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0화. 용이 되어 올 줄 알았더니. (5)
뿌옇게 뒤덮인 하늘. 극히 미세해서 모래라기보다는 먼지로 보이는 모래를 뚫고 붉은 매화가 피어올랐다.
한순간 수도 없이 피어오른 매화는 흡사 붉은 구름 같았다.
그 붉은 구름은 자욱하게 날아들던 모래와 정면에서 청명을 노려오던 수많은 세침들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큭!”
당군악의 두 눈에 희열이 피어났다.
‘괴물 같은!’
단혼사는 극도로 미세한 모래다. 때문에 단혼사가 하독 되었을 때 중독을 피할 방법은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것 말고는 없다.
공기 중에 퍼진 단혼사는 조금만 들이쉬어도 폐로 침투하고, 심지어는 피부에 닿는 것만으로도 몸 안에 독을 밀어 넣으니까.
단혼사를 맞은 이가 그 독성을 버텨 낼 수 있는가의 문제와는 별개로, 단혼사 자체를 막을 방법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 청명은 장력도 아닌 검기로 그런 단혼사를 모조리 밀어 내고 있다. 그건 저 피어나는 매화와도 같은 검기가 한 치의 틈도 없이 완벽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뜻.
겉으로 보이는 아름다움과는 별개로 무시무시하다는 말이 아니고서야 설명할 방도가 없는 검기다.
콰가가가각!
그 화려한 검기에 휘말려 들어간 세침들은 튕겨 나가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분쇄되고 있었다. 검의 속도와 위력이 세침이 버텨 낼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다는 뜻.
과거에도 몇 번이나 보았던 검이다.
하지만 당군악은 이 한 수로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같은 것은 그저 외양일 뿐이다. 검에 어려 있는 힘, 속도, 그리고 정교함마저도 과거와는 비교할 수도 없다.
카각!
마지막 세침이 부서지는 순간 청명이 매화의 숲을 뚫고 나오듯 그를 향해 쇄도해 왔다.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콰아아아아!
오싹.
청명이 쇄도하는 것을 본 순간, 당군악은 빙굴에라도 들어온 듯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걸 느꼈다.
경험해 본 적이 있음에도, 청명의 이 살기만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전신의 근육에 바짝 긴장이 들어가고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한다.
파아아앗!
가공할 내력을 담은 비도가 소용돌이치며 청명에게로 날아들었다. 정면으로 달려드는 기세를 한 번은 죽여 놓기 위한 공격이다.
하지만 당군악은 알고 있었다.
이 검을 든 마귀는 결코 상대의 생각대로 움직여 주는 법이 없다. 일격을 날리면 반드시 당군악이 가장 싫어할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청명은 오히려 더 빠른 속도로 돌격하며 그가 말린 비도의 정면으로 짓쳐 들었다.
허공에서 몸을 비튼 청명의 암향매화검이 승천하는 용처럼 솟아오르며 그가 날린 비도를 단숨에 쳐 올렸다.
콰아아아아아앙!
기와 기가 맞부딪히며 세찬 폭발을 일으켰다.
‘그렇지!’
당군악이 기운을 뻗어 바닥에 떨어진 추혼비들을 회수했다. 그리고 동시에 굳이 볼 것도 없다는 듯 지체 없이 재차 세 개의 추혼비를 날렸다.
맹독 묻은 비도가 세 줄기의 소용돌이를 만들어 냈다. 날과 손잡이에 듬뿍 발라 둔 단혼사가 회전과 함께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파아아앗!
기의 폭풍 속에서 청명의 모습이 드러난 순간, 세 개의 비도는 이미 청명의 바로 앞에 당도해 있었다.
그 순간 당군악은 보았다.
청명의 검이 파르르 떨리며 매화를 피워 내는 모습을.
‘…….’
절로 눈이 커다래졌다.
찰나의 시간을 쪼개어 오가는 공방. 그 극한의 빠름 속에서 청명의 검은 마치 다른 시간을 타며 움직이는 것만 같다.
과할 정도로 느릿하게 움직이는 검이지만, 실상은 결코 느리지 않았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시간이 검보다 배는 더 느리니까.
콰각!
피어오른 매화를 당군악의 비도가 꿰뚫었다. 꽃잎 따위로 비도를 막아서는 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지를 증명하겠다는 듯이.
하지만 가녀린 꽃잎을 찢어발겨 버린 비도의 위용이 채 빛나기도 전에, 새로 피어난 매화가 비도를 향해 날아들었다.
흐느적대며 날아든 꽃잎이 비도에 달라붙었다. 한 겹 한 겹 밀려온 매화가 비도를 부드럽게 감싸더니 부드럽게 옆으로 밀어 냈다.
‘뭐?’
당군악의 눈이 부릅뜨였다.
우우우우웅!
막대한 내력이 실린 비도는 여전히 힘을 조금도 잃지 않고 쇄도했지만 그 방향은 이미 당군악의 의도와 크게 달라졌다.
세 줄기의 소용돌이는 애초부터 그럴 생각이었다는 듯 크게 휘어지며 청명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여전히 빛살처럼 달려드는 청명을, 이번엔 비도 뒤를 따르던 단혼사가 덮쳤다.
그 순간.
빙글.
청명의 검이 허공에 원을 그려 내었다.
검을 그려 낸 것임에도 부드럽다는 느낌이 완연한 궤적이었다. 그리고 이내 검은 섬전처럼 횡으로 휘둘러졌다.
화아아악!
당군악의 두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날아들던 단혼사가 그어진 검의 뒤를 쫓기라도 하는 양 옆으로 일제히 밀려나는 모습을 말이다.
아무리 내력이 실렸다고는 하나 먼지는 그저 먼지다. 검 끝이 대기를 밀어 내며 비어 버린 공간으로 단혼사가 환상처럼 빨려들기 시작했다.
쾅!
당군악은 빠르게 바닥을 박차며 몸을 뒤로 날렸다.
‘용이 되어 올 줄 알았더니.’
……이건 숫제 괴물이 아닌가?
청명이 저 검으로 태산 같은 매화를 피워 내 그의 공격을 막아 냈다면 당군악은 결코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어마어마한 내력을 내뿜어 비도를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고 해도 당연히 그러리라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당군악이 예상한 ‘성장’과는 그 궤를 달리했다.
그 어떤 것도 통하지 않는다.
청명이 일격마다 얼마나 큰 힘을 들이고 있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당군악이 느끼기에는 청명이 장난처럼 휘두른 검에 필사의 각오로 날린 그의 공격들이 너무도 허무하게 무력화되는 것만 같았다.
당군악의 양손이 섬전처럼 제 소매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생각은 짧고 행동은 빨라야 하는 법.
화아아악!
당군악의 손끝에서 독질려(毒蒺藜)와 우모침(牛毛針)이 흩뿌려졌다. 독 병에서 흩뿌려진 독액들은 공기와 맞닿는 순간 순식간에 기화하며 검디검은 독연(毒煙)으로 화해 전방을 뒤덮었다.
‘모자라!’
소매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탈명표(奪命鏢)까지 모조리 날려 댄 뒤에야 당군악의 손이 비도에 가 닿았다.
이 암기와 독들이 청명의 돌진을 막아 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당가의 가주인 그의 입으로는 차마 할 수 없는 말이지만,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발출한 비도로도 막을 수 없던 이를 막아서기에 이 독과 암기들이 너무도 무력하다.
그저 찰나의 시간만을 벌 뿐이다.
하지만 눈을 한 번 깜빡일 시간에조차 미치지 못하는 그 한순간만을 벌어 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런데 그 순간, 당군악이 본 것은 그저 하나의 선이었다.
마치 검은 격랑처럼 전방을 뒤엎은 독과 암기의 물결 사이로 선명한 붉은 선이 어둠을 가르는 여명처럼 피어났다.
빛이 있는 곳에선 어둠이 온전하게 존재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가 만들어 낸 암기의 물결은 그 붉은 선 앞에서 차츰 존재를 잃어 갔다.
이내 바다가 좌우로 갈라지듯 암기의 물결 사이로 확연한 길이 열렸다.
천하의 당군악도 그 순간만큼은 넋을 놓고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가 온 힘을 다해 전투를 치르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잊어버리고.
극의에 이른 검격.
시선을 모조리 잡아끌고 점멸하던 붉은 선, 그 끝에서 암향매화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순간이라도 청명의 발목을 잡아끌고자 했던 그의 모든 수법들이 단 일 검에 그 의미를 잃었다.
고작 섬뜩하다는 말 따위로는 이 모든 현상을 표현할 수 없다.
비무를 하고 있을 뿐인 당군악도 이토록 압박을 느끼는데, 목숨이 오가는 전장에서 청명의 앞에 섰던 이들은 대체 어떤 느낌을 받는단 말인가.
‘막을 수 없다라…….’
무슨 수를 써도 저 돌진을 막아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그 순간 당군악의 두 눈에 결심이 어렸다.
파아아앗!
생각할 틈도 없이 당군악이 네 개의 비도를 발출했다. 손잡이 끝을 밀어내는 손가락 끝이 으스러질 정도의 힘을 담아서.
콰아아아아아아!
출발한 비도가 공기를 휘감고, 기운을 휘감는다. 섬전처럼 날아드는 두 개의 비도 뒤로, 소용돌이치는 두 개의 비도가 뒤따랐다.
“타앗!”
당군악의 입에서 커다란 기합이 터지며, 손끝에선 다시 네 개의 비도가 발출되었다.
오뢰연환(五雷連環).
본디 다섯 개의 비도로 펼쳐져야 하는 오뢰연환이 네 개의 비도로 펼쳐졌다. 회수하지 못한 비도가 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하기에는 아직 당군악의 손 위에 하나의 비도가 더 남아 있었다.
그리고.
우우우우우웅!
마지막 남은 하나의 비도.
당군악의 손바닥 위에 올려진 추혼비가 마치 살아 있는 잉어처럼 펄떡이며 뛰어올랐다.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도록 내력을 주입하니 흡사 내력이 아닌 생명을 불어넣기라도 한 듯 비도가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우우우우우웅!
‘더!’
막대한 내력을 끌어 올린 당군악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 이 정도로는 청명을 막아 낼 수 없다. 저 검을 멈추게 하기에는 부족하고 또 부족하다.
“더!”
생각이 입으로 터져 나왔다.
고오오오오오오오!
펄떡이던 비도가 점점 그 움직임을 멎어 갔다. 손바닥 세 치 위에 떠오른 비도가 웅웅대며 부르르 떨었다.
‘더!’
카앙! 카앙!
그때, 가장 처음 날린 두 개의 비도가 빛살처럼 쇄도하던 기세가 무색하도록 힘없이 튕겨 나왔다.
뒤이어 소용돌이치며 날아들던 두 개의 비도 역시 강하게 휘둘러진 청명의 검을 밀어 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아마 그 뒤를 따르는 네 개의 비도도 허무하게 튕겨 나가고 말 것이다.
우우우우우우웅!
하지만 상관없다.
그 모든 공격은 오직 이 한 수를 위해서 존재했으니까.
우우우우우우웅!
주르륵.
당군악의 입술 사이로 비집고 나온 붉은 피가 턱을 타고 흘렀다.
아직은 그조차 완성하지 못한 일격.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위험한 일격.
비도의 잔떨림마저도 점점 멎어 가는 것을 확인한 당군악의 손끝이 순간 살짝 떨렸다.
가슴에 든 하나의 의혹 때문이었다.
‘받아 낼 수 있을까?’
이 일격을 과연 청명이 감당할 수 있을까?
어쩌면 지금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당군악이 비도에서 시선을 떼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은 그를 향해 맹렬히 돌진하고 있는 청명의 두 눈이었다.
“…….”
당군악의 피에 젖은 입술이 옅은 호선을 그렸다.
‘당연히…….’
망설임이 안개 걷히듯 사라진 그의 두 눈에 확고한 의지가 들어찼다.
‘믿는다!’
당군악의 손 위에 떠 있던 추혼비의 움직임이 완전히 멎었다.
“받아 보아라.”
그가 느릿하게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작디작은 아이를 어루만지는 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러자 손 위에 머물던 추혼비가 천천히 허공으로 솟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