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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655화 (653/1,567)

655화. 죽으면 얼마든지 쉴 수 있어! (4)

“으으음.”

현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모여 앉은 장로들과 운자 배, 오검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막 모두에게서 이번 여정에 대한 제대로 된 보고를 들은 참이었다.

물론 화산이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개방을 통해 대충 전해 들었다. 하지만 직접 보고 겪은 이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쉬이 할 이야기가 아니건만.”

결과적으로는 모든 것이 잘 풀렸고, 큰 피해 없이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한 번이라도 삐끗했다면, 이곳에 있는 이들 중 누구도 웃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들 정말 고생이 많았다.”

“아닙니다, 장문인.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현상이 빙그레 웃었다. 말과는 달리 미소에는 채 다 숨기지 못한 뿌듯함이 어려 있었다.

“운 역시 최선을 다한 이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겸손도 과하면 비례가 되는 법이다. 너희는 충분히 훌륭했다.”

현종은 더없이 기꺼운 얼굴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제자들이 먼 길을 다녀오며 이뤄 낸 성과는 더없이 훌륭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현종을 기쁘게 하는 것은 그 험한 일들을 치러 내면서도 죽거나 크게 다친 이들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건 단순히 운이 좋았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다.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청명이를 비롯한 오검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애를 썼을지 생각하니, 기특하고 또 기특했다.

부드러운 얼굴로 차를 한 모금 마신 현종은 모두를 한차례 둘러보고 입을 뗐다.

“백천아.”

“예, 장문인.”

“이번 여정에서 느낀 것이 있더냐?”

“예.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백천이 살짝 심호흡을 하고 단정한 얼굴로 말했다.

“화산은 분명 과거보다 강한 문파가 되었지만, 여전히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명문이 왜 명문인지, 천하를 호령하는 문파들이 어째서 그 위치에 있는지 뼈저리게 실감했습니다.”

현종이 그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도 같은 생각이냐?”

“예, 장문인.”

“그래 봤자지. 뭐 대단하다고.”

현종이 빙긋 웃었다.

마지막에 이상한 대답 하나가 들려온 것 같았지만, 이제는 현종도 ‘그 목소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줄 안다.

“현영.”

“예, 장문인.”

“네 생각은 어떠하더냐?”

그러자 현영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장문인.”

“그래.”

“이제 화산은 지금까지와 같을 수 없습니다.”

“으음?”

현종이 무슨 뜻이냐 묻는 눈빛으로 현영의 대답을 재촉했다.

“이번에 무당이 비무를 걸어온 것은 눈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타 문파들이 화산을 견제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냐?”

“물론 그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보다는 조금 다른 쪽에 주목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영이 살짝 심호흡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화산은 무슨 일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해 왔습니다.”

그러자 듣고 있던 현상은 영 뚱딴지같은 소리를 들은 양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우리가 언제?”

“사형. 우리가 힘이 없고 돈이 없어 못 하는 일은 있었지만, 하고자 하는 일을 우리가 결정하지 못한 적은 없었습니다.”

“나는 이해가 안 되는구나.”

“우리가 아이들을 비무대회에 참가시키기로 했을 때, 막아선 이들이 있었습니까?”

“……그렇지는 않지.”

현영이 그거 보라는 듯 눈을 찌푸렸다.

“운남을 다녀올 때도, 북해를 다녀올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일이 얼마나 힘들건 결국 선택은 우리의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무당과의 비무는 우리가 결정한 일이 아닙니다.”

“으음.”

“화산의 명성이 높아지는 건 좋은 일이지만, 앞으로는 우리의 의사와 무관하게 이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날 겁니다. 저들은 앞으로도 거절할 수 없는 제안과, 물러설 수 없는 승부를 반복해 화산의 명성을 깎으려 들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구나.”

현상은 그제야 현영의 말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견제라…….’

구파일방과 유력 문파들이 일제히 화산을 견제한다. 생각만으로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현영이 아직 할 말이 남은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저들의 술수에 말려들어 명성을 깎아 먹는 일은 피해야겠지요. 다만 제가 정말로 걱정되는 건, 그런 일들 때문에 화산이 정말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입니다.”

“흐음…….”

“예를 들어 이 아이들이 북해로 떠나기 직전이나, 모두가 녹림으로 나서기 전에 무당이 비무를 걸어왔다면 문제가 꽤 심각했을 겁니다.”

“아…….”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는 어떤 일을 진행함에 있어서, 다른 문파들이 어떻게 나올지를 생각하고 움직여야 합니다. 조금 더 복잡해지고, 또 힘들어지겠지요.”

“으음.”

현종이 슬쩍 앓는 듯 침음성을 흘렸다.

막연히 견제를 해 올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듣고 보니 확실히 쉬이 넘길 일이 아니었다.

하나.

“좋은 거죠.”

“응?”

채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청명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쏠리자 청명은 히죽 웃었다.

“만만한 문파는 아무도 견제하려 들지 않잖아요. 구파일방이 화산을 견제한다는 말은 이제 천하의 모든 문파가 화산을 위협적인 존재로 인정했다는 의미 아니에요?”

“허…….”

일이란 생각하기 나름이라더니, 그 말 역시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무리 애를 써 봐야 물이 흐르는 걸 막을 수는 없어요. 아주 신경을 쓰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결국 우리가 할 일을 제대로 해 나가는 게 몇 배는 더 중요하죠.”

청명의 똑 부러지는 말에 현영이 피식 웃었다.

“욘석아. 네가 그리 말해 버리면 내가 심각하게 뱉은 말이 잔소리가 되어 버리지 않느냐.”

“헤헤. 그냥 그렇다는 거죠, 뭐.”

청명의 머리에 슬쩍 장난스레 꿀밤을 먹이는 현영을 보며 현종이 빙그레 웃었다.

‘둘 다 틀린 말은 아니구나.’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고,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굳건한 기지를 지켜 나가는 일 또한 중요하다.

눈은 하늘을 바라보되, 다리는 바닥에 단단히 붙이는 게 지금부터 화산이 해 나가야 할 일이다.

“모두…….”

뭔가 첨언하려던 현종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다만 슬쩍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문 너머에서 수련하는 제자들의 고함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게지.’

어떤 일이 벌어지건 자신의 자리에서 우직하게 노력하며 나아갈 수 있다면 결국은 다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굳이 그가 가타부타 말하지 않아도 화산의 제자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 이 일은 이쯤에서 정리하도록 하고.”

현종이 청명을 보며 말했다.

“이제는 다음 일을 논의해야 할 것 같은데.”

“다음 일요?”

“짐작 가는 바가 있지 않느냐.”

현종의 말에 청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해야 할 일이 너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서 뭘 말씀하시는 건지…….”

“…….”

“화영문 지부를 내는 것도 한번 둘러봐야 하고, 북경에 차를 파는 일도 은하상단이랑 논의를 한번 해야 하고, 모인 자금을 적당히 돌려야 하니 화음에 추가적으로 투자도 해야 하고, 이대제자들과 삼대제자들이 얻은 심득을 정리하는 것도 도와야 하는 데다가……. 북해 쪽과 첫 교역이 시작된 판이니 그게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도 해야 하고…….”

“그, 그만.”

그냥 놔두면 적어도 한 시진은 저대로 떠들 기세였다.

‘우리가 벌인 일이 이렇게나 많았던가?’

현종은 화산이 얼마나 쌩쌩 돌아가고 있는지를 새삼 실감했다.

“무, 물론 그 일들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이 있지 않느냐?”

“제일 중요한 일요?”

“그래.”

“아!”

청명이 그제야 알았다는 듯 눈에 불을 켰다.

“혹시 종남 새끼들이 봉문을 풀었나요? 무당 콱 밟아 줬으니 이 새끼들도 다시 밟아야 하는데?”

“…….”

저 종남과 구파에 대한 뿌리 깊은 악의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종남은 아직 봉문을 풀지 않았다.”

“그럼요?”

청명에게서 대답을 이끌어 내기를 포기한 현종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수많은 일들이 있지만 지금 가장 시급한 건 따로 있지.”

그 말을 들은 청명이 기다렸단 듯 씨익 웃었다.

“천우맹이죠.”

“그래.”

현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이 이번에 해낸 일로 인해 화산의 명성이 더없이 드높아졌으니, 실기할 것 없이 바로 발족을 진행하자고 하더구나.”

“오?”

“대충 다른 주요 문파들과의 조율을 끝냈고, 사천과 섬서에 위치한 중소 문파들에게도 참가 여부를 물었다고 하더구나.”

“캬아! 역시 당가! 일 처리 하나는 진짜 신속하네요! 화산이 했으면 두 달은 더 걸렸을 텐데.”

“……그, 그렇지.”

이건 당가를 칭찬하는 것인가 화산을 욕하는 것인가.

“그래서 어떻게 하자고 하던가요?”

“모두가 화산으로 모이기로 했다.”

“엥? 여기로요? 당가 쪽이 아니라?”

현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디 일을 주도한 당가 쪽에서 개파식을 하는 것이 이치에 맞으나, 화산의 이름이 이리 높아진 것을 이용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하더구나. 사천당가와 남만야수궁, 그리고 북해빙궁과 녹림까지 주요 인사들을 데리고 화산으로 출발했다고 한다.”

“……출발해도 되냐가 아니라 출발했다고 서찰이 왔다고요?”

“그래.”

“……뭔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것도 아니고…….”

청명이 황당해하자 현종이 빙긋 웃었다.

“서찰에서 당가주가 신이 난 것이 느껴지더구나.”

“허허.”

당군악이 그 근엄한 얼굴로 좋아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상상하니 괜스레 웃음이 나는 청명이었다.

“나 역시 당가주와 같은 생각이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굳이 미룰 필요는 없겠지.”

“옳은 말씀이세요.”

“하니, 이제 화산도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

“예, 장문인!”

청명과 시선을 마주친 현종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며 일렀다.

“현영.”

“예.”

“화산도 천우맹 개파를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화산으로 오고 있는 문파들을 맞을 준비를 하거라.”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또한.”

현종의 허리가 쭉 펴졌다. 그와 동시에 온화하고도 강건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천우맹의 개파는 우리만의 일이 아닌 터, 천하의 문파들에게 화산과 천우맹의 이름으로 배첩을 돌려라.”

현영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좋은 일이니, 부디 참가하여 자리를 빛내 달라고 말이다.”

“……예. 예! 알겠습니다, 장문인!”

천하의 문파들에게 배첩을 돌린다는 건 아무 문파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건 화산이 천우맹의 수장으로서 강호의 흐름을 주도할 수 있는 자리에 올랐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모두 듣거라!”

“예!”

“자리는 힘을 만들고, 힘은 책임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앞으로 화산이 해야 할 일은 더욱 많아질 것이고, 그 부담은 한층 커질 것이다.”

자리에 앉은 모든 이들이 눈을 빛내며 현종을 똑바로 응시했다.

“하지만 이는 마다할 수 없는 일. 나는 기꺼이 그 부담을 짊어지려 한다. 너희 역시 나를 도와주거라.”

“물론입니다, 장문인!”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뭇 진지한 얼굴로 현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잊지 말거라.”

“…….”

“천우맹의 수장이 되어도, 무당이 견제하는 곳이 되어도, 세상이 주목하는 곳이 된다 하여도.”

이내 굳어 있던 그의 입가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화산은 그저 화산일 뿐이다.”

그러자 덩달아 굳었던 얼굴들이 살짝 풀렸다.

“자, 그럼 시작하자꾸나.”

“예!”

우렁찬 대답과 함께 화산 제자들의 눈에 열기가 피어났다.

이제 세상에 천우맹의 이름을 알릴 시간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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