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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759화 (757/1,567)

759화. 죽으면 죽었지! (4)

검게 칠한 배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짓누르는 듯 위압적이었다. 배의 가장 앞, 용두에 보이는 포악한 고래의 형상을 보고 나니 더더욱 그러했다.

‘용선.’

장강에 존재하는 열여덟 개 수채의 채주들에게만 허락된다는, 수로채를 상징하는 배.

다시 말하자면 저 배에는 지금 채주가 타고 있다는 뜻이다.

“……한두 척이 아닌데요.”

“수채의 수적은 다 몰려온 것 같은데.”

화산 제자들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한 수채에 수적이 이리도 많았던가?’

물론 저 배에 조금 전 그들이 상대했던 쾌속선처럼 수적들이 꾸역꾸역 들어차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반쯤만 차 있다고 가정해도 수적의 수가 몇 백이 넘어갈 것이다.

“선장님!”

백천이 고개를 획 돌려 선장을 바라보았다.

“물가로 갈 수 있습니까?”

“무, 무립니다.”

선장이 질린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수적선은 원래 일반적인 배보다 빠릅니다. 같은 배라고 해도 짐을 싣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속도 차이가 나는데……. 짐이 잔뜩 실린 이 배로는 도저히 그만큼 속도를 낼 수가 없습니다.”

“음.”

“게다가 조금 전에 받은 공격 때문에 배에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다들 열심히 퍼내고는 있지만, 어설프게 속도를 내다가는 물이 더 빨리 들어차 배가 가라앉습니다. 그럼 정말로 다 죽는 겁니다.”

백천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물가 쪽으로 향했다.

육지가 너무 멀어 아연할 정도다.

‘물가까지 적어도 오 리가 넘는다.’

장강은 원래 그 폭이 오 리에 달하는 어마어마하게 넓은 강이다. 하지만 이곳은 장강의 지류가 동정호로 흘러들어가는 곳. 유속이 느리고 호수와 맞닿아 있는 만큼 강폭이 일반적인 장강 폭의 세 배에 달했다.

강폭만 십오 리, 이 중심부에서 강가까지 최소 오 리 이상을 헤엄쳐야 한다. 화산의 제자들만 있다면 그리 어려울 리 없겠으나, 이 배에 타고 있는 양민들이 그만한 거리를 헤엄쳐 가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가능하다고 해도 수공에 익숙한 수적 놈들이 물속에서 공격해 온다면 막을 방도가 없다.’

양민들을 버리고 간다면 방법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건 화산의 제자가 고려할 만한 길이 아니다.

백천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너무 성급했나?’

강 위에서 수적들을 상대하는 일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 기껏해야 배 한 척 정도만 상대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건만, 설마 수채의 인원 전체가 배를 타고 나올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사숙.”

어찌 하냐는 부름이다. 백천은 입술을 잠깐 짓씹으며 머리를 굴렸다. 눈빛이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놈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할 것도 없다.

- 아니, 쪽수가 많건 적건 그게 무슨 상관이야! 저런 새끼들은 대가리를 까 버리면 아무것도 못 해. 다른 놈들 신경 쓰지 말고 일직선으로 달려서 두목 놈부터 조지라고!

‘오냐! 알았다!’

백천이 단호하게 말했다.

“내 말 잘 들어라.”

“예, 사숙.”

“용선이 접근하면 건너간다. 백상이와 소소가 여기 남아서 양민들을 보호하고 나머지는 일거에 용선에 들이쳐 채주를 잡는다.”

“예, 알겠습니다.”

지금껏 당황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던 화산 제자들의 얼굴에 언제 그랬냐는 듯 비장한 기운이 어렸다.

용선의 크기가 거대한 만큼, 그 안에 타고 있는 수적의 수도 많을 것이다. 그런 용선 위로 뛰어올라 채주를 노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일지 짐작 못 할 이들이 아니다.

하지만 명령이 떨어진 이상 망설임은 없다.

“그럼 준비를……. 어?”

그때 조걸이 고개를 갸웃했다.

“사숙.”

“응?”

“저 새끼들 갑자기 속도를 줄이는데요?”

“…….”

“저러다 서겠는데?”

화산의 제자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멈춰 선 배들을 보았다.

“푸아아앗!”

물속에서 솟아오른 방충이 용선에서 내려온 줄사다리를 움켜잡았다.

“끄응. 이게 무슨 꼴이냐.”

이를 뿌득뿌득 갈아붙이며 줄사다리를 오르니 그의 뒤로 자맥질해 온 부하들이 줄줄이 따랐다.

“크흠.”

갑판에 내려선 방충은 얼굴의 물기를 닦아 내고는 크게 심호흡했다. 좌우로 도열해 있는 수적들과 갑판 중앙에 설치된 거대한 목제 의자가 보였다. 두말할 틈도 없이 의자 앞으로 달려간 그는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주, 죽여 주십시오, 채주님!”

“죽여 달라?”

푸른빛 피풍의로 전신을 두른 중년의 사내가 갑판에 이마를 박고 엎드린 방충을 보며 옅은 비웃음을 흘렸다.

“그래야지. 장강의 호걸이라는 놈이 배를 잃고 자존심도 없이 도망쳐 왔으니, 당연히 죽어야지.”

“채, 채주…….”

“조승(曺昇).”

“예! 채주님!”

“토막 내 물고기 밥으로 던져 줘라.”

방충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채, 채주님!”

“그 주둥아리를 한 번만 더 열면 내가 직접 찢어 주겠다.”

실로 살벌한 기세에 방충은 차마 변명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질린 얼굴로 식은땀만 줄줄 흘려 댔다.

“채주님.”

그때 조승이라 불린 자가 나직하게 입을 연다.

“방 조장이 추한 꼴을 보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상황을 보아 방 조장만 탓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유는?”

“저만한 쾌속선을 일격에 격침시키는 이가 있습니다. 무슨 수를 쓰든 같은 결과를 피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흐음.”

대경채의 채주, 잔포흑어(殘暴黑魚) 여광계(呂光啓)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불가항력이라.”

하지만 잔포흑어는 이내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다.

“그렇다 한들 배를 잃고 돌아온 죄는 크다. 조원으로 강등시키고, 보름 동안 묶어서 가둬라. 물 한 모금 주지 말고.”

“예!”

“가, 감사합니다, 채주님!”

방충은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듯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쾌속선을 일격에 침몰시킬 정도의 권력이라……. 장강에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그런 놈들이 왔단 말인가?”

“화, 화산이라 했습니다.”

방충의 대답에 잔포흑어의 두 눈이 이채를 띠었다.

“화산?”

“예! 권을 날린 것은 웬 중놈이었지만, 제 입으로 화산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화산이라…….”

잔포흑어가 슬쩍 고개를 돌려 조승을 바라보았다.

“특표 때문인 것 같습니다. 화산이 은하표행의 뒤에 있다는 것이야 유명한 사실이니까요.”

“흐음. 그래?”

조승이 방충을 보며 물었다.

“어린놈들이었느냐?”

“예! 아직 어린놈들이었습니다. 수는 일곱입니다.”

기가 막힌 대답에 잔포흑어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겨우 일곱 놈에게 배를 잃고 도망쳤단 말이냐! 이 피라미 새끼 같은 놈이!”

“히이이익!”

이번에도 조승이 재빨리 나서서 잔포흑어를 진정시켰다.

“화산에서 온 어린놈들이라면 화산오검일 확률이 높습니다.”

“……화산오검?”

“예. 무당과의 비무에서 무당의 일대제자들을 연파했다는 화산오검이라면 쉽게 볼 상대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무당의 장로를 꺾은 화산신룡이 저 배에 있다면 방 조장이 상대할 수 있었을 리 없습니다.”

“끄응.”

잔포흑어는 못마땅하게 방충을 노려보다 건너편에 떠 있는 상선을 바라보았다.

“화산오검이라면 요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려오는 그놈들이겠지?”

“예, 채주님.”

“흐음.”

잔포흑어의 두 눈이 일렁였다.

“제법 명성이 있는 놈들이렷다. 그리고 그 명성을 얻을 만한 실력도 있을 것이고, 배에 올라 우리를 상대하려 한 것을 보면 자신감도 가득하겠지.”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세상사는 마음먹은 대로만 되는 게 아니지. 감히 강 위에서 우리를 상대한 대가를 치르게 해 주어야겠다. 끌고 가자.”

“예! 분부대로!”

갑판 위의 수적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포흑어는 의자의 손잡이를 가만히 움켜잡으며 중얼거렸다.

“화산이라…….”

비릿한 미소가 만면에 퍼졌다.

“안 오는데요?”

“뭐 하는 거지?”

화산의 제자들은 조금 맥이 빠진 얼굴로 용선을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들이받을 듯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더니 정작 거리를 두고 멈춘 채 움직이질 않으니 그럴 만도 했다.

“겁먹은 거 아닐까요?”

“겁?”

“예. 이제 우리도 나름 명성이 있잖습니까? 저들이 잘나 봐야 수적인데, 어딜 감히 화산오검에게! 하하핫!”

“걸아.”

“예?”

“주둥아리 좀 닫으라고 하지 않느냐.”

“…….”

짜증 어린 눈으로 조걸을 차분히 노려본 윤종이 다시 용선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때였다.

“움직인다!”

“……그런데 이쪽으로 오는 것 같지는 않은데?”

용선은 제자리에서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저게 되나?”

“노가 있잖습니까. 양측의 노를 반대 방향으로 저으면 가능합니다.”

느릿하게 회전한 용선은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돌아섰다. 화산의 제자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가려는 건가?”

“그러게요. 왜 돌아서는…….”

그때였다.

드르르륵!

용선의 뒷부분에 설치된 문이 열리더니 무언가 시커먼 것이 튀어나왔다.

“아까 쐈던 그건가?”

“아니야!”

또 같은 공격이 반복될 거라 생각했던 화산의 제자들이 순간 눈을 부릅뜬다.

이번에도 작살인 건 맞지만 그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쾌속선이 쏘아 댄 작살의 두 배는 족히 될 법한 크기에 속도도 굉장했다.

“사슬?”

그리고 작살에 아예 기다란 사슬이 달려 있었다.

콰가가각!

콰광!

발사된 두 개의 작살이 배에 틀어박혔다. 그 충격에 배가 거대한 파도라도 만난 것처럼 크게 휘청거렸다.

드르르르륵!

작살에 연결된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이 새끼들이!”

“뭐 하는 거지?”

“설마…….”

그리고 그 순간 멈춰 섰던 용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이이잉!

사슬끼리 마찰하는 소리는 마치 거대한 고래가 우는 소리처럼 들렸다. 용선이 속도를 내니 그들이 탄 상선도 강제로 용선이 가는 방향으로 기우뚱 기울었다.

“뭐, 뭐야!”

“빌어먹을, 끌려간다!”

오검들의 두 눈에 당혹감이 어렸다.

이런 건 상상조차 해 보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용선 주변의 쾌속선들이 슬금슬금 이쪽으로 다가오더니 상선을 호위라도 하듯 둘러싸기 시작했다. 개미 새끼 한 마리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이 와중에도 경공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거리를 철저하게 유지하는 쾌속선들을 보니 용의주도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어디로 끌고 가는 거지?”

“어디긴 어딥니까! 당연히 저놈들 소굴이겠죠!”

조걸이 이를 악물었다.

배 위에서 저들을 상대하는 건 힘든 일이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나름의 이점이 있다. 한 배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의 수는 한정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이대로 뭍으로 끌려가게 된다면 저 많은 수적들을 오롯이 일곱 명이서 감당해야 한다.

‘그게 되면 이 고생도 안 했지!’

“끌려가면 끝장이야!”

“어떻게 하죠?”

“어떡하기는 뭘 어떡합니까?”

조걸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처음 계획이랑 달라진 것도 없잖아요! 어서 오라고 친절하게 길도 놔 주는데 목을 따 드려야지! 먼저 갑니다!”

“걸아!”

“야, 이 새끼야! 멈춰!”

조걸은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 난간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탁!

그러더니 배와 배를 연결한 사슬을 밟으며 가공할 속도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답답했는데 다리까지 놔 주시다니! 친절도 하셔라!”

한 손에 매화검을 든 조걸이 눈을 빛내며 섬전처럼 달리던 바로 그때였다.

용선 밖으로 한 사람이 고개를 내밀더니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용선과 주변의 쾌속선 위로 시위를 먹인 궁수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조걸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어?”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쏴라!”

쉬이이이잉! 쉬잉! 쉬이이이잉!

시위를 떠난 화살들이 일제히 솟아오르며 하늘을 시커멓게 물들였다.

“와……. 장관이네.”

그리고 마치 검은 비처럼 조걸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대지 말걸.”

원래 후회는 아무리 빨리 해도 늦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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