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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824화 (821/1,567)

824화. 이 전쟁은 내가 이겼다. (4)

절벽 아래로 내려온 만금대부는 장일소를 빤히 보았다.

‘패군이라…….’

그가 장일소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위기감.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장일소의 말대로 손도 써 보지 못하고 각개 격파를 당할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과할 정도로 차오른 힘은 반드시 외부로 향하게 되고, 그 외부로 향한 힘의 가장 좋은 표적은 다름 아닌 사파이니까.

그리고 둘째는…….

‘적당히 내세워서 써먹고 버려도 손해는 없을 거란 계산이었거늘.’

이로써 확실해졌다.

그의 두 번째 계산은 완전히 어긋났다.

웬만큼은 장일소를 이해하고 있단 자부심이 있었건만, 진짜 장일소는 그의 계산 안에 둘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가 그들을 찾아온 이후부터 바로 지금까지, 어떤 흐름도 장일소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장기짝으로 부려진 건 오히려 나였단 건가?’

등골이 오싹해졌다.

용암같이 타올랐던 이 전쟁에서 장일소를 가장 두려워하게 된 건, 어쩌면 저 정파 놈들이 아니라 그의 아래에서 싸운 사파들인지도 모른다.

당장 만금대부만 해도 심장이 조이는 느낌을 받는데, 다른 이들이야 오죽했겠는가?

“어쨌건…….”

만금대부는 속내를 감추고 짐짓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남는 장사를 했군.”

“남는 장사?”

듣고 있던 흑룡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건 너희의 입장이겠지. 장강은 손해만 봤다! 무엇보다 흑룡채가 반이나 썰려 나간 건 회복할 수 없는 피해다!”

흑룡왕이 두 눈에서 살기를 뿜어내며 장일소를 형형하게 노려보았다.

“장일소! 분명 장강에 이득을 가져주겠다고 했을 텐데! 네놈이 나를 농락한 것이냐!”

“네놈이라……. 쯧쯧쯧.”

천면수사가 혀를 찼다.

“무식한 것은 알았지만, 경우도 모르는군. 주둥아리 조심해라, 흑룡왕. 이제 막 시작한 사패련이다. 련주의 위엄이 상하면 우리에게도 좋을 것이 없다.”

“닥쳐라, 쥐새끼 같은 놈! 네놈도 장일소와 짜고 나를 속여 먹은 건 아니고?”

흑룡왕이 노화를 터트리니 천면수사의 눈빛이 삽시간에 차가워졌다.

“큭큭.”

하지만 그때 장일소가 나직이 웃으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화내실 것 없소. 나는 장강에 확실한 이득을 가져다주었으니까.”

“……이득? 이득이라고 했나?”

“이제 그대가 장강에서 무슨 일을 벌여도 막으려 드는 이가 없을 것이오. 앞으로 삼 년 간은.”

흑룡왕이 살짝 미심쩍은 듯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하나 관이…….”

“관 역시 단독으로는 수채를 상대하기 어렵지. 그들이 나설 때는 언제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지원을 받아 왔으니까. 그들이 나설 수 없다면 관에서도 짐짓 모른 척할 것이오.”

“으음.”

“그렇게만 된다면 이 정도 피해를 복구하는 건 일도 아니지 않소? 오히려 수로채는 더 강성해지겠지.”

흑룡왕은 잠깐 말없이 장일소를 빤히 바라보다 크게 헛기침했다.

“그 말이 틀림없겠지, 련주?”

“물론이외다.”

“이번 한 번은 속아 주지.”

흑룡왕이 슬쩍 물러나자 천면수사가 고소를 머금으며 물었다.

“저놈들이 약속을 지키겠소, 련주?”

“지킬 수밖에 없지. 아니, 지키게 될 것이오.”

장일소가 입꼬리를 뒤틀었다.

“명분과 체면에 얽매이는 놈들만큼 가지고 놀기 좋은 이들도 없지. 그건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소.”

“흐음. 련주를 믿겠소.”

만금대부도 입을 열었다.

“하면, 이제 중요한 것은 최대한 빠르게 사패련을 안정화시키는 것이겠군.”

“그렇소.”

“……그럼 우리는 이 길로 돌아가서 문파를 정리하고 새로운 체제를 준비하겠다.”

“그래야겠지.”

“하지만 하나는 걸리는군.”

만금대부가 슬쩍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눈빛이 어둑했다.

“혈교까지 동원했다면, 저곳에서 저들을 모조리 쓸어 버리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터. 게다가 소림과 무당, 남궁이라면 피해를 감수할 가치가 있었을 텐데?”

“가치라…….”

장일소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내가 원하는 것은 전투에서 이기는 게 아니라 전쟁에서 이기는 거지. 내 상대는……. 아니, 우리의 상대는 소림이나 무당 따위가 아니라 중원 전체요.”

“…….”

“사람이 왜 귀신을 두려워하는지 아시오?”

“……상대하기 어렵기 때문이 아닌가?”

“아니.”

장일소가 고개를 저었다.

“귀신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지.”

“…….”

“귀신을 모르는 아이는 귀신을 봐도 두려워하지 않소.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왜 무서운지를 수없이 들은 어른은 귀신을 두려워하는 법이오.”

만금대부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곧 천하의 모두가 나를, 그리고 사패련의 이름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오. 그때부터는 일이 조금 더 쉬워지겠지.”

만금대부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곳에 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저자는 모든 것을 말해 주는 것 같아도, 결국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

“사패련을 만든 것은 좋은 결정이었군.”

“하핫.”

장일소가 작게 웃었다.

“그리 생각한다면 흑귀보라는 이름에 집착하지 마시지요. 나 역시 만인방의 이름을 버릴 테니.”

“……알겠다. 그럼 곧 다시 보지. 의논할 것이 많을 테니까.”

만금대부가 용건은 끝났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러자 흑룡왕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마지막까지 남은 천면수사가 장일소를 보며 끌끌 소리 내어 웃었다.

“고생길이 열렸군, 련주.”

“감수해야겠지.”

“앞으로 잘 부탁하네. 나는 련주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만 알아주게.”

“물론이오.”

“끌끌끌. 재미있겠군. 재미있겠어.”

천면수사가 사특한 미소를 흘리며 멀어졌다. 모두가 멀어지니 이내 장일소의 두 눈에서 참아 왔던 시퍼런 살기가 쏟아졌다.

“……교활한 뱀 새끼들 같으니.”

돌아선 장일소의 뒤에는 어느새 여덟 마리 말이 매인 백색의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마차 뒤편에 조용히 대기하고 있던 호가명이 면포를 들고 장일소를 맞이했다.

“정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방주, 아니……. 련주님.”

“꼴이 말이 아니구나. 이게 뭔 개망신이니. 끄응.”

장일소가 앓는 소리를 내었다. 호가명은 씁쓸히 웃으며 물에 적신 면포를 내밀었다.

“시비들을 데리고 올 걸 그랬나 봅니다.”

“내가 손이 없는 것도 아니고, 됐다.”

면포를 받아 든 장일소가 몸에 묻은 피를 닦아 내었다.

“모든 것이 련주님의 생각대로 되었습니다.”

“이제 시작이지.”

장일소는 대수롭지 않게 답하고는 면포를 몇 번씩이나 갈아 가며 상체를 닦았다. 호가명이 마차 안에서 새하얀 순백의 장포를 꺼내 와 걸쳐 주었다. 단정하게 옷을 정리한 장일소는 망가진 장신구들을 보다 눈살을 찌푸렸다.

“쯧.”

우드득.

망가진 장신구들을 미련 없이 몸에서 죄 뜯어 낸 그는 흘러내린 머리를 뒤로 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저 뱀 같은 놈들이 순순히 나를 따를 리가 없지. 일단 급한 불은 껐으니, 이제부터는 저들이 사패련을 집어삼키려 들 것이다.”

“분명 그리 나올 것입니다.”

“그래. 사파의 습성이 그렇지. 멀리 있는 큰 먹이보다는 당장 눈앞에 있는 콩 하나를 서로 먹겠다고 칼을 뽑는 놈들이 사파니까. 정파 놈들보다 저놈들이 더 문제야.”

만일 장일소가 이곳에서 소림과 무당을 완전히 정리했다면, 그 뒤에 벌어질 일이야 빤하다.

저들은 남은 정파가 아니라 장일소를 적으로 인식할 것이다. 뒤에서 서로 연합해 장일소와 만인방을 없애고 강남을 나눠 먹겠다고 이전투구를 벌여 댔겠지.

이건 수도 없이 반복되어 온 사파의 역사가 증명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젠 그럴 수 없게 되었지 않니.”

장일소가 입꼬리를 요사스레 끌어 올렸다. 얼굴에 사특한 미소가 피어났다.

“사패련은 그 자체로 힘을 가져서는 안 돼. 오직 내가 지배하는 사패련만이 의미를 지녀야 한다. 이 전쟁에서 내가 얻은 것은 그까짓 조약 따위가 아니야. 바로 나 장일소의 이름이 세상으로 퍼져 나가는 거지.”

장일소가 검지로 제 입술을 가만히 훑었다.

“명성이란 한 푼 값어치도 없는 쓸모없는 쓰레기에 불과하지만, 때로는 그 어떤 폭력보다 더 큰 힘이 되기도 하거든.”

그를 바라보는 호가명의 눈에 감탄의 기색이 스쳤다.

장일소는 대체 언제부터 이 그림을 그려 왔던 것일까?

신주오패의 수장들을 끌어모았을 때부터?

아니면 장강으로 화산이 쳐들어왔을 때부터?

그도 아니면 녹림의 난 때?

아니, 아니다.

‘적어도 당가주를 대면했을 때는 이것을 보셨을 것이다.’

그러니 호가명이 화산신룡을 처리하려 들었을 때 막았을 것이다.

한 수 앞을 보는 정도가 아니다. 장일소는 세상을 제 손 위에 올려 두고 농락하는 이다.

“이제 한동안은 지난한 싸움을 벌여야겠지. 저 뱀 같은 놈들의 아가리에 들어 있는 귀물들을 빼내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련주께서는 능히 해내실 것입니다.”

“쯧쯧. 가명아, 가명아. 너는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면이 있다니까. 나는 벌써부터 골치가 아프구나.”

장일소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마차에 올랐다. 호가명도 그를 따라 올라 마차 문을 닫은 뒤 미리 준비한 술을 꺼내 공손히 바쳤다.

“준비해 두었습니다.”

“내가 이래서 너를 좋아한다고 얘기한 적 있던가?”

장일소가 빙긋 웃었다.

“갈 길이야 아직 멀었지만, 오늘은 축배를 들어도 되겠지. 그렇지 않느냐?”

“물론입니다, 련주님.”

“하하하핫!”

장일소가 잔에 술을 따르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음?”

호가명의 고개가 마차의 문 쪽으로 향했다. 뭔가 밖에서 소란이 일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지?’

이미 전투는 끝났을 텐데?

장일소가 눈살을 슬쩍 찌푸리니 호가명이 곧장 말했다.

“제가 나가 보겠…….”

하지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 순간.

콰드드득!

마차의 벽을 뚫고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불쑥 들어왔다.

순간 호가명의 온몸에서 식은땀이 솟았다.

실로 날카로워 그 예기만으로 베일 것 같은 검이, 엉거주춤 일어선 그의 얼굴 반 치 앞에 멈춰 서 있다.

“…….”

이 검이 불과 한 치만 더 들어왔어도 그는 이미 산목숨이 아니었을 것이다.

“쯧.”

마차 벽을 불쑥 뚫고 들어온 검을 막아 낸 장일소는 혀를 찼다.

“저리 성질이 급해서야. 끄응.”

그러더니 한숨을 쉬며 술병 두 개를 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을 열고 마차 밖으로 나서니 만인방의 무사들이 마차를 지키느라 몰려 있었다.그리고 그 건너편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물러나라.”

금방이라도 사내에게 달려들 기세였던 만인방도들이 놀라 장일소를 돌아보았다.

“물러나라고.”

“예!”

만인방도들이 빠르게 좌우로 우르르 물러나 길을 텄다. 마차에서 내려선 장일소가 박혀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이 검은 이별의 선물?”

“가져와. 비싼 거야.”

“쯧. 좋다 말았네.”

장일소가 짐짓 아쉽단 표정으로 손에 든 검을 사내에게 던졌다. 녹색의 수실이 달린, 암향매화검을 받아 든 청명이 검집에 검을 밀어 넣고는 장일소를 응시했다.

장일소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이 마차도 비싼 건데…….”

“섬서로 오면 새로 한 대 사 주지.”

“대신 나는 목을 주고?”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겠어?”

“하하하핫.”

장일소가 이번엔 손에 든 술병을 청명에게 던졌다. 술병을 받아 든 청명이 말없이 입가로 가져가 기울였다.

꿀꺽. 꿀꺽. 꿀꺽.

일말의 망설임 없이 술을 마셔 대는 청명을 보며 장일소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술맛 나는군.”

그러더니 그도 술을 병째로 마시기 시작했다.

호가명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만인방도들이 진을 친 이곳에 냅다 돌진해 장일소가 탄 마차에 검을 날려 대는 청명이나, 그런 청명에게 술을 권하는 장일소나.

그는 도무지 이들의 세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술병을 입에서 뗀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장일소의 입가에 귀기 어린 미소가 걸렸다. 이를 드러낸 그는 사냥감을 위협하는 짐승처럼 나직이 읊조렸다.

“그래…….”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그 목소리에 살기와 적의가 들끓었다.

“기껏 살려 줬더니 다시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뭐지? 죽여 달라고 비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야.”

그러자 청명의 두 눈에 짙은 살심이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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