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6화. 그렇게 벌레처럼 죽어 가라. (1)
검은 물결이 밀려온다. 검은 무복 차림의 일백의 검수가 마치 한 몸처럼 달려드는 모습은 ‘위압’이라는 말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사파인들은 저도 모르게 다급히 눈을 굴렸다. 상대가 버거울 때는 일단 달아날 길부터 찾는 사파 특유의 본능이 발휘된 것이다.
하지만 달아날 길은 어디에도 없다. 그들을 완전히 에워싼 화산은 개미 새끼 한 마리 살려 두지 않겠다는 듯 포위망을 좁혀 오고 있었다.
“어…….”
“이, 이거?”
전투란 기세가 곧 절반이다.
청명의 등장과 동시에 기선을 제압당해 버린 사파들은 어찌할 도리를 모르고 동요하기 시작했다. 강호에 날리던 그 악명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멍청한 새끼들아, 똑바로 봐라! 아직 애새끼들이다!”
“핏덩어리들이 날뛴다고 겁먹지 말란 말이다!”
그 말에 움찔한 이들이 달려드는 화산파 제자들의 얼굴을 다시 확인했다.
과연.
검은 무복과 짙은 살기가 그 본질을 순간 가렸지만, 달려드는 화산의 제자들은 자세히 보니 아직 이립(30세)에도 이르지 않은 애송이들이었다.
화산이 제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다고 한들, 저 애송이들을 절정의 검수로 만들지는 못했을 터.
“박살을 내 버려라!”
누군가의 외침이 추락한 사기를 끌어 올렸다.
‘빌어먹을, 예상 못 한 것도 아니었잖아?’
‘그래. 화산 정도는 언제든 밟아 버릴 수 있다!’
이곳에 모인 이들의 명성과 실력을 감안하면 화산의 등장에 놀라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그 사실을 다시 한번 떠올린 그들은 이를 악물며 병장기를 고쳐 잡았다.
험난한 강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세간에 전해지는 평가보다는 자신의 감을 더 중히 여겨야 한다는 당연한 지론을 애써 무시하며 말이다.
어차피 달아날 수 없다면 맞서 싸워야 한다. 전의를 끌어 올린 그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돌진해 오는 화산의 제자들을 마주 상대하기 시작했다.
‘그래 봐야 아직 어린놈들일 뿐이지.’
봉평(奉萍)이 도를 꽉 움켜잡았다.
설사 화산이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까마득한 과거의 실력을 되찾았다 한들, 저 어린놈들을 절정검수로 환골탈태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일이 가능했다면 장강참변에서 명성을 떨친 것은 화산검협이 아니라 화산파였을 테다.
“주제를 알려 주마, 이 애송이 놈들아!”
이 정도로 겁을 먹는다면 절강 일대에 악명을 떨치는 사자혈도(獅子血刀)의 이름이 아깝다.
봉평은 그 별호에 걸맞은 맹렬한 기세를 내뿜었다. 경험이 부족한 애송이들을 상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살기와 기세로 손을 굳게 만드는 것이다.
“흐아아아아아압!”
그의 도가 폭발적인 도세를 내뿜었다. 푸르다 못해 시퍼런 도기가 폭풍처럼 뿜어져 나갔다.
‘우선은 달려드는 기세를 죽여 놓고!’
저 기세만 없으면 이딴 놈들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정신이 있는 놈이라면 이런 도세를 보면 멈출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봉평의 커다란 착각이었다.
그에게 달려들던 화산의 제자는 맹렬하게 솟구치는 도기를 보고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 폭풍 속으로 돌진했다.
‘뭐?’
정신이 나갔나?
봉평은 적잖이 당황했다. 휘몰아치는 도기 사이로 얼핏 화산 제자와 눈이 마주쳤다.
섬뜩.
일말의 흥분도 보이지 않는 차가운 눈빛을 보는 순간 봉평의 심장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리고.
파아아아앗!
도기의 폭풍 사이로 한 줄기 검기가 빛살처럼 날아들었다.
카각!
놀랄 틈도 없었다.
화끈한 통증이 먼저 찾아왔기 때문이다. 도를 잡은 손끝이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린다 싶더니 무언가가 튀어 오르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살짝 구부러진, 길쭉한 무언가.
그 익숙하면서 낯선 물체가 도를 잡고 있던 자신의 손가락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봉평의 눈은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부릅떠졌다.
“어…….”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소지와 약지를 날려 버린 검은 흡사 뱀처럼 그의 팔뚝을 타고 올랐다.
파앗! 파앗! 파앗!
손목의 인대가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팔뚝에 긴 자상이 생겨나고 팔꿈치로 검 끝이 박혀 들었다.
그 모든 과정이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새에 벌어졌다.
“으으아아아악!”
봉평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팔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에 도를 놓아 버리고 싶지만, 그건 말 그대로 자살행위다. 통렬한 고통을 억지로 누른 그는 근접한 화산의 제자를 향해 도를 다시 휘둘렀다. 그야말로 일도양단할 기세였다.
하지만 그의 도가 채 반도 휘둘러지기 전에 화산의 제자는 찔러 냈던 검을 회수하며 손잡이 끝부분으로 도를 정확하게 막아 냈다.
카앙!
그리고 그 반동을 완벽하게 이용하며 재차 검을 찔러 넣었다.
푸욱!
“꺽…….”
불로 달군 인두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아랫배에 퍼져 나갔다. 하지만 그 고통에 신음하기도 전에 회수된 검은 뒤로 튕긴 도를 움켜잡은 봉평의 팔꿈치를 베었다.
서걱!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러기에는 상대의 검이 지독하게 빨랐다.
그가 알 수 있는 건 이 솜털도 가시지 않은 애송이가 지금 그를 일방적으로 난자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것도 안색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말이다.
“으으아아아아!”
봉평은 고함을 내지르며 도를 찔렀다. 그 고함을 상대를 위협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그의 마음을 잠식해 버린 공포. 사람의 몸을 고깃덩어리처럼 썰면서도 눈빛 하나 바뀌지 않는 이 어린 살귀에 대한 공포를 떨치기 위해 지른 비명이었다.
파앗!
혼신의 힘을 다해 내뻗은 도가 가공할 속도로 화산 제자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화산 제자의 고개가 옆으로 딱 한 치만큼 꺾였다. 봉평의 도는 그의 얼굴을 말 그대로 종이 한 장 차이로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봉평은 보았다.
제 얼굴로 도가 날아들고 있음에도 일말의 감정조차 내보이지 않고 오직 그만을 응시하고 화산 제자의 눈빛을.
파아아앗!
삽시간에 피어난 붉은 검기가 뻗어진 봉평의 팔을 가르고 지나갔다.
서걱!
현실적이지 않은 광경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닌 광경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평생을 제 어깨 아래 붙어 있던 팔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 바람개비처럼 회전해 날아가는 것이 당사자에게 대수롭지 않을 리 없다.
“어…….”
서걱!
채 다 놀라기도 전에 양쪽 허벅지가 동시에 베이며 피가 솟구쳤다.
서걱.
연이어 무릎을 베고 지나간 검은 봉평에게 더 이상 서 있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쓰러질 수도 없었다. 꺾인 무릎이 채 땅에 닿기도 전에 그의 복부와 가슴으로 십여 번의 검격이 날아든 것이다.
푸욱! 푸욱! 푸욱! 푸욱!
검이 한 뼘씩 박혔다. 첫 번째 검격이 살을 갈라내는 고통을 채 느끼기도 전에 두 번째 검격이 몸을 가르고, 이어 세 번째 검격이 뼈를 자른다.
봉평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저 찢어지도록 입을 벌린 채, 가슴을 난자해 오는 감각을 느끼는 것뿐이었다.
“끄으…….”
그의 몸이 마침내 스르륵 아래로 쓰러졌다.
반쯤 잘려 나간 무릎이 바닥에 닿았고, 모조리 끊어진 복근은 그가 허리를 볼품없이 웅크리게끔 만들었다. 팔이 잘려 나가 머리가 땅에 닿는 걸 막을 수도 없었다.
마치 사죄하듯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댄 채 엎드리게 된 봉평의 목에 싸늘한 금속이 닿았다. 순간 온몸이 쪼그라지는 것처럼 섬뜩한 기운이 퍼져 나갔다.
“아, 안…….”
그 감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수 없는 봉평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서걱.
하지만 목에 닿은 검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목을 베어 냈다. 차가운 금속이 경동맥을 깔끔하게 갈라 버렸다.
베인 목에서 시뻘건 피가 울컥울컥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팔을 잃은 그는 목을 잡을 수도, 흘러나오는 피를 틀어막을 수도 없었다.
꾸르륵…….
목으로 피가 역류하며 온 입 안에 피비린내가 퍼졌다. 덜덜 떨릴 만큼 끔찍한 격통이 전신을 휘감았다.
하지만 봉평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미 전신의 근육이 끊어져 버린 이상, 끔찍한 고통 속에서 꿈틀거리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태어나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고통이 봉평을 지옥의 문앞으로 끌고 갔지만, 무인의 질긴 목숨은 죽음조차 쉽사리 허용해 주질 않았다.
‘차…라리 죽여…….’
이건 너무도 잔인하다. 사파인들도 이토록 사람을 처참하게 죽이지는 않는다. 정파라는 이들이 이럴 수는 없다.
그때였다.
자비를 구걸하려 꿈틀거리는 봉평의 귓가에, 싸늘한 목소리가 꽂혔다.
“그렇게 벌레처럼 죽어 가라.”
온몸의 피를 다 얼려 버릴 듯한 차가움이었다.
“쓰레기에겐 쓰레기에게 맞는 죽음이 있는 법이니까.”
경련하는 봉평을 일별한 곽회는 검에 묻은 더러운 피를 털고 곧장 다음 상대를 향해 돌진했다.
입술 사이로 드러난 그의 하얀 이가 마치 굶주린 짐승의 송곳니처럼 빛났다.
“이, 이익.”
낭아살부(狼牙殺斧) 마량(馬梁)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이, 이놈들은 대체 뭐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들일 뿐이다. 제아무리 명문의 제자라고 한들, 세월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그들의 나이를 감안한다면 감히 그의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마량이 대면한 현실은 그의 상식을 처참하게 부숴 놓았다.
파아아앗!
날아든 검이 그의 어깨를 파고드는 것과 동시에 비틀렸다.
마량은 목구멍을 타고 터져 나오는 비명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검이 어깨를 파고든 고통이야 별것도 아니다. 진짜 고통은 그 검이 비틀어지며 그의 근육을 모조리 찢어 놓았을 때 다가왔다.
순간적으로 몸이 덜덜 떨릴 정도의 통증이었다.
“이, 이 개 같은 놈이!”
마량의 도끼가 강맹한 기운을 품고 화산 제자의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그가 상대하던 화산 제자는 검을 슬쩍 들어 올렸다. 검면으로 도끼를 막으려는 심산인 모양이었다.
‘멍청한!’
마량이 내심 쾌재를 불렀다.
저 경험이 일천한 어린놈은 아무래도 이 도끼가 평범한 도끼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저 얇은 검으로 막아 내려 하는 것을 보니 말이다.
그의 도끼는 무게만 해도 오십 근에 달하는 중병 중의 중병이다. 저 검이 천하에 이름 높은 신검이라도 할지라도 맥없이 밀릴 수밖에 없다.
“죽어라아아앗!”
있는 내력을 모조리 실은 그의 도끼가 폭발적인 기세를 담고 빗겨 세운 검면을 향해 떨어졌다. 검째로 화산 제자의 몸뚱이를 양단해 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도끼가 맞닿은 바로 그 순간, 검이 슬쩍 사선으로 비틀렸다.
마량은 두 눈을 커다랗게 부릅떴다.
그의 도끼가 마치 비탈을 달리는 수레처럼 검면을 따고 흐르고 있었다. 느려진 세상 속에서 검이 출렁이는 모습과 그의 도끼가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비끼어 미끄러지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투웅.
그리고 도끼가 검 끝과 맞닿았을 때, 검이 그의 도끼를 종잇장처럼 가볍게 튕기며 날려 버렸다.
그 순간 마량은 보았다.
검 끝.
그를 향해 겨누어진 검 끝이 빠르게 점점 더 커지는 모습을 말이다.
‘아, 안…….’
마량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비틀었지만, 검 끝은 여전히 그의 세상을 점점 더 크게만 채워 왔다.
“안…….”
푸욱!
검이 마량의 눈을 꿰뚫었다.
“커, 컥…….”
마량은 흡사 발작이라도 일으키는 것처럼 푸들푸들 경련했다.
드드득.
무언가 뒤틀리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꿰뚫린 고통보다 평소 마땅히 조용해야 할 몸속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가 더욱 공포스러웠다.
“백상.”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문을 채 가지기도 전에.
파아아아앗!
단숨에 잘려 나간 마량의 머리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허공에서 회전하는 마량의 얼굴에는 그가 죽음 직전 느꼈던 공포와 절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촤악!
검을 떨쳐 낸 백상은 허물어지는 마량의 몸뚱이를 보며 싸늘히 일갈했다.
“죽인 사람의 이름 정도는 알고 죽어야지. 너 같은 쓰레기에게는 과분하겠지만.”
이미 죽은 이에게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