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4화. 죽으면 얼마든지 쉴 수 있어! (3)
“흐으으으으음.”
“…….”
“…….”
모든 정리를 마치고 모여든 화산의 제자들은 영 못마땅한 얼굴로 앞에 선 청명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저 마귀 같은 놈이 또 뭘 시키려고…….’
‘눈 봐. 저놈 눈 좀 봐.’
‘제발 곱게 좀 살자, 청명아.’
하지만 청명의 입에서 나온 건 그 어떤 제자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말이었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고생한 건 사실이니까. 열흘 정도 휴식을 주지. 뭘 하든 자유야. 열흘 동안은 안 건드릴게.”
“…….”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는 청명을 보며 제자들이 눈을 부릅떴다.
사람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모두 말이 되는 건 아니다. 다른 이의 귀로 들어가 이해될 수 있는 것이어야 비로소 진정한 말이 된다.
그런데 지금 청명의 입에서 나온 소리를 진정으로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게 뭐라는 거지?”
“그냥 늘 그랬던 것처럼 헛소리한 거 아닙니까?”
“지금 설마 쉬라고 한 건 아니지?”
“영원히 쉬라는 거 아닐까? 관에 누워서?”
화산 제자들 사이에 생긴 불신의 골이 얼마나 깊은지 새삼 실감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제자들이 이상한 눈길로 흘끗대며 수군거리기 시작하자 청명은 눈썹을 꿈틀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냥 쉬라고. 안 건드린다고.”
“……안 건드려?”
제자들이 다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일제히 머리를 맞대고 쑥덕거렸다.
“손도 안 쓰고 장력으로 날려 버릴 셈인가.”
“그게 아니면 말로만 팬다든가.”
“아, 그게 더 끔찍한데…….”
“저 새끼를 믿느니 귀신을 믿지.”
청명의 이마에 서서히 핏대가 솟기 시작했다.
그래, 다 좋다. 이런 반응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런데 당사자를 앞에다 두고 태연하게 할 말을 다 하는 저 패기는 대체 어디서 나온 거란 말인가?
“……이번에는 진짜라고! 그냥 쉬게 해 준다니…….”
“야! 그냥 때려라, 이 새끼야! 속 시끄러운 것보다 그게 낫다.”
“그래! 죽여라, 죽여!”
“아니, 근데 진짜 이 인간들이!”
청명이 발끈해서 달려들려고 하자 윤종과 조걸이 아무렇지도 않게 청명의 양팔을 하나씩 움켜잡았다.
“이건 네 업보다.”
“솔직히 못 믿을 만도 하지.”
“끄으으응.”
이를 빠득빠득 간 청명이 빽 소리쳤다.
“어쨌든 지금부터 휴식이니까 쉬든가 말든가 알아서들 해!”
그리고 몸을 획 돌려 터덜터덜 저만치 걸어갔다. 그 양을 지켜보던 백천이 조금 쓰게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저놈도 안 하던 말을 하려니 어색해서 저러는 거다.”
“……어색하겠죠.”
지옥에서 올라온 아수라가 ‘사실 나는 부처님을 믿는다.’ 하고 말하는 게 차라리 덜 어색할 판이었다.
백천이 모두를 쭉 둘러보고 말했다.
“말도 계속 달리다 보면 결국은 지쳐 나가떨어진다. 빨리 가는 법은 휴식 없이 달리는 게 아니다. 적절히 쉬어 가고 집중해야 할 때를 아는 거지.”
“그걸 아시는 분이 왜 그러셨습니까?”
“으응?”
“화산으로 오는 길에는 그런 말씀 한 번도 안 하시더니!”
날카로운 지적에 백천은 슬쩍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애들이 거칠어졌구나.’
나 때는 안 그랬는데! 나 때는!
“크흠. 여하튼!”
입을 가리고 나지막이 헛기침을 한 그가 말을 이었다.
“피로가 제법들 쌓였을 테니, 푹 쉬도록 해라. 그 뒤로는 다시 바빠질 테니 말이다.”
“…….”
“그럼.”
백천이 오검을 데리고 돌아서자 남은 제자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하여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여기저기서 조금씩 수군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쉬라는 거지?”
“……그런 것 같은데?”
자연스레 서쪽을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다.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던가?”
물론 그럴 리는 없었다.
* * *
곽회는 뭔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사형제들이 모두 반쯤 혼이 나간 얼굴로 초점 흐려진 눈을 깜박거리며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무당을 상대로 의지를 불태웠던 게 불과 얼마 전인데,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저…….”
한참을 주저하던 곽회가 어색한 얼굴로 쭈뼛쭈뼛 입을 뗐다.
“쉬라는 게 이렇게 널브러져 있으라는 의미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
그러자 반쯤 죽은 것처럼 퍼져 있던 이들이 모두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뭐, 있잖습니까. 그동안 못 해본 걸 해본다든가, 수련을 하느라 즐기지 못했던 걸 즐긴다든가…….”
“음, 그래. 그렇지.”
백상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이 놈은 몰라도 확실히 백천이 말한 ‘휴식’이라는 건 분명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알지. 아는데…… 문제가 있다.”
“……뭐가요?”
백상은 대답 대신 등 뒤에 널브러진 사제들을 향해 턱짓했다. 백자 배들의 입에서 마침 허탈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떻게 쉬어야 잘 쉬는 거지?”
네?
“아니, 애초에 쉰다는 게 뭐지?”
네?
곽회의 눈가가 푸들푸들 떨렸다.
심지어 그런 그들의 의견에 청자 배들도 동조를 하고 나섰다.
“보통은 수련이 끝나면 씻고 방에 들어가서 자는 걸 쉰다고 하지 않습니까?”
“잠이 안 오는데 어떻게 쉬라는 거지? 이해를 못 하겠는데?”
망연히 그들을 보던 곽회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글렀어.’
이 인간들은 이미 뼛속까지 청명이 놈의 마수에 물들었다.
쉬라고 시간을 줘도 방법을 모르는 인간들이라니, 이게 상식적으로 가능이나 한 일인가?
“……생각해 보면 최근 몇 년 동안 수련을 안 하고 쉰 날이 없었던 것 같은데?”
“저, 사형. 사실 아까부터 이상하게 자꾸 불안해서 미치겠습니다. 그냥 나가서 수련 좀 하고 오면 안 될까요?”
뒤에서 넌지시 들려온 목소리에 백상이 눈살을 찌푸렸다.
“백천 사형께서 수련하지 말고 쉬라고 하신 걸 못 들었느냐?”
“아, 알긴 아는데…… 계속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려니 자꾸만 불안해서…….”
“아…… 단련 안 하면 근육 꺼지는데.”
“나 오늘 하체 하는 날인데…….”
한 사람이 포문을 열자 백매관에 널브러져 있던 이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키며 동조하기 시작했다. 물론 청명과 백천의 말에 따라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래도 휴식을 취해야 하지 않을까?”
“그게 뭔데!”
“쉬라고!”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왁왁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 장내를 보며 곽회가 빙그레 웃었다.
화산의 제자들은 이제 머리가 쉬면 몸이 쉬지 못하고, 몸이 쉬면 머리가 쉬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 씨! 저는 그냥 체력 단련만 좀 하고 오겠습니다!”
“저는 절벽 딱 두 번만 타고 올게요!”
“저는 검 좀…….”
백상이 화들짝 놀라 만류하며 소리쳤다.
“아니! 쉬라잖아, 이 새끼들아!”
“수련을 해야 쉴 거 아닙니까!”
“응?”
순간 말을 잃은 백상이 눈을 끔뻑였다.
“쉬는 게 누워 있으라는 의미가 아니잖아요! 마음이 편해야 쉬는 거 아닙니까?!”
“그, 그렇지.”
“내가 여기 이러고 있으면 내 마음이 불편하다니까! 차라리 시원하게 땀 한번 확 흘리고 와서 편하게 쉬겠습니다!”
“…….”
“가자!”
“나도! 나도 간다!”
“아우! 이제 좀 살겠네!”
“죽으면 얼마든지 쉴 수 있어!”
백자 배와 청자 배들이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백매관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에 미련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남겨진 백상과 곽회는 말없이 두 눈을 끔뻑였다.
이내 밖에서 우렁찬 함성이 들려왔다. 백상의 입에서 참지 못한 헛웃음이 터졌다.
“……진짜, 뭐라 할 말이 없네.”
“그러게요.”
“너는 어쩔 거냐?”
“저요? 저야 뭐…….”
곽회가 눈치를 살피다 어색하게 웃었다.
“좀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 적당히 휘둘러 봐야 할 것 같은데…….”
백상은 서글픈 눈으로 백매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다들 미쳤어.’
이제는 제정신인 놈을 찾는 게 더 빠를 지경이었다.
연무장을 바라보는 청명의 눈이 멍하고 흐릿했다.
“으라아아아아앗!”
“크으! 몸에 무게가 실리니 좀 살 것 같네! 사람은 땀을 흘려야지!”
“아, 다 썼으면 좀 비키십쇼! 전세 내셨습니까!”
“열 번은 더 해야 돼, 인마! 와서 숫자나 세!”
커다란 청명의 눈이 끔뻑거렸다. 의문이 쌓일수록 고개가 옆으로 점점 기울었다.
“죽어라아아아앗!”
“이 새끼가 사형한테!”
“허리! 허리가 비었잖습니까! 똑바로 안 하십니까?”
“오냐! 오늘 뒈져 보자! 너 대가리 똑바로 간수해라!”
연무장에선 연신 검기가 번쩍거렸다.
“……대체…….”
만들어 놓은 기구로 체력 단련을 하거나 검술을 펼치는 놈들은 그나마 낫다.
그런데 저기 구석에서 토끼뜀으로 연무장을 도는 놈들 머릿속엔 대체 뭐가 들어 있는지, 천하의 청명도 도통 알 길이 없었다.
“하체!”
“단단한 하체에서 강력한 검기!”
“열 바퀴 더!”
청명은 제 주변을 슬쩍 살폈다. 옆에 앉은 오검과 혜연도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듯 입만 헤 벌리고 있었다.
“……쉬라고 하지 않았어?”
“……분명 그랬던 것 같은데?”
“내가 모르는 사이에 휴식의 의미가 달라졌나?”
“그건 아닐 것 같은데…….”
한참 동안 제자들이 수련하는 양을 바라보던 청명이 중얼거렸다.
“아니, 이 새끼들은 다 청개구리를 삶아 드셨나? 수련 좀 하자고 하면 쉬자고 악다구니를 써 대고, 좀 쉬라고 하면 굳이 나와서 칼 휘둘러 대고.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서 춤을 춰야 돼?”
그 투덜거림을 들은 오검의 머릿속엔 모두 같은 생각이 스쳤다.
청명아. 아마 그건 네 ‘수련’과 ‘휴식’이 너무 극단적이어서 벌어지는 일이 아닐까?
하지만 그 말을 차마 입 밖에 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생각하니까 또 빡치네! 쟤네 지금 나한테 반항하는 거야?”
“사숙이랑 사형들이야, 이 새끼야!”
“화산에서 너한테 반항하면 안 되는 사람은 없다고, 인마!”
“소소 있잖아!”
“소소는 예외야!”
소소가 왜 예외인지에 대한 설명은 그 누구도 요구하지 않았다. 원래 하늘은 푸르고 바다는 넓다. 소소가 예외인 것도 비슷한 이치였다.
그때 제자들을 보던 백천이 피식 웃었다.
“나는 이해할 것 같다.”
“응?”
청명이 뭔 소리냐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에 대한 대답은 윤종의 입에서 대신 나왔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보고 자기가 얼마나 우물 안의 개구리였는지를 실감하게 되면, 등을 침상에 붙이고 누워 있는 것조차 죄스럽게 느껴지지.”
조걸이 확 인상을 찌푸렸다.
“아우. 그거 진짜 엿 같은 기분인데.”
“이번 여정에서 느낀 게 많았을 겁니다. 아마 다들 수련과 성장의 필요성을 여실히 느꼈겠죠. 그러니 그냥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백천이 윤종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당소소는 영 불만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휴식도 중요하잖아요. 쉬어 주지 않으면 사람은 망가진다고요.”
“한동안은 내버려 두자꾸나.”
“사숙!”
백천이 빙그레 웃으며 당소소에게 말했다.
“너도 무인이니 알겠지만, 사람은 스스로 의욕이 있을 때 크게 성장하는 법이다. 저 녀석들도 이번 전쟁과 비무에서 보고 느낀 것을 제 몸으로 체화하고 싶겠지.”
“으음…….”
확실히 그건 부정할 수 없다는 듯 당소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만이에요.”
“그래.”
흐뭇하게 웃던 백천은 제자들을 다시 바라보다 감탄했다.
“다들 의욕을 가지고 수련하니 화산은 더 강해지겠구나.”
“저희도 지지 말아야죠.”
“그렇지. 이제 우리도 슬슬 시작해야지.”
“아. 말 나온 김에 한판 붙읍시다, 사형. 제가 이번에 뭔가 좀 느낀 게 있는데, 이게 잡힐 듯 잡힐 듯 안 잡힙니다.”
“내가 걸이 너를 개 잡듯이 잡을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오? 뜹시다!”
“오냐!”
오검도 의욕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모든 제자들이 스스로 수련에 전념하는, 가르치는 이라면 꿈에도 바라 마지않을 상황이 벌어졌다.
하지만 한 걸음 떨어져서 그 광경을 보던 청명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듯 움찔대고 있었다.
‘다들 미쳤나?’
그는 자신이 어떤 괴물들을 만들어 버렸는지 그제야 새삼 뼈저리게 실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