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914화 (911/1,567)

914화. 아귀다툼이 따로 없구나. (4)

“뭐가…….”

“…….”

“왔다고요?”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꺾인다.

그 모습에 현종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저놈의 모가지가 저리 꺾일 때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이제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크흠. 그러니까…….”

“네.”

“소림에서 연통이 왔구나.”

“아아, 소림.”

“그, 그래. 소림.”

“그 소림이 제가 알고 있는 소림이 맞나요? 저기 숭산 어쩌고 하는 산에 반들거리는 대머리들 처붙어 우글우글 모여 사는 거기?”

현종의 시선이 다급하게 방 안을 훑었다.

혹 이곳에 또 하나의 반들거리는 대머리(?)가 있을까 해서였지만, 다행스럽게도 이곳에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풍성한 머리털을 자랑 하고…….

풍…성…….

“왜 그러십니까?”

현종의 시선이 현영에게 한동안 멈춰 있으니 현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예?”

“아, 아니다.”

차마 내뱉을 수 없는 말을 삼키며 현종은 슬쩍 시선을 피했다. 눈가가 촉촉해졌다.

저 가여운 녀석이 평생 고생만 하다가…….

“크흐흠.”

크게 헛기침한 현종은 다시 청명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그래. 그 소림이 맞다.”

“네에에?”

청명이 짐짓 놀랍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 소림이 우리한테 연통을 보낸다고요? 세상에! 이제 우리가 나눌 거라고는 따뜻한 주먹질과 시원한 칼질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연통이라니! 대화로써 문제를 해결코자 하는 문명인의 자세가 우리와 그 새끼들 사이에…….”

“아, 아니. 청명아. 아무리 그래도 서찰 한 장 못 보낼 사이는 아니지 않…….”

“예에에에에?”

청명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아니, 장문인! 서찰이라니요?”

“그 서찰…….”

“서찰이라는 건 글로 써진 거잖습니까?”

“응? 으응. 그렇지. 그런데 그게 왜…….”

“글로 써진 걸 보낸다는 건 말을 알아듣는다는 소리잖아요. 소림 대머리 새끼들이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는데, 그 새끼들이 무슨 수로 서찰을 보냅니까?”

“…….”

“말을 알아들어 처먹었으면, 지금까지 그 지랄을 하지도 않았겠지! 머리카락도 없는 놈들이 글씨를 읽을 수 있을 리가 있나! 똑같이 까만 건데!”

청명이 법정이 들었으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을 막말을 속사포처럼 쏟았다.

그 와중에 현종은 그나마 이곳에 외인이 없다는 것을 아주 다행스레 여기는 중이었다.

“……그래. 신기하게도 서찰을 보내왔구나. 그러니까, 일단 내용을 좀 논의해 봤으면 하는데.”

“굳이요?”

“……제발 좀.”

현종이 간절한 얼굴로 말하자 청명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들어는 보죠.”

“그래. 그래. 잘 생각…….”

“개 짖는 소리도 들어 주는 판에 중 짖는 소리 하나 못 들어 주겠어요?”

“…….”

청명과 대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용건을 빠르게 말하는 거라는 사실을 새삼 되새기며 현종이 얼른 입을 열었다.

“소림 방장 법정의 이름으로 온 연통이다. 화산이 아니라 천우맹에 보내는 서찰이구나.”

“내용은요?”

“으음.”

현종은 살짝 고민하는 낯으로 내용을 말했다.

“강남 사패련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이에 대한 논의를 하려 하니, 천우맹주께서도 참석을 부탁드린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네 이름도 따로 언급이 되어 있다. 시간을 내어 소림으로 오라는구나.”

말을 끝낸 현종이 재빨리 청명의 눈치를 살폈다. 보나마나 거품을 물고 발작할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괴이하게도 청명은 딱히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팔짱을 낀 채 느긋하게 고개만 주억거리고 있었다.

살짝 의아해진 현종이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으냐?”

“네? 뭐가요?”

“아니. 그…….”

그걸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뭐, 좋은 생각 같아요.”

“조, 좋은 생각?”

“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장문인이랑 저더러 소림으로 오라고 하는 거잖아요?”

“그, 그렇지.”

“그러니 당연히 좋은 생각이죠.”

청명이 환하게 웃었다.

티 한 점 없는 그 밝은 미소를 본 현종이 겨우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였다.

“그리 생각한다니 다행…….”

“대가리 깨지고 싶다고 오라는데, 안 갈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이 개 같은 대머리 새끼! 오냐, 내가 지금 간다!”

“어딜 가려고 이 새끼야!”

청명이 몸을 날리려 하자 대기하고 있던 오검들이 빛살처럼 날아들어 사지를 붙들고 늘어졌다. 완벽한 합격술을 연상시키는 그 빠른 대처에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놔? 안 놔? 확 마!”

“어, 어딜 가려고, 인마!”

“어딜 가긴 어딜 가! 소림으로 가야지!”

“소림은 왜!”

“오라잖아! 대왕 대머리가 나보고 오라잖아! 오라 그래서 간다는데 뭐가 문제야!”

청명이 눈을 까뒤집었다.

“이 새끼가 삼 년 동안 얌전히 있어 줬더니 감을 잃었나! 오냐, 좋다! 내가 왜 삼 년 동안 수련을 했는지 보여 주지! 반질반질한 대가리에 매화문신 새겨 주면 그 새끼도 성불하겠지!”

“소, 소림이라고!”

“그러니까 하는 말 아니야! 내가 왜 삼 년 동안 수련을 했는데!”

어? 사파 때문 아니었니?

현종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고 한숨을 쉬니 현영이 넌지시 말을 붙였다.

“장문인.”

“……왜 그러느냐?”

“생각을 좀 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생각?”

“예, 장문인. 장문인께서는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으음.”

현종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아무리 소림과 우리가 예전 같은 사이는 아니라고 하나, 사패련과 관련된 문제로 친히 서찰까지 보냈으니, 한번 가 보는 게 예의 아니겠느냐?”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현영의 말에 현종은 조금 의외라는 듯 설명해 보란 눈빛을 보냈다.

“이번 사파의 발호 때도 보았듯이 소림은 우릴 그리 기껍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

“그런데도 굳이 우리를 초청한다는 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구파의 수장인 소림이 천우맹을 경원한다는 것은 이제는 대부분 눈치채고 있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것일 뿐.

그때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툭 엎어지듯 들렸다.

“꿍꿍이는 뭔 꿍꿍이예요? 그냥 발등에 불 떨어진 거지.”

“응? 발등에 불이라니.”

현영이 청명을 돌아보았다. 청명은 사지에 매달린 사형제들을 털어내며 못마땅한 듯 입술을 씰룩거렸다.

“구파 새끼들이나 오대세가 새끼들이 제대로 부름에 응했으면 소림이 우리한테까지 눈을 돌렸겠어요? 그 새끼들이 말을 안 들어 처먹으니까 우리한테까지 서찰을 보낸 거지.”

“…….”

“보나마나 지금 불상 붙들고 눈물이나 질질 짜고 있겠죠. 낄낄낄낄!”

“청명아. 타인의 불행에 기뻐하면 도를 깨우치지 못하는…….”

“이야, 그럼 저 소림 새끼들은 모조리 지옥에 떨어지겠네! 지옥 가면 부처님이 ‘오냐, 이 새끼들아! 내가 특별히 여기까지 내려와 기다리고 있었다!’ 하면서 불경으로 냅다 후려쳐 버리지 않을까요?”

“…….”

말을 말아야지.

끝을 알 수 없는, 새삼 암담한 제자의 인성에 현종은 말을 잃었다. 그때 백천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청명아.”

“응?”

“네 말이 맞다면, 네가 원하는 대로 된 것 아니냐?”

“그렇긴 하지.”

“그런데 왜 이렇게 화가 났느냐?”

“아니!”

조금 차분히 돌아왔던 청명의 눈이 다시 희번덕거렸다.

“건방진 중 새끼가 우리 장문인보고 오라 가라 하잖아!”

“…….”

“아직도 지가 되게 잘 먹히는 줄 아나? 맨발로 뛰어와 넙죽 엎드려 빌어도 한 번 가 줄까 말깐데, 뭐? 참석을 부탁드려? 확 그냥!”

“…….”

백천이 할 말을 잃은 와중에 누군가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매?’

아니, 너는 왜 그걸 또…….

그 와중에도 장문인의 본분을 잊지 않은 현종이 혼란한 상황을 진정시켰다.

“제발 좀 입 좀 다물거라, 다들…….”

“예, 장문인.”

“그리 말씀하시면 억울합니다, 장문인. 입 연 건 한 놈밖에 없는 데 왜 저희한테……. 아악!”

괜히 끼어들었다가 윤종에게 얻어맞고 구석에 처박힌 조걸이 비 맞은 강아지 같은 눈으로 억울함을 표했지만, 누구 하나 그를 돌아봐 주지 않았다.

“……천우맹에 보내온 서찰이니 답신을 보내긴 해야 할 것이다. 어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씹죠.”

“그냥 태우죠.”

“어허. 다들 왜 그러십니까. 정중하게 거절합시다.”

“지들이 오라고 하면 안 될까요?”

결국 현종의 눈에 맑은 이슬이 맺혔다.

이 새끼들은 이제 글러 먹었다. 어디 내놔도 재활용도 안 되는 것들이다.

“장문인.”

그 와중에 백천이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백천에게는 한 가닥 기대가 남아 있는 현종이 반색했다.

“그래, 백천아. 말해 보거라.”

“소림의 청이 온 것은 사실이나, 굳이 저희가 그 청을 들어주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 그리 생각하느냐?”

“예. 장문인. 냉정하게 따져 보면 지금껏 소림은 항상 저희의 요청을 무시하거나, 조건을 달아 왔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굳이 그들의 말대로 해야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틀리지 않은 말에 현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눈에 어린 수심은 걷어 내지 못하였다.

“하지만 걱정이구나.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곧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는데…….”

“전쟁은 그렇게 쉽게 안 나요.”

이 말을 던진 건 청명이었다.

“그렇게 으르렁거리고 싸워 대도 전쟁은 쉽게 못 벌여요. 특히나 잃을 게 있는 것들은요. 소림이든 뭐든, 저것들은 다들 피해 입기를 원치 않는 것들이거든요.”

“…….”

“구파나 오대세가가 소림의 말을 듣지 않는 이유 중 하나에는 그런 것도 있을 거예요.”

“괜히 모였다가 정말 전쟁이 벌어질까 봐 그런다는 말이냐?”

“예.”

조걸이 의아한 얼굴로 손을 들고 물었다.

“아니, 그런데 참는다고 전쟁이 터지지 않는 것도 아니잖아. 장일소가 계속 강남에서 만족하고 있지는 않을 텐데?”

“아직 장일소는 안 움직였잖아. 사람이라는 건 어쩔 수 없이 닥칠 일이라고 해도 조금이라도 더 뒤로 미루고 싶어 하는 법이거든.”

“으음.”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조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나도 술 훔쳐 먹고는 어차피 들킬 걸 알면서도 하루라도 더 숨기고 싶어 하……. 아아악! 왜 때립니까!”

“술 훔쳐 먹었다며!”

“전에요! 예전에! 이번에 말고! 그때 건 이미 맞았는데!”

“그럼 또 맞아라!”

조걸의 멱살을 잡고 탈탈 털어 대기 시작한 윤종을 깨끗하게 무시하며 백천이 말했다.

“그럼 이번에 우리가 소림의 청을 듣지 않는다고 해도 한동안은 별일이 없을 거란 이야기지?”

“그래.”

“그렇지만 장문인께서 하시는 걱정 역시 일리가 있다, 청명아. 소림이 저리 적극적으로 나서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기도 하고.”

“사숙.”

“응?”

“화산이 구파일방에 있었으면 소림이 시키는 대로 나가서 싸움박질했을 것 같아?”

“그건…….”

백천은 살짝 미묘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과거였다면 그렇다 대답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사람이란 게 다 똑같아. 소림이 구파일방의 수장 소리를 듣는 것도 위기 때의 이야기지. 평소에는 어떻게든 다들 소림을 한 번이라도 이겨 먹으려고 별 수작을 다하는 게 기본 아냐?”

“……그렇지.”

“그렇게 평소에도 감정이 쌓여 있는 것들이 지금처럼 애매한 상황에 일사불란하게 소림의 말을 들어준다? 낄낄. 말도 안 되지. 아마 지금 법정 그 땡중, 사리가 백 개는 더 생겼을걸.”

말을 마친 청명은 문득 떠오르는 과거에 쓰게 웃었다.

‘그 미친 새끼들.’

마교가 코앞으로 쳐들어왔는데도 네가 나가니, 내가 물러서니 했었지. 아주 주둥아리만 살아서는. 그 새끼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만 했어도 희생이 반으로 줄었을 것이다.

목숨과 이득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것이 걸렸을 때, 사람이 얼마나 치졸해질 수 있는지를 알아 버린 청명에게는 앞으로 벌어질 일이 훤히 보였다.

“그럼 장강은?”

“아마 적당히 내어 주고 물러날 거야.”

“……그렇게 하면 구파오방과 오대세가의 명예가 정말 땅에 떨어질 텐데도?”

“생각처럼 명예 때문에 목숨을 거는 사람은 잘 없어. 명예야 회복하면 그만이지만, 목숨은 잃으면 끝이니까. 아마 아무리 내어 줘도 마지막에 사패련을 무너뜨리기만 한다면 다 회복할 수 있을 거라 변명하겠지.”

“으으음.”

“그래서 전쟁이라는 건 회의를 통해서는 답이 안 나오는 거예요. 보통은 미친놈 하나가…….”

주절주절 말하던 청명이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눈을 점점 크게 뜨고 당황한 듯 벙긋거렸다.

“왜, 왜 그러느냐?”

당황한 백천이 물으니 청명이 멍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사숙.”

“응? 왜?”

“……전쟁 터질 수도 있겠는데?”

“뭐?”

청명은 고개를 옆으로 삐딱하게 꺾은 채 중얼거렸다.

“잠깐만 이러면…….”

그동안 잊고 있던 폭탄의 존재를 떠올린 그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진짜 소림에 불날 수도 있겠는데?”

“그게 뭔 소리냐고, 인마!”

“화, 확인부터 해 봐야겠어! 거지 아저씨 어디 있지? 거지 아저씨!”

청명이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문을 박차고 나가 버리자 남은 이들은 그저 그가 나간 곳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난들 알겠어…….”

“배고프다.”

모두의 입에서 일제히 한숨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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