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3화. 이 전쟁은 내가 이겼다. (3)
장일소가 걸음을 옮겨 멀어지고 나서야 느긋하게 절벽 위로 올라온 흑룡왕이 이죽이며 다가왔다.
“아쉽군.”
“…….”
“여기서 죽여 줬어야 하는 건데 말이야.”
남궁황의 온 얼굴에 힘줄과 핏발이 섰다.
“……너는 반드시 내 손에 죽는다, 흑룡왕.”
“장강을 밟지도 못하게 된 주제에 무슨 수로?”
으드드득.
남궁황의 꽉 물린 이에서 흡사 무언가가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분노와 모멸감을 참지 못해 덜덜 떠는 그를 보며 흑룡왕이 파안대소했다.
“목숨을 구걸하고 간신히 도망이나 가는 주제에 자존심 세우는 꼴이라니! 그래, 하긴 그게 정파 놈들이지. 크하하하하하핫!”
그 말이 끝이었다. 더 노골적인 비난을 늘어놓았다면 차라리 충격이 덜했을 테지만, 흑룡왕은 그 웃음소리만 남겨 놓고 깔끔하게 남궁황을 무시한 채 절벽을 내려갔다.
“흐음.”
만금대부 역시 조롱하는 듯 입가를 비틀더니 허도진인을 응시했다.
“내가 남는 장사를 했군.”
“…….”
그렇게 만금대부마저 몸을 돌리자 천면수사가 혀를 차 댔다.
“쯧쯧. 저리들 각박해서야.”
“……아미타불.”
법계가 창백한 안색으로 나직이 불호를 외자 천면수사가 법계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소림의 무학은 잘 견식 했소, 선사.”
“……하오문주의 무학 역시…… 명불허전이었소이다.”
“다음에 다시 손을 나눌 일이 있기를.”
천면수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넌지시 덧붙였다.
“당신들도 이제는 고생깨나 하게 될 거요. 보시다시피 우리 련주는 아주 감당하기 힘든 사람이거든.”
누구도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패군 장일소.
물론 지금까지도 그를 감히 무시할 사람이 있었겠냐마는, 오늘을 기점으로는 그를 바라보는 천하의 시선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적어도 이 순간 이후로, 그 누구도 감히 장일소가 아닌 다른 자를 사파제일인으로 칭할 수 없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천면수사가 몸을 획 돌렸다.
“돌아간다!”
“예!”
노골적으로 비웃음과 조롱을 남긴 사패련도들은 미련 없이 절벽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남은 자들에게 쥐여진 건 참담함뿐이다.
절벽에 오른 이들은 그제야 저 사패련의 주구들과 제대로 손 한 번 섞어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참한 몰골인 자신들과는 달리, 저들의 옷에는 먼지 한 점 묻지 않았다.
그 사실이 더욱 큰 굴욕감을 떠안겼다.
“……허도.”
입술을 짓깨물며 멀어지는 이들을 노려보던 남궁황이 이내 고개를 돌려 허도진인을 보았다.
그 두 눈에 담긴 원독은 아군을 보는 시선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살벌했다.
“당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고는 있소?”
“…….”
“우린 지금 사파에 목숨을 구걸해 살아난 거요. 아무리 화의니 화친이니 하는 개 같은 소리로 포장해 봐야, 그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 말이오!”
허도진인이 아무 말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일을 어찌 수습할 생각이오! 땅에 떨어진 명예를 어찌 주워 담을 생각이냐고, 이 빌어먹을 작자야!”
분기탱천한 남궁황이 다시 언성을 높이려는 찰나 허도진인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럼 막지 그랬소?”
“뭐라?”
“그럼 막지 그랬냐고 했소.”
“…….”
남궁황이 이를 악물자 허도진인이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끼어들 틈이야 얼마든지 있었겠지. 아니,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소. 당신의 가솔들을 이끌고 누구 하나만 공격했어도, 협상이고 뭐고 다시 전쟁이 벌어졌을 테니까. 그럼 내 묻겠소.”
“…….”
“당신은 정말 그걸 몰라서 잠자코 있었던 거요?”
“이…….”
남궁황의 손이 덜덜 떨렸다. 분노로 머리가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명예라고 했소?”
허도진인의 입가에 명백한 비웃음이 어렸다.
“걱정할 것 없소. 책임은 내가 지게 될 테니까. 당신들이 가열하게 내 욕을 해 댈 테니, 당연히 모든 비난도 내가 받게 되겠지.”
“……아미타불.”
법계가 두 눈을 감고 연신 불호를 외었다. 그 역시 차마 떳떳하게 허도진인을 마주 보지 못했다.
“하지만 명예라니…….”
허도진인이 큭큭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모두 각오하고 저지른 일이지만, 정말이지 그 위선에는 신물이 나는군. 내가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할 때는 뒷짐만 지고 구경하다가 이제 와서 당신들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장문인…….”
“아니, 괜찮소. 그게 강호의 방식이지. 다만…….”
허도진인은 살기가 떨어지는 얼굴로 남궁황과 법계. 그리고 벽현자를 노려보았다.
“내가 당신들에게 사과하는 일은 결코 없을 거요.”
“…….”
“감사 따위는 바라지도 않소. 하지만…… 적어도 수치가 뭔지는 알고 사시오.”
“이익…….”
남궁황의 몸은 이제 떨리는 모양이 사시나무와도 같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차마 허도진인에게 달려들지는 못했다. 그의 말에 그리 틀린 게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미타불.”
조용히 불호를 왼 법계 역시 속으로만 통탄했다.
대체 이 일을 어찌 수습해야 한단 말인가.
이 참담한 일을.
할 말을 끝내고 미련 없이 시선을 뗀 허도진인은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르구나.’
하늘은 매정하게도 푸르렀고, 또 시렸다.
어차피 이 인간들이 이리 나올 것쯤이야 예상하고 있었다.
사과? 그가 왜 사과를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가 이곳의 모두를 살렸거늘. 이들은 그저 적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빌 용기조차 없는 이들일 뿐이다.
그가 나서지 않는다면 모두가 죽었다. 그의 행동이 이곳의 모두를 살렸다.
하지만 이들은 곧 그를 비난하고 모든 잘못을 떠넘기려 들 것이다. 그런데 왜 그가 사과해야 하는가?
‘걸리는 게 하나 있다면…….’
허도진인이 한숨을 쉬려는 바로 그때.
“처, 청명아!”
“아, 안 된다! 일어나면!”
저쪽에서 소란스럽게 들려오는 소리에, 허도진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제 사형제들을 밀치며 몸을 일으키는 화산신룡의 모습이 보였다.
실로 처참한 몰골이다. 화산신룡은 이곳에서 가장 많은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누구보다 더 처절하게 싸웠다.
그가 장일소를 잡고 늘어지지 않았다면 피해는 훨씬 더 늘어났을 것이고, 그들은 화의를 청하기 위해 장일소에게 더 많은 것을 바쳐야 했을 것이다.
허도진인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비켜 봐.”
“처, 청명아! 지금은…….”
“사숙.”
“…….”
“비켜 줘. 부탁한다.”
“…….”
이렇게까지 나오니 백천도 더는 만류하지 못했다. 백천을 지나친 청명이 허도진인을 향해 걸었다. 그가 뿜어내는 살기가 모든 이들을 질리게 만들었다.
피를 뚝뚝 흘리며 걸어오는 청명의 모습에 무당 제자들도 숨을 멈추었다.
“멈춰라.”
“이놈!”
허산자와 허광이 단번에 날아들어 허도진인의 앞에 섰다.
하지만 청명은 그들이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발을 멈추지 않았다. 그저 절뚝이며 허도진인을 향해 다가설 뿐이었다.
“멈추지 못할까!”
“이…….”
“비켜라.”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온 허도진인의 목소리에 허산자와 허광이 놀라 돌아보았다.
“자, 장문인.”
“멀찍이 떨어지거라.”
“……하지만 저자는…….”
그들은 쉽사리 물러설 수 없었다. 지금 청명이 뿜어내는 살기가 진심이라는 것이 너무도 확연히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허도진인은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나를 부끄럽게 만들 셈이냐?”
“…….”
“비키거라. 그리고 관여하지 마라.”
허광이 입술을 짓깨물었다.
하지만 결국엔 장문인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두 사람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허도진인의 뒤쪽에 서선 청명을 내내 경계하듯 바라보았다.
청명은 그 과정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 절뚝거리며 다가와 허도진인의 바로 앞에 섰다.
그 뒤에선 오검이 잔뜩 긴장한 채 독 오른 뱀처럼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유사시에 언제든 앞으로 달려들 수 있도록 말이다.
그 광경을 보며 허도진인이 실소를 머금었다.
‘화산뿐이구나.’
이 절벽 위에서, 의기라는 이름을 논할 수 있는 이들은…….
그때 청명이 입을 뗐다.
“……왜 그랬어?”
“…….”
“왜?”
허도진인은 피식 웃고 말았다.
“글쎄…….”
그리고 텅 비어 버린 눈으로 중얼거렸다.
“왜 그랬을까?”
“이 병신 새끼야!”
퍼어어억!
청명의 주먹이 허도진인의 얼굴에 틀어박혔다. 허도진인이 뒤로 쓰러지듯 넘어가자 청명은 아예 그 위로 올라타 얼굴을 연타했다.
“왜! 왜 그랬어! 왜!”
퍼억! 퍼억!
“또 같은 짓거리를 해 대! 또? 이 개 같은 새끼야!”
청명이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허도진인을 후려쳤다. 무당의 제자들이 기경하며 달려들려 했지만, 바닥에 쓰러진 허도진인이 손을 들어 올리자 그들의 걸음이 강제로 멈춰졌다.
“왜!”
청명이 허도진인의 멱살을 틀어쥐고 끌어당겼다. 그들의 이마가 서로 쾅 소리를 내며 충돌했다.
허도진인은 터진 입술로 피를 흘리며 텅 빈 눈으로 하늘을 보았다.
“나는…….”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저 제자들을 살리고 싶었다.”
“…….”
“그게…… 전부다.”
청명의 몸이 덜덜 경련하고 있었다.
“이……!”
허도진인의 멱살을 한 손으로 움켜잡은 그는 다른 한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주먹에 가공할 기운이 어리기 시작했다.
“머, 멈춰!”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콰아아아아아앙!
커다란 굉음이 터져 나왔다. 청명의 주먹이 허도진인의 얼굴 바로 옆의 땅에 박혀 있었다.
“빌어먹을…….”
허도진인의 멱살을 뿌리치듯 놔 버린 청명은 힘없이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가 몸을 일으킨 뒤에도 허도진인은 그저 멍한 눈으로 하늘만 올려다볼 뿐이었다.
“병신 같은 놈들이…….”
허도진인과 절벽 위에 오른 다른 구파와 오대세가의 제자들을 모두 노려본 청명은 몸을 돌렸다.
그가 휘청이자 백천이 얼른 팔을 잡아 오며 부축했다.
“……돌아가자, 청명아.”
“…….”
“여긴 우리가 있을 곳이 아니다. 장문인께 가자. 화산으로……. 그래, 우리 화산으로 돌아가자.”
백천이 말을 하자 오검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진절머리가 난다는 얼굴로 구파를 보았다. 누구도 그런 오검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들이 제 목숨 챙기기에 급급하였을 때 화산오검은 장일소와 맞서 싸웠다.
그러니 어떻게 감히 오검 앞에서 중과부적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수 있겠는가?
강한 적과 싸우기에 무인이다. 이길 수 없어도 물러서지 않기에 협의다. 이길 수 있을 때만 싸우는 것은 협의도 의기도 아니다. 그건 그저 위압에 불과하다.
‘수도 없이 듣고 배웠건만.’
단순히 아는 것과, 그걸 행하는 것은 다르다.
저들은 맞서 싸웠고, 그들은 맞서 싸우지 못했다.
진현은 황망한 눈으로 하늘만 보다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가자, 청명아.”
백천이 청명을 들어 올리듯 부축했다. 조걸도 그를 도와 반대편에서 청명을 부축했다.
“그래, 청명아……. 돌아가자. 여기에는…… 여기에는 더 있고 싶지가 않다.”
조걸의 읊조림이 절벽 위에 남은 이들의 귀를 파고들었다. 마치 귀에 대고 얘기한 것처럼, 너무도 선명하게.
그때 청명이 입을 열었다.
“사숙.”
“응?”
“내 검……. 내 검을 줘.”
“……왜?”
백천은 불만 섞인 얼굴로 되물었다. 더는 저들과 말을 섞지 말라는 뜻이 명확히 담겨 있었다. 하지만 청명은 그 얼굴을 가만 보다 고개를 저었다.
“아직…….”
청명의 시선은 절벽 아래로 향했다. 그의 눈동자가 더없이 차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았어.”
청명의 턱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절벽 위로 방울져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