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1화. 잘 돌아왔네, 화산검협. (1)
세상이 숨 막힐 정도의 고요로 물들었다.
백이 넘는 인원이 모여 있음에도 작은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호흡조차 잊어버린 이들의 시선은 한곳에 고정되어 있다.
괴이하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이상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겨우 한 뼘보다 조금 더 긴 비도가…… 말 그대로 허공에 떠올라 있었다. 투명한 실에 묶어 고정해 두기라도 한 듯 둥실 뜬 모습은 흡사 모든 세상의 법칙을 무시한 것 같았다.
이윽고 그 비도가 느릿느릿 날기 시작했다. 굼벵이가 기는 것처럼 지루하기 짝이 없는 속도로.
어찌 보면 우스울 그 광경을 보는 모두의 얼굴엔 웃음기라곤 없었다.
오히려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입을 꾹 닫고 입술을 떨어 대었다. 그 모습이 저 기괴한 비도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이들의 심정 그 자체였다.
“저…….”
백천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비도가 허공을 헤치고 나아가고 있다. 너무 느려서 과연 움직이는 게 맞는지 의심이 될 만한 속도로.
하지만 백천은 느낄 수 있었다. 저 비도가 풍기는 기운은 백천의 내력이 그의 의지를 벗어나 스스로 전신을 휘돌며 몸을 보호할 정도로 강력했다.
알 수 있다.
저 비도가 얼마나 위험한지. 저 비도에 얼마나 많은 것이 어려 있는지.
백천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배어났다.
‘청명은?’
그의 시선이 빠르게 비도에서 떠나 그 끝이 겨누고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어느새 청명의 발도 멈추었다. 세상 모든 것을 베며 전진할 것 같던 청명의 발이 비무를 시작한 뒤 처음으로 양쪽 다 바닥에 붙어 있었다.
허공에 떠올라 사방을 압도하고 있는 비도보다, 그 비도를 발출하느라 창백해진 당군악의 얼굴보다, 입술을 굳게 닫은 채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비도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청명의 얼굴이 백천에게 더 많은 위기감을 가져다주었다.
“아…버님.”
그때,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두 손을 깍지 껴 잡은 채로 눈을 질끈 감은 당소소가 보였다.
당연히 복잡할 것이다. 그녀는 누구의 승리에도 기뻐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백천은 이 승부의 결과를 반드시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이곳에 있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천하에 명성 드높은 독왕 당군악.
그의 이름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가?
백천을 비롯한 후기지수들에게 있어 그 이름은 강호의 질서이자, 현 강호의 힘을 상징하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 무겁고도 무서운 이름을 과연 청명이 뛰어넘을 수 있는가?
‘넘어라!’
백천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청명아!’
애가 타는 마음으로 청명에게 시선을 던졌다. 청명은 여전히 제게로 날아드는 비도를 응시하고 있었다.
우우우우웅!
반격을 아직 허락지 않겠다는 듯, 비도는 천천히 청명을 향해 움직였다.
청명의 전신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이건……?’
마치 스치기만 해도 목숨을 앗아 갈 만큼 치명적인 맹독을 가진 독사가 굴 안에서 바깥의 그를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털끝만큼이라도 움직이는 순간, 독을 머금은 송곳니가 벼락처럼 날아들어 그의 목줄에 틀어박힐 것만 같은 긴장감.
‘암폭비?’
……아니다.
이건 그도 알지 못하는 수다.
적어도 당보가 사용했던 십이비도 중 이런 수는 없었다.
그럼 당보조차 익히지 못한 일 수?
아니, 그럴 리가.
당보는 십이비도의 모든 것은 완벽하게 익힌 이였다. 그렇기에 암존(暗尊)이라 불렸던 게 아닌가.
당보가 십이비도 중 익히지 못한 초식이 있었을 리가 없고, 청명에게 보여 주지 않은 수가 있었을 리 없다.
그렇다면…….
꾸우우욱.
청명의 손이 검의 손잡이를 부러져라 움켜잡았다.
‘확인해 볼 수밖에.’
청명이 움직이니 과연 느릿하게 전진하던 비도의 속도가 조금 빨라졌다.
우우우우웅!
그와 동시에 비도가 울어 젖히기 시작했다.
굼벵이처럼 움직이던 비도가 이제는 달팽이처럼 날아든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속도를 더해 가던 비도가 이제는 눈에 확연히 보일 정도로 빨라졌다.
그리고.
쿠르르르르르릉!
비도에서 거친 검명이 토해지는 순간, 날아들던 비도가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점차 빨라져 눈으로는 쫓을 수 없을 만큼 맹렬히 회전했다.
촤아아아아아악!
사방으로 뻗어 나가던 비도의 기운이 휘돌았다. 그에 따라 발생한 풍압이 바닥을 채운 흙들을 좌우로 밀어 낸다 싶더니 곧 역으로 당기기 시작했다.
흙과 자갈들이 후두둑 소리를 내며 솟구쳐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
비도를 중심으로 거대한 용권풍(龍卷風)이 휘몰아친다. 황톳빛으로 물든 거대한 소용돌이는 바람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승천을 준비하는 거대한 황룡(黃龍) 같았다.
“큭!”
“물러서!”
거리를 둔 채 그 대결을 지켜보던 이들이 자세를 낮췄다. 이 거대한 인력(引力)이 그들마저 빨아들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맹렬하게 회전하며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용권은 아직 그 속도를 높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청명을 위협하듯 휘돌고 또 휘돌고 있을 뿐이다.
청명의 두 눈에서 새파란 빛이 뿜어졌다. 그 어마어마한 기운의 소용돌이를 보면서도 그의 입은 한껏 말려 올라가 있었다. 심지어 이를 드러내고 웃기까지 했다.
마치 이 상황이 너무도 기껍다는 듯이.
‘온다!’
그리고 그때.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급격한 전환이 일어났다.
하루는 지나야 청명에게 닿을 것처럼 느릿하게 움직이던 비도가 가공할 속도로 단숨에 폭발하듯 쏘아진 것이다.
그 순간 청명은 보았다.
주변 시간이 모두 느려진 가운데 홀로 다른 시간의 흐름에 탄 것처럼 맹렬히 회전하는 비도. 그 뒤에 생성된 와류가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모습을 말이다.
심지어는 청명의 육신조차도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비도를 향해 빨려들고 있었다.
그때 청명이 두 눈을 크게 부릅떴다.
숱한 전장을 겪으며 수많은 무학을 그 몸으로 극복해 온 청명으로서도 상상하지 못한 공격이기 때문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가 쳐 내고 무력화시켜 부쉈던 수많은 암기들. 이제는 그 효용을 끝내고 바닥에 널브러진 그것들이 저 와류에 호응하듯 허공으로 떠올라 일제히 비도를 향해 날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뭐……?’
그건 흡사 땅이 솟구쳐 청명을 덮쳐 오는 것과 같은 광경이었다.
만천화우가 하늘로부터 세상을 뒤덮으며 날아든다면, 이 일 수는 땅으로부터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천하의 청명도 대경실색하지 않을 수 없는 공격.
앞으로는 단혼사와 귀왕령을 휘감아 올린 비도가 육체를 찢어발길 듯 날아들고, 뒤로는 지독한 극독이 묻은 암기들이 폭우처럼 휘몰아쳐 온다.
달아날 곳이 없다. 심지어 머리 위조차.
그 절체절명의 순간, 청명의 두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비도도 아니고, 그 뒤에 창백한 얼굴로 서 있는 당군악도 아니었다.
무어라 입을 크게 벌리며 소리치고 있는 백천과 그 무리의 모습이었다.
‘저…….’
그 절망마저 엿보이는 다급한 표정을 보며, 청명은 얼굴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멍청한 놈들 같으니.’
왜 당황한단 말인가.
그가 당할까 봐? 아니면 화산의 검으로 당해 내지 못할까 봐?
청명의 검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려 냈다.
‘똑똑히 봐라.’
누군들 상상하지 않았을까?
누군들 바라지 않았을까?
언젠가, 화산에 터를 잡은 그들의 선조가 검을 든 그 순간부터, 모두가 바란 것은 그 검의 끝을 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선대는 후대에게 자신의 의지를 전한다.
그렇기에 후대는 선대의 가르침을 배우고 지켜 나간다.
학(學)이란 서로 다른 이름을 가졌지만, 같은 뜻을 가진 이들의 합의. 법(法)이란 서로 다른 시대를 살지만 같은 마음을 가진 이들의 의지.
그렇기에 검학이고 그렇기에 검법이다.
‘여기에 있다.’
화산의 검에는 담겨 있다. 선대로부터 지금까지 화산의 이름을 쓴 이들이 바란 모든 것이.
그리고 이제 그 검에, 이곳에 선 이들과 청명의 의지마저 함께할 것이다.
‘피어라.’
청명의 검 끝에서 붉은 매화가 피어났다.
개화(開花). 그것은 잉태를 위한 약동이자 탄생을 위한 고결함이다.
그 뒤에는?
‘뻗어 나가라.’
그들이 그들의 의지를 옳게 세우고 믿으며 관철한다면 온 세상에 퍼져 나갈 것이다. 드넓은 구주천하에 매화향이 만개하도록.
“매화……란구주(梅花亂九州)…….”
피어난 매화가 부드럽게 흔들린다. 불어오는 바람에, 부드럽게 퍼지는 풀 스치는 소리에, 흘러가는 구름에 흩날린다.
단 하나도 같지 않고 서로 다른 매화가.
잎이 부족한 것도 있고, 활짝 피어나지 못한 것도 있으며, 또 어떤 것은 소담스럽다. 만개하여 흐드러진 와중에도 어떤 매화는 색이 옅어 어울리지 못한다.
하지만 더 많은 매화가 피어나니 각기 다른 모든 꽃이 하나의 흐름에 담겨 물결을 이루고 어우러진다.
매화는 불어오는 바람에 저항하지 않고 되레 몸을 실어 천천히 허공에서 유영한다.
때로는 경쾌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밀려오는 바람을 타고, 휘돌다 솟구치고, 가만히 내려앉다가, 또 저 멀리.
청명의 몸을 휘돌며 퍼져 나간 매화잎이 그의 등 뒤로 날아드는 암기들을 막아섰다.
카각!
그러자 맹렬하게 날아들던 암기들이 꽃잎을 사정없이 꿰뚫었다.
하지만 하나의 꽃잎이 채 으스러지기도 전에 새로운 꽃잎이 그 앞을 가로막고, 또 하나의 꽃잎이 이지러질 즈음 또 새로 날아든 꽃잎이 차가운 금속을 감싸 안았다.
카강!
맑은 쇳소리가 음악처럼 퍼져 나갔다.
독을 품은 모래도, 햇살을 반사하며 쏘아져 오던 쇠침들도, 힘 한 점 느껴지지 않는 꽃잎들에 휘감겨 그 기세를 잃어 간다.
하늘의 그물은 넓고 성기어 엉성해 보이지만, 그 무엇도 빠뜨리지 않는다(天網恢恢疏而不失) 했던가?
바람을 타고 날아드는 꽃잎들 역시 그저 흩날리는 것 같아 보였지만, 청명을 향해 날아드는 그 무엇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모두는 보았다.
단번에 청명을 뒤덮고 곤죽을 낼 것 같았던 암기들과 독 모래가 매화에 부딪혀 튕겨 나가는 모습을 말이다.
“……!”
매화는 붙잡고 늘어지는 모든 것을 부드럽게 밀어 내며, 어지러이 흩날려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간다(梅花亂九州).
드넓은 연무장을 넘어, 더 먼 곳으로.
붉게 휘돈 매화잎은 마치 거대한 매화가 잎을 펼쳐 피어나듯 퍼졌다.
콰드득! 콰드드드드득!
당군악의 모든 힘을 실어 낸 추혼비는 밀려오는 매화를 뚫어 내며 전진한다. 앞으로 또 앞으로.
금방이라도 추락할 듯 덜덜 떨리면서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세차게 휘몰아치며 꽃잎들을 찢고 밀어 냈다. 마지막 힘을 다하듯 앞으로 또 앞으로 뻗어 나갔다.
촤악.
또 하나의 꽃잎을 가르고.
촤악.
또 하나의 검기를 부수고.
하지만 어떻게든 나아가던 비도는 이내 그 힘이 다한 듯 부르르 떨며 속도를 줄이고 멈춰 갔다. 그 광경에는 화산의 제자들마저도 안타까움의 탄성을 토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콰앙!
화산을 뒤덮었던 고요함을 대번에 날려 버리는 폭음과 함께 당군악의 몸이 멈추어선 비도를 향해 섬전처럼 날아들었다.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움직임에 화산의 제자들이 눈을 부릅떴다.
비도를 단번에 움켜잡은 당군악은 매화검기를 순간적으로 부수며 앞으로 쇄도했다.
그리고 청명도 당연하다는 듯 그런 그를 향해 돌진했다.
“저!”
“그, 그만!”
이 이상은 정말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난다고 생각한 화산 제자들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가 터졌다.
콰아아아아아앙!
추혼비와 암향매화검이 허공에서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아아아아아아!
사방으로 세찬 바람이 폭발적으로 불며 가공할 기파가 솟구쳤다.
우우우웅.
청명의 목 바로 앞에 겨누어진 비도가 파르르 경련했다. 당군악의 소매가 금방이라도 암기들을 발출할 듯 크게 부풀어 올랐다.
꾸욱!
당군악의 얼굴을 금방이라도 갈라 버릴 듯 다가온 검이 붉은 검기를 뿜었다. 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비도째 당군악을 갈라 버리겠다는 듯.
검날을 맞대고 정지한 세상.
차마 누구도 나서지 못하고, 누구도 입을 열 수 없는 그 순간.
움직이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하늘거리는 한 장의 꽃잎.
둘의 대결에 휩쓸려 하늘로 떠올랐던 연약한 꽃잎 하나가 잔잔해진 공기의 흐름을 타고 느리게 떨어져 내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 광경에 머물렀다.
천천히 떨어지다, 또다시 살짝 떠올라 이리저리 흔들리던 꽃잎은 이내 서로를 겨누고 있는 추혼비와 암향매화감을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조용한 끝을 맞이하는 듯 아주 살포시 비도 위에 내려앉았다.
“…….”
“…….”
두 사람의 시선이 푸른 검날 위에 내려선 매화잎으로 향했다.
매화 검기가 아닌, 진짜 매화잎.
이 강력한 충돌과 어울리지 않는 꽃잎을 보는 순간 두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멍해진다.
자연스레 검이 내려졌다.
꽃잎과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그들의 입가에 이내 허탈한 미소가 피어났다.
청명의 손이 제 목에 겨눠진 비도 날을 좌수로 가볍게 잡아 냈다. 당군악 역시 제 얼굴을 향해 있는 암향매화검을 좌수로 가볍게 움켜잡았다.
그렇게 병기를 빼앗듯 잡아 든 두 사람은 말없이 제 손에 들린 서로의 무기를 살폈다.
“……설마 이 검의 날이 나갈 줄이야.”
“그건 제가 할 말 같은데. 당가주님 무기가 이런 꼴이어서야…….”
검면에 새겨진 수많은 상흔들이 서로의 지난 시간을 말해 주는 것만 같았다.
탁.
청명이 던진 비도를 잡아 든 당군악이 제 손에 들린 암향매화검을 청명에게 내밀었다.
한참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깨를 으쓱한 청명이 빙긋 웃으며 물었다.
“계속?”
“흐음.”
당군악은 잠시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더는 의미가 없군.”
“…….”
그의 입가에 더없이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
“잘 돌아왔네, 화산검협.”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마침내 사방에서 커다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전한 것은 그저 무위뿐만은 아니리라.
화산과 당가. 그 커다란 두 이름이 삼 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마주 서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