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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720화 (718/1,567)

720화. 여기 있었구나. (4)

뱀처럼 요사스런 눈이 주변을 느릿하게 훑었다. 그 눈을 마주한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바스락.

붉은 당화(唐靴)가 자라난 풀을 내리밟았다. 풀들이 으스러지고 짓이겨지는 소리가 울렸다.

“이런, 이런.”

고개를 가볍게 내저은 장일소는 한숨을 쉬었다.

짤그랑.

그가 느긋하게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에 주렁주렁 달린 장신구들이 서로 부딪히며 맑은 금속음을 냈다. 새하얀 장포에 새겨진 황금 용이 마치 살아 있는 듯 요동쳤다.

실로 난데없는 등장이었으나, 그가 나타난 순간부터 이곳의 누구 하나도 장일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마치 공간 자체를 장일소가 빨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만인방의 무리들은 물론이고, 오검들조차 홀린 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이 가득한 저잣거리 한복판에 범이 나타나 느긋하게 걷고 있는 듯했다.

“흐음.”

나지막이 한숨을 쉰 장일소는 꿈틀대며 피를 토하고 있는 혈의인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연신 기침을 해 대는 혈의인을 코앞에서 내려다보다 가만히 쪼그려 앉았다.

“괜찮니?”

“후, 쿨럭! 저, 저는…….”

“미안하게 됐다. 내가 마음이 급해서 말이야.”

장일소가 혈의인의 등을 손으로 가볍게 톡톡 쳤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하던 혈의인의 안색이 확연히 나아졌다.

“쿨럭! 쿨럭!”

“자아, 피 한 번 더 토하고.”

“우웨에에에엑!”

시뻘건 선지피를 한껏 토해 낸 혈의인이 고개를 돌려 장일소를 바라보았다.

“가, 감사합니다, 방주.”

“별말을 다하는구나. 내가 한 일이니 당연히 내가 수습해야지. 미안하구나.”

“괘념치 마십시오! 방주께서 주신 목숨, 방주께서 거둬 가신다 한들 어찌 원망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해해 주어 고맙다. 내 너를 기억하마.”

“여, 영광입니다.”

장일소는 감읍하여 몸 둘 바를 모르는 혈의인의 어깨를 두드리고 빙그레 웃어 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과정을 지켜본 백천은 지독한 위화감을 느껴야 했다.

저 혈의인을 공격한 건 바로 저 장일소다.

상식대로라면 저 혈의인은 난데없이 자신을 공격한 장일소에게 적개심 혹은 배신감, 하다못해 혼란이라도 느껴야 온당하다. 하지만 지금 저자는 마치 장일소가 평생의 은인이라도 되는 양 굴었다.

대놓고 병을 주고 약을 주었건만, 병을 준 건 까맣게 잊어버리고 어설프게 챙겨 준 약을 신줏단지 모시듯 하고 있지 않은가?

‘저자는 대체…….’

직접 보았음에도 이해할 수 있는 구석이 거의 없었다.

허리를 세운 장일소의 시선이 입술을 깨물고 있는 호가명에게로 향했다.

“가명아.”

“……방주.”

“쯧.”

장일소가 살짝 언짢은 얼굴로 혀를 차더니 나무라듯 말했다.

“너에게 내 허락 없이 병력을 부릴 수 있는 권한을 준 이유가 무엇이었겠느냐?”

“저는…….”

“굳이 번거로운 절차가 없어도, 네가 내 뜻을 짐작하리라 여겼기 때문이야. 그렇지 않니?”

질끈 입술을 깨문 호가명이 고개를 숙였다. 장일소는 조금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내 의도를 가장 잘 알 놈이 이런 짓을 벌이다니. 가명아, 가명아. 왜 이리 어리석게 구느냐. 왜 이랬어, 응?”

호가명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방주, 저는…….”

“됐다.”

하지만 말을 듣기도 전에 장일소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뭐든 이유가 있었겠지. 굳이 묻지 않으마.”

“…….”

“그건 나중에 천천히 듣고.”

앞으로 휘적휘적 걸어 나온 장일소가 오검의 앞에 섰다.

“실례했네. 이 친구가 의욕이 조금 과해서 말이야. 때때로 시키지도 않은 짓을 벌이고는 하지. 아랫사람의 잘못은 윗사람의 책임이니 탓하려면 나를 탓하게.”

청명은 장일소를 정면으로 차게 응시했다.

차분한 장일소의 시선과 얼음장 같은 청명의 시선이 허공에서 서로 얽혀 들었다.

그리고 시선을 먼저 돌린 건 장일소였다.

“어휴, 눈빛으로 사람 잡아먹겠어. 보면 알겠지만, 나는 조금 심약한 사람이니 눈에 힘을 좀 빼 주면 좋겠어. 안 그러면…….”

장일소의 입가에 화사한 미소가 그려졌다.

“뽑아 버리고 싶어지니까. 응?”

“이 새끼…….”

청명이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쯤 되면 악연이라는 말로도 모자란, 지독하기 그지없는 인연이다.

이를 갈아붙이는 그를 보며 장일소는 낄낄 웃었다.

“하나 묻자.”

“뭘.”

“그 어깨에 짊어진 것은 뭐지? 꽤 소중해 보이는데.”

청명의 고개가 슬쩍 돌아간다. 청진의 유해를 싼 옷가지를 두 눈에 담은 그는 담담히 대답했다.

“화산의 혼.”

의아한 듯 되물은 장일소는 웃음을 참는 듯 이죽거렸다.

“혼?”

“…….”

“혼이라……. 혼! 혼! 하하하핫.”

작게 키득대며 웃던 장일소의 웃음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핫! 아하하하하하하하핫! 그래! 그게 화산의 혼이라 이 말이지? 하하하하하하하핫!”

몸을 뒤로 젖히고 커다랗게 웃어 대니 장신구들이 요란하게 짤랑거리며 흡사 음악처럼 웃음소리와 뒤섞였다.

백천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빌어먹을.’

그동안 수많은 적을 상대로 싸워 왔다. 그중에는 그들이 감당하지 못할 적도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그 어떤 절망 앞에서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다. 저 주교를 상대로 싸울 때조차, 지금처럼 독에 갇힌 쥐 같은 심정으로 상대의 행동 하나하나에 목덜미가 서늘하지는 않았다.

무위의 정도를 떠나서 장일소라는 인간은 확실히 이해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독 안에 든 쥐라.’

저 혈의인과 회의인들은 분명 만인방의 최정예들일 터. 저들만으로도 버거운데 이곳에 패군 장일소마저 등장했다.

이겨 낸다?

아니,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다.

아무리 청명이라 해도 장일소 하나 상대하는 것도 버거울 것이다. 청명이 발이 묶이면 그들만으로는 저 많은 만인방의 정예들을 감당할 수 없다. 순식간에 쓸려 나갈 게 분명하다.

그리되면 결국엔 청명이 홀로 장일소와 이들을 모두 상대해야 한다. 필패(必敗)를 의미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백천은 광소를 터뜨리는 장일소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작게 속삭였다.

“청명아.”

“음?”

“싸움이 시작되면 내가 뛰쳐나갈 테니, 너는 달아나라.”

청명이 멍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뭐래?”

“농담이 아니다. 너는 살아야 한다.”

백천이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반드시 살아서 화산에 돌아가라. 그리고 이 비급을 전달해야 된다.”

청명은 그런 그를 잠깐 멍하니 보다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동룡이 진짜로 많이 컸네.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농담 아니라고, 이 새끼야.”

“어. 나도 농담 아냐.”

“…….”

청명의 입가가 차게 말려 올라갔다.

“특히나 지금은.”

“넌 왜 미련스럽게……!”

“그래서야.”

“…….”

“너무 재면 후회하더라고. 그리고…….”

청명이 차가운 눈으로 백천을 바라본다.

“착각하지 마. 죽겠다는 거 아니니까. 아무도 안 죽어.”

“…….”

“죽는 건 저쪽이지.”

청명이 장일소와 만인방의 방도들을 노려보았다.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어. 막으면 뚫고 나간다. 그것뿐이야.”

청명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이설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청명의 옆을 채웠다.

“누구든.”

“그래, 누구든.”

조걸과 윤종도 검을 뽑으며 그들의 좌우로 섰다.

“만인방이야 뭐, 익숙하니까.”

“길 정도는 열 수 있습니다.”

당소소가 품 안으로 손을 넣으며 청명의 뒤로 바짝 붙었다.

“독 쓸게요. 하독한 쪽으로는 접근하지 마세요.”

그녀의 눈에서도 서릿발 같은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백천은 저보다 먼저 앞서는 사제들을 보며 입술을 짓깨물었다.

지금 상황이 더없이 절망적이라는 것은 이들도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 한 사람도 우는소리를 하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멍청한 놈들이.’

스르르릉.

이내 마음을 굳게 다잡은 백천이 단호하게 검을 뽑아 들었다.

“비켜.”

유이설과 윤종의 사이를 밀치고 들어간 그는 가장 앞에 서서 전방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의 몸에서 사나운 기세가 쏟아져 나오자 만인방도들 역시 병기를 겨누며 호응하듯 기세를 뿜어낸다. 금방이라도 달려들듯 짐승 같은 기세를 말이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때.

“하하하하하핫!”

웃는 낯을 감추려는 것처럼 얼굴을 한 손으로 감싼 장일소가 한참을 웃다 다른 팔을 쫙 펼쳤다.

그 동작 하나에 만인방도들의 기세는 씻은 듯이 말끔히 사라진다.

“길을 열어라.”

장일소의 명령에 만인방도들의 시선엔 의문과 당혹감이 어렸다. 그러나 장일소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을 때 그 의혹은 모두 빠르게 사라졌다.

“두 번 말하게 할 셈이냐?”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만인방도들이 불에 덴 것처럼 분분히 물러나며 좌우로 길을 열어 냈다.

“바, 방주!”

호가명이 신음하듯 외쳤지만 장일소는 반응조차 해 주지 않았다. 얼굴을 가린 손 아래로 드러난 그의 입이 살짝 벌어지며 새하얀 이가 드러났다.

우두머리 늑대가 웃는다면 저런 모습일 것이다.

“잊지 마라. 화산신룡.”

“…….”

반지가 주렁주렁 달린 손가락 사이로 드러난 눈이 새파란 광기를 내뿜었다.

“내게 한 번 빚진 거다. 계산은 확실해야지.”

청명은 날카로운 눈으로 장일소를 쏘아보았다.

“제멋대로군.”

“이래 봬도 셈은 정확한 편이지.”

촤악!

청명이 검을 한 번 떨쳐 냈다.

그리고 아래로 늘어뜨렸던 검을 살짝 들어 천천히 검집 안으로 날을 숨기기 시작했다.

스르르릉.

“사기꾼 놈과는 거래하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탁!

검이 검집 안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청명은 장일소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만이다.”

“이거 감사하군.”

청명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가자.”

오검은 당혹감 어린 눈으로 그런 청명을 보았다. 장일소의 말을 믿어도 될지 의심하는 눈이었다.

그도 그럴 게, 그들이 진영을 풀고 저들이 열어 놓은 길을 지날 때 습격이라도 당한다면 상황이 지금보다도 더 나빠질 테니까.

“그 정도로 얼간이는 아니야. 가자.”

하지만 청명은 태연하게 앞장서서 걸었다.

“어…….”

결국 오검도 검을 밀어 넣고 다급하게 그의 뒤를 따랐다.

장일소를 향해 가는 청명의 걸음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차가운 청명의 눈과 무엇이 담겨 있는지 알 수 없는 장일소의 짙은 눈이 허공에서 마주치며 얽혔다.

두 사람의 어깨가 서로 스치며 교차하는 순간 청명이 나직하게 말했다.

“빚 한 번.”

“…….”

“확실하게 기억했다.”

그 말을 끝으로, 청명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만인방도들의 사이로 걸었다. 적개심 가득한 눈빛이 쏟아졌지만 눈길조차 주는 법이 없었다.

그 뒤를 고슴도치처럼 경계심을 끌어 올린 화산의 제자들이 뒤따랐다.

이윽고 만인방의 포위를 완전히 빠져나온 백천은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흘러내린 땀이 턱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검 한 번 휘두르지 않았지만, 전신의 기력이 모조리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모두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안 쫓아오는데요?”

“……진짜 이렇게 보내 준다고?”

“무슨 생각이지, 저놈은?”

그리고 조금 전 일어난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청명아.”

“……우선은…….”

하지만 백천이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청명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유골을 싼 옷을 꽉 쥐었다.

“화산으로.”

“……알았다.”

걸음을 재촉하기 직전, 청명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이쪽을 응시하는 만인방도들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입술을 질끈 깨물며 시선을 끊은 청명은 앞으로 빠르게 달려 나갔다.

‘패군 장일소.’

그 이름을 화인처럼 새겨 넣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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