놈들이 감히 저곳에 진을 치고 강북을 노리는 꼴을 더는 지켜볼 수 없다. 내 직접 섬에 상륙해 저 수적 놈들을 모조리 찢어 죽여 버릴 것이다!”

“가, 가주님.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재고해 주십시오.”

남궁명이 다급하게 말했다.

“보시다시피 저곳은 섬입니다. 저곳에 접근하려면 물길을 통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말하자면 저 섬에 들어갈 경우 고립될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아군의 지원은 어렵고, 수적의 공격은 쉬운 위치입니다.”

“누가 그걸 모른다더냐?”

“예?”

남궁황이 들끓는 눈으로 남궁명을 돌아보았다.

“화산은 무려 삼 년 동안이나 저 땅을 지켜 냈다. 조약에 들지 않아 언제든 공격이 가능한 저 섬을!”

“그, 그건…….”

“설마 화산이 할 수 있었던 일을……. 아니, 화산도 아닌 녹림이 해낸 일을 우리 남궁세가는 할 수 없단 말을 할 셈이냐?”

“저, 절대 그런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 준비해라.”

“가, 가주님. 제 말을 한 번만…….”

남궁명이 재차 만류하니 남궁황은 못마땅한 얼굴로 짧게 혀를 찼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 지금 이성을 잃어 앞뒤를 모르고 들이받는 것도 아니다.”

“…….”

“모르겠느냐? 지금 저곳에는 흑룡왕이 없다. 그리고 흑룡채도 없지. 무주공산이라는 의미다. 지금이 아니면 저 섬을 공략하기가 열 배는 더 어려워진다.”

“그렇긴 합니다만…….”

“기회가 왔을 때 움직이지 못한다면 이후에 몇 배의 힘을 들여야 하는 법이다. 지금은 움직여야 할 때다!”

남궁명이 입술을 깨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황의 말도 그리 틀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가주님!”

“배를 띄워라! 저 섬을 손에 넣겠다!”

“예!”

남궁황의 맹렬한 두 눈이 매화도로 향했다.

‘흑룡왕. 그 목줄을 틀어잡아 주겠다. 바로 나, 남궁황이!’

그의 만면에 의기양양한 웃음이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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