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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845화 (842/1,567)

845화. 사람을 엿 먹여도 정도가 있지! (5)

스으윽.

새하얀 천이 검을 훑고 지나간다.

스으윽.

백천의 두 눈이 진중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루 한 번 습관적으로 하는 일. 하지만 그의 자세는 처음 검을 닦던 순간처럼 진지하기만 했다.

스으으윽.

검면이 동경처럼 얼굴을 비추었다. 백천은 검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다 다시 묵묵히 검을 닦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후우.”

깨끗하게 닦인 것을 확인한 그가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탁.

정비를 끝낸 검을 조심스럽게 옆에 내려놓고 문 쪽으로 시선을 주며 말했다.

“왔으면 들어오지, 왜 그러고 있어?”

“……언제 알았어?”

“그렇게 기척을 내는데 모르면 더 이상하지.”

“그럼 들어오라고 하든가!”

툴툴대며 문을 열고 들어오는 청명을 보고 백천이 피식 웃었다.

“네가 언제부터 들어오라고 해야 들어오는 사람이었냐? 아예 잠가 둬도 문 부수고 들어오는 놈이.”

그렇긴 하지, 청명은 씩 웃으며 방 안으로 휘적휘적 들어와 한가운데에 아무렇게나 털썩 앉았다. 백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

“…….”

잠시 침묵이 지나갔다. 청명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백천을 바라봤다.

“안 물어봐?”

“뭘?”

“왜 왔는지.”

“이유가 있어서 왔겠지.”

“아니…….”

“그래서 기다리고 있다. 네가 뭐라고 말을 할 건지.”

청명이 영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삐쭉거리다 퉁명스레 말했다.

“마치 내가 올 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말하네.”

“맞아.”

“응?”

청명의 고개가 획 올라간다. 의문 담은 시선을 받으며 백천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내 방에 올 줄은 몰랐지만, 곧 뭔가 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했다. 꽤 중요한 일을 말이야.”

“……왜?”

“왜라니?”

백천은 오히려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네가 평소 같지 않았으니까.”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정말 몰라?”

“응. 나는 평소랑 똑같았던 것 같은데.”

백천은 한숨을 푹 쉬며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자신을 더없이 한심하게 바라보는 백천의 눈빛에 청명이 움찔하며 저항했다.

“왜, 왜! 뭐, 뭐!”

“청명아.”

“왜!”

“너 장일소와 싸우고 돌아오고 나서 뭐 했냐?”

“뭘 했냐니, 그야 당연히…….”

청명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천천히 입을 닫았다.

‘그러게. 내가 뭘 했더라?’

고개를 슬쩍 갸웃하며 지난 며칠을 되짚었다.

뭔가를 끊임없이 하기는 했는데, 또 생각해 보니 딱히 한 게 없는 것 같은 느낌이다. 백천이 저리 물어 오니 대답이 궁해졌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청명을 빤히 보던 백천이 피식 웃고는 말했다.

“매화도를 정비하는 건 당가가 주력이 되어 진행했고, 부두를 만들고 상선의 체계를 잡는 건 녹림에서 했지. 화산의 제자들은 주변을 안정시키며 구휼을 했고.”

“……그렇지?”

“평소 같았으면 전각을 짓는 데서도 이리저리 구시렁대며 지시를 하려고 했을 거고, 그러다가도 부두에 달려가서 산적 놈들을 걷어찼겠지. 그리고 누구보다 먼저 날뛰면서 사파 놈들 다 패 죽여 버리겠다고 악을 쓰고 있었을 거고.”

“…….”

“그럴 만큼 힘이 넘치던 놈이 갑갑한 섬에 처박혀서 대뜸 신선놀음이나 하고 있는데, 정상적인 상태라고 생각했겠냐?”

청명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냥 사숙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거지?”

“나만 그랬겠냐? 지금 다들 손에 폭탄 들고 있는 심정일 거다. 네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걸 모르면 화산의 제자가 아니지.”

“…….”

청명의 얼굴이 짧은 시간 동안 몇 번이고 변했다. 뭔가 말을 할 듯 입술을 달싹이던 청명이 결국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백천이 어깨를 으쓱했다.

“할 필요가 없으니까.”

“…….”

“어차피 너는 남의 말을 듣는 사람도 아니고, 혼자 끙끙대다가 곪도록 두는 놈도 아니지. 적당한 순간이 되면 고민을 끝내고 말을 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백천의 시선이 청명에게로 향한다.

“그래, 지금처럼.”

“…….”

“그러니 말해 봐라. 뭐가 문제인지.”

그 눈빛이 자못 진지해서, 청명은 어색하게 눈을 굴리다 결국 시선을 마주 했다.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니…….”

“응.”

“아니, 그…….”

“그래.”

“아니, 그게…… 그러니까…….”

“……뭐, 이 새끼야! 뭐! 아니, 도대체 뭐!”

“아,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청명이 마주 꽥 소리를 지르고 머리를 벅벅 긁었다.

“……뭔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고.”

“응?”

“정확하게 말하면 나도 문제가 뭔지 모르겠어. 내가 그동안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는 것도 지금 사숙한테 듣고 알았으니까.”

“…….”

“아, 아니 그렇게 ‘뭐 이런 병신 새끼가 다 있지?’ 하는 눈으로 보지 말라고.”

“……그동안 독심술이라도 익혔냐?”

“끄응.”

청명이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숙 말 듣고 보니 내가 뭔가 심사가 단단히 꼬여 있었다는 건 알겠는데, 왜 그랬는지 나도 도통…….”

“모르겠다?”

“응.”

“나는 알겠는데.”

“응? 진짜?”

청명이 놀란 눈으로 백천을 바라본다. 그도 모르는 걸 백천이 어떻게 안단 말인가?

“뭐 뻔한 거지. 너는 늘 상상 이상으로 생각이 없고, 단순하고, 뻔하고, 멍청하고, 또…….”

“거기까지.”

이 새끼야.

청명이 눈을 새하얗게 흘기니 백천이 웃었다.

“너는 원래 그런 놈이잖아. 지금 시급하게 해야 하는 뭔가가 있으면 그거 말고는 눈에 안 들어오는 놈.”

“…….”

“매화도를 정비하는 것, 상로를 뚫고 돈을 버는 것, 영향력을 키워 가는 것, 구파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그들이 차지했던 곳을 우리가 먹는 것…….”

백천은 줄줄이 읊다 말고 청명을 빤히 보았다.

“그래, 그거 다 중요한 일이지. 하지만…….”

그리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게 가장 중요한 건 아니겠지. 적어도 청명이 너에게는 말이야.”

“…….”

“청명아.”

“응?”

“네가 하고 싶은 걸 해라.”

청명은 잠깐 입을 잃은 사람처럼 조용했다. 백천이 말을 이었다.

“네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 해야만 해서 하는 일 말고.”

“아니, 사숙 나는…….”

“이대로는 사패련과 만인방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뭔 소리야.”

청명은 조금 어색하게 백천을 보다 말했다.

“영향력도 커지고 천우맹의 결속도 더 단단해지고…….”

“내가 아는 너는.”

하지만 백천은 단호히 그의 말을 끊어 버렸다.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따윈 모르는 놈이다. 문제가 있으면 직접 들이받아 부숴 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놈이지.”

“…….”

“너한테 그런 건 그냥 다 부수적인 것일 뿐이야. 안 그래? 네게 중요한 건…….”

백천이 청명을 똑바로 보며 말한다.

“화산이 사패련을 이길 수 있는가.”

“…….”

“화산이 만인방과 싸울 수 있는가.”

청명이 입을 다물고 백천을 보았다.

“그거지?”

“…….”

멍한 청명의 표정에 백천이 빙그레 웃었다.

“때로는 자신보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상황을 더 명확하게 파악할 때도 있지. 내가 보기에는 지금이 그런 경우 같고.”

“…….”

“핵심은 짚었다. 해야 할 건 명확하다. 하지만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럼…… 나 같아도 너처럼 굴었을 거다.”

백천이 진지한 얼굴로 청명을 보다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내가 할 말은 하나뿐이야.”

“……뭔데?”

“너는 욕심쟁이에, 멍청하고, 성격까지 나쁜 끔찍한 놈이다.”

“아니, 근데 이 새…….”

“하지만 그것보다 더 최악인 점은, 네가 남을 못 믿는다는 거야.”

“…….”

“너는 이미 충분할 정도로 많은 걸 했어. 네가 굳이 일일이 손대지 않아도 네가 만들어 놓은 것들은 흐름을 타고 굴러갈 거다. 그러니 네가 모든 걸 주관해야 한다는 욕심을 버려. 적들이 산적해 있을 때, 가장 쉽게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뭐라고?”

청명의 입술이 달싹댄다.

이건 그가 백천에게 수도 없이 한 말이다.

“대가리를…….”

잠시 후 입에서 신음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잡는 거야.”

백천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 잘 알고 있네.”

이건 단순히 우두머리를 처리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일을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의미다.

청명도 백천도 그 의미를 알고 있다.

“이리저리 휘둘리는 건 내가 아는 청명이 놈답지 않아. 너는 단순할 때가 제일 좋아. 남은 건 다 남들이 알아서 하라고 던져 버리고, 너는 네가 생각하는 최선을 다해.”

“…….”

“책임을 진다는 건, 모든 걸 다 짊어지는 게 아니야. 그건 오히려 무책임한 거지.”

청명이 말없이 백천을 빤히 보았다. 그러자 백천은 슬쩍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왜? 이제 와 사숙답다고 칭찬이라도 하려고?”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뭐?”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던 청명이 웃었다.

“동룡이도 사람 같을 때가 있구나 싶어서. 멀대같고 허여멀건 게 얼굴값도 못하고 푼수 짓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 새끼가?”

청명이 낄낄대며 웃었다.

“하나는 알겠어.”

“뭘?”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가는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거.”

“나한테 하는 말이냐?”

“아니. 날 두고 하는 말이야.”

청명은 자조적으로 웃고 말았다.

그는 청문이 되고 싶었다.

그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장문인은 청문이니까. 하지만 내심으로는 이미 알고 있기도 했다.

그는 결코 청문이 될 수 없고 장문인이 될 만한 사람도 아니다. 둘 중 어느 것도 청명은 할 수 없는 일이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잊었네.’

확실히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하고 있었다.

딱히 대단한 말을 들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뭔가 눈앞이 확 개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을 덮고 있던 뿌연 안개가 일거에 걷히는 듯 말이다.

“사숙.”

“응.”

“고마워.”

담담한 그 인사에 백천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너 뭐 잘못 먹었냐?”

“…….”

“혹시 그때 장일소한테 너무 처맞아서 머리를 다쳤다거나……. 소소를 부를까?”

“…….”

청명은 슬퍼졌다. 백천이 한 말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그 말이 농담이 아님을 한껏 알려 주는 백천의 진심 어린 두 눈 때문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냅다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버렸을 청명이지만, 오늘만은 참기로 했다.

“하여튼…….”

유이설이고 백천이고, 둘 다 이렇게 나오는 걸 보니 참 등신같이 굴기는 했던 모양이네.

청명의 눈빛이 점점 더 또렷해지고 선명해졌다.

“그러니까, 지금 해야 할 걸 하란 말이지?”

“그래.”

“제일 중요한 일을?”

“그렇다니까?”

“……그렇단 말이지?”

“…….”

잠깐 정적이 흘렀다. 백천의 얼굴에 불안이 감돌기 시작했다.

청명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너무도 청명다워서 안심이 되었지만, 또 반대로 너무도 청명스러워서 덜컥 불안해졌다.

“사숙 말이 맞아. 내가 멍청했네.”

“…….”

“생각하니까 빡치네! 이렇게 뻔한 걸! 내가 언제부터 이것저것 신경 썼다고!”

“아, 아니, 잠깐만. 청명아. 야, 인마.”

백천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뭔가…… 일이 생각과는 다르게 풀려 나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아니, 이건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덕분에 개운해졌어! 크으, 동룡이도 쓸모 있을 때가 있네! 그럼 나중에 이야기해!”

청명이 후련해진 얼굴로 벌떡 일어나 몸을 획 돌렸다.

“아니, 이 새끼야! 이제 뭘 할 건지 말은…….”

백천이 황급히 손을 뻗었지만 이미 청명은 문을 박차고 나간 뒤였다.

허공을 헤매던 손이 어색하게 공기만 두어 번 부여잡다 툭 떨어졌다.

“…….”

뭔가 실수한 기분인데?

그때, 활짝 열린 문으로 윤종과 조걸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밖에서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두 사람은 저 멀리 달려 나가는 청명과 망연히 선 백천을 번갈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사숙.”

“……응?”

“무슨 짓을 저지르신 겁니까?”

“…….”

얘들아…….

나도 그걸 몰라서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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