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674화 (672/1,567)

674화. 여기에 모두가 있다. (4)

“이 험하디험한 화산의 정상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화산 아래에서 개파를 해도 되었을 것을, 제가 생각이 짧았던 모양입니다.”

어딘가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보통 이런 자리에서 웃음소리를 내면 날카로운 시선이 쏟아지기 마련이지만, 이곳에서는 누구도 그 웃음을 탓하는 이가 없었다.

위압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장내의 분위기를 만드는 사람은 현종이다. 만일 그가 위압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면, 이곳에 모인 이들은 숨소리까지도 조심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종은 그저 모두를 온화하게 품듯이 바라볼 뿐이었다.

‘포용력이라.’

당군악은 그런 그를 슬쩍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사천당가에서는 결코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가 아무리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보려 해도, 그를 앞에 둔 이들은 절로 긴장에 몸을 움츠린다.

화산의 장문인이라는 직위가 아직은 사천당가의 가주라는 직위보다는 부족하기 때문에?

그럴 리가.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천우맹의 맹주라는 자리가 가지는 상징성은 사천당가의 가주를 가볍게 뛰어넘는다. 그럼에도 이런 분위기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직위로써 만들어 내는 위압 이상의 무언가가 현종에게 있기 때문이리라.

천우맹의 시작은 청명과 당군악에게서 나왔다. 하지만 현종이 없었다면 천우맹의 완성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당군악은 때때로 현종을 보며 강함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고는 했다.

“이렇게 모여 주신 분들을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불과 몇 해 전만 하더라도 이 화산에 이리 많은 분들이 찾아 주실 날이 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었습니다.”

그 말에 중인들은 슬쩍 불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틀린 말이 아니기는 하지만…….’

‘이곳에 어떤 자리인지 모르는 건가?’

물론 이곳을 찾은 이들의 대부분이 화산파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왔다. 화산파의 전각이 아니라 제자들을 말이다.

그러나 속사정이야 어떻든, 이 자리는 단순히 화산의 객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천우맹의 개파를 선언하는 자리다. 그렇다면 저 말은 그 선언을 시작하기에 그리 적절하진 않았다.

사람들의 마음에 현종이라는 이의 그릇에 대한 의문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종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아시다시피 화산은 그리 대단한 문파가 아니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별 볼 일이 없는 문파였고, 얼마 가지 않아 현판을 내려야 할지도 모르는 문파였습니다.”

중인들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 갔다.

현종이 왜 저런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개파식이란 경사스러운 자리이고, 또 한편으로는 세를 과시하는 자리다. 그런데 왜 그런 자리에서 살 날 얼마 남지 않은 중늙은이처럼 과거의 회한이나 늘어놓는단 말인가?

‘화산의 장문인은 그저 호인일 뿐인가?’

‘아무래도 천우맹의 맹주로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

수장이란 본디 온화함을 넘어 강단과 지엄함을 갖춰야 한다. 그런데 저건 이 거대한 연합을 이끌어 나가는 수장이 보일 모습이 아니었다.

“어쩌면 장문인이라 불리는 이가 할 생각이 아닌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그 혹독한 시간을 버텨 내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현종의 이야기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모두가 빨려 들어가듯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단 한 문파라도 화산에 손을 내밀어 주고 등을 받쳐 줄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다고.”

거기까지 말한 현종이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단순히 보여 주기 위한 미소가 아니었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그 웃음에, 모두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칼바람을 맞으며 광야에서 살아가는 이들도 때로는 비를 피할 곳을 찾으려 하고, 때로는 바람을 막아 줄 곳에 기대고 싶어진다.

만일 강호를 살아오며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다면, 그는 아직 강호의 비정함을 알지 못하는 이다.

현종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중인들과 눈을 맞추었다.

“천우맹은 대단한 연맹이 아닙니다. 천우맹을 개파 하여 강호를 뒤흔들어 보겠다는 생각도 아니고, 대단한 권력을 손에 쥐어 보겠다는 생각으로 만든 연맹도 아닙니다.”

그 말에 상석에 앉은 이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들은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단상 위의 현종을 바라보았다. 마치 마음속에 내내 품고 있던 우려를 읽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저…… 과거의 제가, 과거의 화산이 간절히 바랐던 것을 이제야 이룰 수 있게 된 것뿐입니다.”

현종은 그의 곁에 서 있는 다른 수장들을 하나씩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앞을 보며 말했다.

“화산에 별난 제자 녀석이 하나 있는데, 그 녀석이 그리 말했습니다. 친우니 뭐니 해도 결국은 모두 허울 좋은 소리다. 좋을 때는 더없이 막역한 척 웃어 대다가 위기가 오면 안면 몰수하고, 물에 빠진 이를 짓밟아 물 안으로 밀어 넣는 것이 강호의 생리이고, 문파간의 관계다.”

칼날 같은 평가였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 중 누구도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사실이 그러하다는 걸 내심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천우맹은…….”

현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틀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청명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실 빤한 말이다. 이런 자리에서라면 누구나 할 수 있을 이야기다.

하지만 이상하게 듣고 있자니 가슴 한편이 아린 느낌이 들었다.

당군악과 맹소, 그리고 살짝 두 뺨이 달아오른 설천상을 보는 순간 절로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예전에도 이랬다면 조금 달랐을까?

그렇게 홀로 뻣뻣하게 외로이 달리지 않았다면, 함께해 줄 이들이 있었다면 화산의 현재가 조금 달랐을까?

알 수 없다.

가정이란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는 미련에 불과하니까.

다만 조금 더 노력할 뿐이다.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고, 한 번 저지른 실수를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천우맹의 네 문파는 서로가 서로에게 손을 내밀 것이고, 서로가 서로의 등을 받쳐 줄 것입니다. 서로가 위기에 처한다면 위험을 마다 않고 달려갈 것이며, 기쁜 일이 있다면 함께 웃고 축하할 것입니다.”

마냥 부드럽던 현종의 얼굴에는 어느새 단호한 표정이 굳건히 자리했다.

“어쩌면 꿈같은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하나, 이루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화산은 천우맹의 이름 아래 모인 문파들의 바람을 막아 줄 방벽이 될 것이고, 그들의 손을 잡은 형제가 될 것입니다.”

쿵!

당군악이 발을 세게 구르며 앞으로 한 발 나서 그런 현종의 곁에 섰다. 그리고 전방을 향해 공수하며 소리쳤다.

“사천당가 역시 천우맹의 방벽이 될 것이오.”

맹소도 뒤지지 않고 나섰다.

“남만야수궁은 천우맹 문파들의 형제가 될 것이다. 형제들의 적은 곧 야수궁의 적이 될 것이고! 형제들의 친구는 야수궁의 친구가 될 것이다!”

설소백 역시 가벼운 걸음으로 앞으로 나서 다른 수장들의 옆에 섰다.

“빙궁은 천우맹을 지키는 검이 될 것입니다. 천우맹의 문파를 적대하려는 이들은 먼저 빙궁을 넘어야 할 것입니다!”

당군악과 맹소의 위세, 그리고 아직은 어린 설소백의 당당함까지 눈으로 본 이들은 새삼 실감했다.

천하에는 수많은 문파가 존재하지만, 저 네 문파를 동시에 적으로 돌리고자 할 이가 어디에 있겠는가?

저 현종과 다른 수장들이 말한 것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면 천우맹은 천하의 어떤 세력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곳이 될 것이 분명했다.

“현상.”

“예!”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현영과 현상이 조심스레 단상에 올랐다. 현상의 손에는 술병과 술잔이 놓인 고급스러운 은반(銀盤)이 쥐여져 있었고, 현영의 손 위에는 새하얀 천에 살짝 감싸인 소도(小刀)가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수장들의 앞에 서서 손에 든 것을 공손히 내밀었다.

수장들은 잠깐 말없이 그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아래에서 보는 이들이야 잘 모르겠지만, 이 물건들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야수궁의 술과 당가가 가져온 옥배(玉杯), 거기에 북해빙궁의 칼과 화산의 사람.

가장 먼저 당군악이 손을 뻗어 술병을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뒤이어 설소백이 소도를 들고 뽑았다.

“맹주.”

“예.”

현종은 설소백이 내민 소도로 자신의 손바닥을 그었다. 그리고 흐르는 피를 술병 안으로 떨어뜨렸다.

또옥.

현종이 손을 거두자 당군악이 손을 그어 술병에 피를 흘려 냈고, 맹소와 설소백도 뒤를 이어 술에 피를 섞었다.

그 모든 과정이 끝나자, 당군악은 경건하기까지 한 모습으로 살짝 붉어진 술을 모두가 든 잔에 채웠다.

탁.

술병이 다시 은반 위에 놓이니 장로들은 할 일을 모두 마쳤다는 듯 단상을 내려갔다.

남은 네 사람이 손에 든 잔을 물끄러미 보았다. 아래의 중인들 역시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고요가 턱 끝까지 차오를 즈음, 현종이 술잔을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오늘 바로 이 자리에서! 화산파, 사천당가, 남만야수궁, 북해빙궁! 이 네 문파가 천우맹의 이름으로 형제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천존께서 굽어 살피시기를!”

당군악과 맹소, 설소백이 현종을 따라 술잔을 들어 올렸다. 이윽고 네 사람이 동시에 술을 비워 냈다.

“와…….”

“우와아아아아아아!”

살짝 머뭇거리던 목소리에 뒤이어 어마어마한 환호가 터져 나왔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북받치던 모두의 감정이 일거에 폭발한 듯,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환호가 화산을 가득 메웠다.

“천우맹!”

“화산!”

“사천당가!”

잔을 비운 네 수장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들어 올리니 환호는 더욱 커져 갔다.

상석에 앉은 강호의 명숙들마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쳐 댔다. 그 속이야 어떻든 이 광경을 축하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사실 어찌 보면 소박하기까지 한 개파 선언이다.

위압적이지 않고, 웅장하지 않았으며, 모인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화려한 볼거리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진솔하게 다가왔다. 세를 과시하기 위한 연합은 자신의 힘을 증명할 테지만, 형제가 되는 이들은 그저 술잔을 나누면 되는 법이니까.

구경을 위해 모인 중인들은 물론이고 연무장에 도열한 네 문파의 제자들도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러 댔다.

그리고 그 환호와 기쁨의 소용돌이 속에서 청명만이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헛되지는 않았구나.’

그가 화산으로 돌아온 후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

그런 게 있었을 리가 있나.

그는 이미 한차례 실패한 사람이다. 아무것도 지켜 내지 못한 사람이다. 그저 이 방법밖에 없다고 스스로를 다잡으며 이를 악물었을 뿐, 걷고 있는 길이 옳다는 확신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이 광경을 보고 있자니 지금껏 걸어온 길이 잘못되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미약하게나마 들었다.

‘여기에 모두가 있다.’

그가 걸어온 길이 있고, 그 길을 함께해 준 이들이 있다.

그래. 바로 여기에.

“헤헤.”

가볍게 코를 문지른 청명의 옷 속에서 백아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그래, 너도 있지.”

손가락으로 백아의 이마를 가볍게 두드려 준 청명은 주변을 가만히 둘러보았다. 환호와 즐거움이 가득했다.

청명의 미소가 조금 짙어졌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속으로 말을 건네 보았다.

‘어때요, 장문사형. 여기까지 왔다니까요.’

뭐, 딱히 칭찬까지 바라고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이 정도는 당연한 것도 아는데…… 그래도, 그게…….

- 고생이 많았다, 청명아.

순간 퍼지는 그리운 목소리에, 청명은 빤히 하늘을 보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제부터지.”

퍼져 나갈 것이다. 화산에 피어난 매화들, 그로 인해 흘러나오는 향기가 온 세상에, 아주 널리.

마치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표정이 왜 그래?”

“응?”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청명이 눈을 뜨고 앞을 보았다.

백천과 유이설, 윤종, 조걸, 그리고 당소소까지 그를 돌아보며 살피고 있었다.

“어디 몸이라도 아파?”

“…….”

잠깐 멍하니 그들을 보던 청명이 입꼬리를 움찔하다 이내 씨익 웃었다.

“아니. 지금 최고야.”

“싱겁기는.”

오검과 소소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앞을 보았다. 청명은 다시 하늘을 흘끗 보았다. 그의 표정이 조금 전과는 달랐다.

‘옛날 같은 화산?’

아니, 천만에.

‘두고 보라고요, 장문사형.’

우리 때를 뛰어넘는 최고의 화산을 만들 테니까.

바로 이놈들과 함께.

백아의 머리를 다시 두어 번 부드럽게 두드려 준 청명이 숨을 훅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양손을 입에 댄 채 전방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아아! 장문인 잘생기셨다아아아아아!”

“하지 마, 이 새끼야!”

“다물라고 좀!”

“제발 장소 좀 가려, 인마! 좀!”

화들짝 놀라 일제히 버럭 소리치는 오검을 보며 청명은 깔깔 웃었다.

웃음소리가 환호와 뒤섞여 높은 하늘을 향해 낭랑히 퍼졌다.

기쁨이 가득한 화산의 정상으로 훈풍이 불어왔다. 청명하기 짝이 없는 푸른 하늘이 그런 화산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하루였다.

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