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9화. 여기 있었구나. (3)
햇살이 너무 따가워서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반쯤 감았던 눈을 천천히 다시 크게 떴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던 오검의 모습이 보였다.
“…….”
청명은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궁금한 것이 많을 텐데도 그들 중 청명에게 뭐라도 물어보는 이가 없었다.
누군가는 굳은 얼굴로, 또 누군가는 편안한 미소로 그를 맞이할 뿐이었다.
“일단…….”
“화산으로 돌아간다.”
백천이 청명의 말을 잘랐다.
“마을에 있는 녀석은 어떻게 할 테냐? 내 생각에는 지금 데리고 가면 괜히 짐만 될 것 같은데.”
백천의 말에 청명 대신 조걸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뭐 대충 경고해 뒀으니 큰 문제는 없지 않을까요? 또 사고 치면 다시 잡아다 흠씬 패 버리면 되니까.”
“……이만한 일을 겪고도 또 사고를 칠 수 있으면 대단한 사람이지. 그때부터는 인정한다.”
“그렇죠?”
윤종의 말에 조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이제 그들에게는 딱히 대단치 않은 일이다. 금검부와 싸운다거나 철모방과 생사의 격전을 치른다거나, 생각지도 않았던 만인방 놈들과 조우해서 목을 따 버린다거나…….
어…….
돌이켜보니 이거 보통 일이 아닌데?
‘아무튼.’
그들에게는 큰일이 아닐지 모르지만, 평범한 무인들에게는 평생 한 번 겪을까 말까 한 어마어마한 사건들이다. 그런 일을 연이어 겪고도 아직 사기 칠 궁리를 할 만큼 배짱이 있으면 그건 그것대로 인정해 줘야 한다.
“우선은 돌아가요. 그런 데 신경 쓸 상황은 아닌 것 같아요.”
당소소도 찬동하고 나서자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낭비 하지 말고 바로 출발하자.”
일사불란하게 의견을 맞추고 대화하는 사형제들을, 청명은 말없이 바라보았다.
묻고 싶은 것이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청명이 입을 떼기 전에 먼저 말을 돌려 버린 건,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함이리라.
꾸욱.
청진의 유해가 담긴 옷가지를 움켜쥔 청명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빌어먹게 한심했구나, 나도.’
그저 강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사형제로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해도, 어쨌든 그들이 이길 수 없는 이를 대신 이겨 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얼마나 멍청한 생각이었는지, 새파랗게 어린 이들을 보며 실감하게 되었다.
“돌아가자, 청명아. 장문인께 보고드려야지.”
백천의 말에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다.
이 녀석은 이 적막한 곳에 너무 오래 홀로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화산으로 데리고 가서 쉬게 해 주어야 한다.
“그래. 사숙, 출발…….”
그때 청명이 돌연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날카로워진 시선이 백천의 뒤쪽에 펼쳐진 수풀에 꽂혔다. 차게 굳다 못해 살기까지 어린 청명의 얼굴을 본 백천이 흠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유이설이 검의 손잡이를 콱 움켜잡았다. 나머지 제자들도 그제야 주위를 포위한 이들의 존재를 알아채고 재빨리 경계 태세를 취했다.
“누구냐?”
백천의 호령이 떨어졌다.
“나와라!”
차가운 그 목소리에 수풀이 가볍게 흔들렸다.
사그락. 사그락.
풀 밟히는 소리가 위협적으로 잠시간 울렸고, 이내 핏빛 무복을 입은 무리와 잿빛 무복을 입은 무리가 좌우에서 화산의 제자들을 포위하듯 모습을 드러냈다.
“…….”
백천의 입매가 굳어졌다.
‘녹록하지 않다.’
딱히 위협하려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나 그럼에도 전신의 털이 곤두섰다. 머리가 생각을 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저들의 강함을 알아채어 쉴 새 없이 경고해 대는 것이었다.
“사형.”
“……안다.”
웬만해서는 먼저 입을 열지 않는 유이설마저 백천을 불렀다. 그녀도 이들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알아챈 게 분명했다.
“간격을 좁혀.”
백천의 나직한 명에 조걸과 윤종이 살짝 긴장 섞인 얼굴로 모여들었다.
당소소 역시 자연스레 백천의 등 뒤로 위치를 바꾸어 섰다. 안전한 곳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그녀가 가장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로 간 것이다. 수많은 격전을 겪어 왔기에,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다.
백천은 나직이 말했다.
“좋은 뜻으로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정체를 밝힌 용기는 없나 보지.”
“정체라……. 딱히 어렵지는 않지요.”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백천의 시선이 천천히 돌아갔다.
혈의인들과 회의인들의 경계가 되는 곳에서 한 사내가 천천히 수풀을 헤치며 걸어 나왔다.
그자의 모습을 확인한 백천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저자는…….’
구면이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백천이 살며 보아 온 이들 중 가장 강렬한 축에 속했던 인물의 곁을 지키던 이니까.
“……만인방?”
“오랜만이라는 말도 무색하군. 잘 지내셨소이까, 화산파 분들?”
문사복을 입고 단정히 머리를 넘긴 사내.
만인방의 군사인 호가명이 화산파의 제자들을 보며 공손히 포권 했다.
“만인방의 호가명이외다.”
“……화산의 백천이오.”
백천이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답하자 호가명은 공수한 손을 풀고 좌우로 가볍게 벌렸다. 여유 있는 몸짓이었다.
“이리 다시 뵙게 되어서 더없이 반갑단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소이다.”
“……무슨 일이시오?”
“무슨 일이라…….”
호가명이 가볍게 웃고는 허리춤에 꽂혀 있던 곰방대를 꺼내었다. 느긋하게 담배쌈지를 꺼내 곰방대를 채우더니 손끝을 비벼 불을 붙였다.
뻐끔.
몇 번 곰방대를 빨자 이내 그의 입에서 부연 연기가 새어 나왔다.
“진정 몰라서 물으시오?”
“…….”
“듣자 하니 화산 분들께서 굳이 저 먼 남창까지 가서, 못난 우리 방도의 목을 친절히 베어 주셨다 하던데…….”
백천이 슬쩍 입술을 깨문다. 저 말이 입에서 나온 이상 이 상황을 좋게 푸는 건 다 그른 일이었다.
호가명은 빙그레 웃었다.
“뭐, 그럴 수도 있지요. 사람이 일을 하다 보면 서로 다툼이 생길 수도 있고, 그렇게 싸우다 보면 서로 죽일 수도 있지요. 이 호가명, 그런 것도 이해 못 할 소인배는 아닙니다. 다만…….”
그는 뿌연 연기를 훅 불어 내고는 긴 곰방대를 제 어깨에 걸쳤다.
“그래도 한솥밥을 먹던 놈들이 비명에 죽었는데, 그 일을 저지른 당사자들이 다른 곳도 아니고 내 앞마당과 같은 곳을 기웃대고 있다면, 최소한 찾아와 얼굴이라도 비추는 게 사람 사는 도리 아니겠소?”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이보시오, 도사 양반들.”
호가명의 시선이 화산의 제자들을 느리게 훑었다. 그 시선을 마주한 이들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우리는 그대들에게 손가락질당하는 사파인이란 말이오. 우리는 협의도 모르고, 도의도 모르오. 그런 이들이 그래도 한 이름 아래서 부닥뜨리며 살려면 딱 한 가지는 필요하지. 그게 뭔지 아시오?”
“……모르오.”
“원칙.”
그 원칙이라는 말이 기이한 울림으로 오검의 귀를 파고들었다.
“말을 들어 처먹지 않는 난봉꾼 같은 놈들을 하나로 엮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원칙이 필요한 법이외다. 내 말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지요?”
“……그 원칙이 뭡니까?”
“그야 무척 간단합니다.”
호가명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말려 올라갔다.
“이에는 이빨로, 피에는 피로.”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방을 에워싼 회의인들과 혈의인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뽑아 들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만큼 날카롭게 갈린 세검(細劍)과 톱을 연상케 하는 거친 날의 거치도(鋸齒刀)를 보며 화산의 제자들은 검 손잡이를 꽉 움켜잡았다.
“후우우우.”
길게 담배 연기를 뿜어낸 호가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방주께서 천우맹의 개파를 축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어 무척이나 유감이외다. 하지만…… 도사님들.”
호가명의 표정에서 돌연 미소가 씻은 듯 사라졌다.
“만인방도를 둘이나 죽여 놓고 뻔뻔스레 우리의 영역으로 들어와 산을 헤집고 다니는 건 도를 넘었다고 생각지 않소?”
“…….”
“그대들을 몸성히 돌려보낸다면 만인방은 천하의 비웃음을 사게 되겠지. 미안하지만 우리는 죽으면 죽었지, 비웃음거리가 되는 건 참을 수 없는 이들이외다.”
백천은 갑갑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만인방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하지만 설마 이 시골, 그것도 이 정도 되는 산속까지 병력을 이끌고 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내 실책이다.’
화산의 위상이 과거와 달라졌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예전에 무시받던 시절처럼 생각하고 움직이다 보니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쪽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소.”
“사정은 누구에게나 있지.”
“말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오?”
“굳이 대답이 필요하지 않은 질문 같군.”
호가명에게 백천이 막 한마디를 더 하려는 찰나였다.
저벅.
지금껏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청명이 말없이 앞으로 나섰다.
“오, 이거 화산신…….”
반갑게 청명을 부르려던 호가명은 불현듯 입을 닫았다. 청명의 시선을 마주한 순간, 빙굴에라도 떨어진 듯한 오싹한 한기가 전신을 휘감은 것이다.
‘……뭐지.’
그 역시 만인방의 군사 자리에 오르기까지 수도 없는 지옥도를 거쳐 왔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 지금 이 순간 영혼이 얼어붙는 듯한 이 감각에 전율하고 말았다.
스르릉.
앞으로 나선 청명은 말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지금 나는…….”
“…….”
“농지거리할 기분이 아니야.”
호가명은 잠깐 말을 잃고 말았다. 그만큼 기가 막혔다.
‘정녕 같은 사람인가?’
물론 일전에 화산에 방문했을 때도 청명이 마냥 유쾌했던 것은 아니다. 심지어 방주인 패군과 마주했을 때 그가 보였던 기세는 호가명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지금의 청명은 그때와는 또 다른 사람 같았다.
그저 뽑아 들기만 했을 뿐인데도 저 칼날이 이미 전신을 난자해 오는 것만 같았다. 결국 참다 못한 호가명은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짝 물러서고 말았다.
‘대체 어디서 저런 놈이…….’
“기분 같아서는 다 죽여 버리고 싶지만…… 지금은 너희와 놀아 줄 시간이 없다. 조용히 물러나라. 물러나는 이는 베지 않는다.”
나직한 목소리로 경고한 청명이 어두운 눈으로 모두를 훑었다.
“아니면 죽는다.”
그 위협에 호가명의 얼굴에도 노골적인 살의가 어렸다.
청명의 진면목을 본 이상,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죽여야 한다.
방주께서는 저자를 필요로 하시지만, 호가명의 생각은 달랐다. 호랑이 새끼를 키우는 이들은 누구나 자신이 호랑이를 통제할 수 있으리라 여긴다.
그 호랑이 새끼가 진짜 범이 되어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아 넣는 순간에야 세상에는 의욕만으로는 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 걸 절실히 실감하게 되는 법이다.
패군이 평범한 이는 아니지만, 저놈도 범상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호가명은 더 큰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지금 당장의 위협을 좌시할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본디 청명만은 살려 보낼 생각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계획이 반대로 바뀌었다. 다른 놈들은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저자만은 반드시! 무슨 희생을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이 자리에서 죽여야 한다.
툭.
곰방대 안에서 타오르던 담뱃불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호가명의 입에서 커다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죽여라! 저놈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 말을 신호로,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이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대비해!”
청명의 짧은 외침에 화산의 제자들이 당소소를 둘러싸며 둥글게 포진했다.
흔한 기합 하나 없이 섬전처럼 달려든 혈의인은 보기만 해도 섬뜩한 세검 끝에서 핏빛의 강기를 내뿜었다.
‘강기?’
청명의 얼굴이 싸늘히 굳었다.
하지만 그때.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그의 앞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비호처럼 달려들던 혈의인은 이내 피떡이 되어 뒤로 튕겨 나갔다.
“…….”
막 검을 휘두르려던 청명은 굳은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화산의 제자들 역시 영문을 모르고 청명이 바라본 곳을 응시했다.
“쯧쯧……. 뭔 짓거리를 하나 했더니.”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눈에는 익지만 결코 익숙해질 것 같진 않은 복장의 사내가 수풀을 헤치며 여유 있게 걸어 나왔다.
“가명아, 가명아. 내가 이러지 말라고 했잖니. 쯧쯧쯧.”
패군 장일소.
순간 청명의 두 눈에 새파란 살기가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