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4화. 덕분에 아주 잘 배웠습니다. (4)
“돌아간다.”
허산자는 가타부타 더 말하지 않고 몸을 획 돌렸다. 심지어는 제자들의 대답조차 기다리지 않았다. 걸음걸이에서 냉기가 뚝뚝 묻어났다.
아직 허공이 의식을 되찾지도 못한 상황에서 인솔을 하는 이가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무당의 제자들 중 누구도 그런 그의 행동을 탓하지 못했다.
멀찌감치 걸어가는 허산자를 보다 무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장로님을 모셔라. 무당으로 돌아간다.”
“예.”
그리고 여전히 충격으로 굳어 있는 사제들을 한차례 둘러보며 탄식과 함께 입을 열었다.
“조금 전 화산의 장로님께서 하신 말씀을 잊지 말거라.”
“…….”
“진정한 승자는 이 비무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은 쪽이 될 것이다. 드러난 승부의 결과는 우리의 패배이나, 우리가 이를 통해 진정으로 얻는 것이 있다면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예.”
“그저…….”
무진이 눈을 감았다.
“그저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천하제일검문이라는 명성을 쌓아 올린 것은 우리가 아니거늘, 그게 당연히 우리의 힘이라 생각했다.”
그 말에 무당의 제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진의 말이 확실히 와닿은 것이다.
“다시 시작하자꾸나. 처음부터 다시. 우리보다 어린 타문의 제자들이 저리 노력하는데, 우리가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겠지.”
“명심하겠습니다.”
“더 노력하겠습니다.”
“그래. 그러자꾸나.”
무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마나 그의 말이 위안이 되었는지, 모두가 제 할 일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무진의 마음은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욱 무거워졌다.
무당의 제자들은 이 비무로부터 교훈을 얻었다.
하지만 과연 장문인과 장로들도 이들처럼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일 것인가?
‘그럴 수는 없겠지.’
그들에게는 미래가 있지만, 장문인과 장로들에게는 지금이 전부다.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했을 때, 무진도 화산에게 치욕을 당하고 천하제일도문과 천하제일 검문을 내어 준 장문인이란 평가는 받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어쩌면 이 비무가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바꿀지도 모르겠구나.’
그 변화는 무진이 원치 않는 방향일 가능성이 높겠으나, 그는 이 변화를 막을 만한 힘이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사문의 존장들이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도록 바라는 것뿐이었다.
“잠시 기다리거라.”
무진은 다른 제자들을 향해 말한 뒤 무언가 결심한 듯 화산 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 미친놈!”
“이 말도 안 되는 놈!”
“세상에, 무당의 장로를 이기다니……!”
“어디까지 할 셈이냐, 이 새끼야!”
돌아온 청명의 머리로 사형제들의 손이 쏟아졌다.
턱턱턱! 턱턱턱턱!
청명의 머리에 내려앉아 있던 먼지가 뿌옇게 일어났다. 하지만 화산의 제자들은 그런 건 안중에도 없이, 신나게 그의 머리를 두드려 댔다.
“하하하.”
청명은 배를 쭉 내밀며 허세 넘치게 말한다.
“뭐 대단한 거 했다고, 이 정도는…….”
턱턱턱턱! 턱턱턱턱!
“이, 이 정도…….”
쾅쾅쾅쾅쾅! 쾅쾅!
“아니, 이 새끼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토껴!”
“눈치 빠른 새끼!”
이 핑계로 머리를 때려 대던 화산의 제자들은 청명이 눈을 까뒤집자마자 잽싸게 달아나기 시작했다.
냉큼 추적하려는 청명의 팔을 움켜잡은 윤종과 조걸이 이를 악물고 웃으며 말했다.
“청명아. 무당이 본다.”
“진정 좀 해라.”
“아니! 저 인간들이!”
“좋아서 그러는 거 아니냐, 좋아서.”
“네가 이해해야지.”
“끄으으응.”
청명이 분하단 얼굴로 이를 갈았다. 윤종은 화를 참으며 끙끙 앓는 그를 내려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하여튼 정말 대단한 놈이야.’
꼭 무당의 장로를 이겨서 그리 생각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아마 비무라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청명의 머릿속엔 이 그림이 그려져 있었을 것이다. 그동안 아무 생각 없어 보이던 청명의 행동이 결과적으로는 화산에 막대한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을 여러 번 보지 않았던가.
‘이놈과 화산의 명성은 더욱 높아지겠지.’
이 비무의 승리가 청명의 가장 대단한 업적은 아니다. 사실 오늘의 승리는 북해를 평정하고, 마교의 잔당들을 없앤 일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화산의 입장이다.
중원의 입장에선 이역만리 북해에서의 활약이 와닿을 리가 없다. 실제로 그들이 북해에서 한 일은 중원에 제대로 된 소문조차 퍼지지 않았다.
대별채 정벌과 녹림 안정화도 결국엔 저 무당과의 승부엔 비견할 수 없는 일이다.
오늘이 지나면 청명의 활약과 화산의 명성은 들불처럼 퍼져나가 천하에 울리게 될 것이다.
“결국은 원하는 걸 다 얻었네. 저 지독한 놈…….”
“그러게요.”
다시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청명을 보며 백천과 윤종은 동시에 고개를 내저었다.
“하핫! 뭐 대단한 일 했다고.”
“아니. 대단한 건 대단한 거지!”
“너 진짜 뭐 어떻게 생겨 먹은 놈이냐!”
화산의 제자들은 여전히 믿지 못하겠단 눈으로 청명을 보고 있었다. 강하다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그게 어느 정도인지 그들이 알 방법이 있겠는가?
하지만 오늘 청명의 활약을 보고 나니 확실해졌다. 이놈은 정말 상식을 뛰어넘은 놈이다.
“뭐 그렇게 공치사할 건 아냐.”
청명은 연신 쏟아지는 칭찬을 듣다 조금 심드렁하게 귀를 후볐다.
“나도 한 번 이긴 거고, 다른 사람들도 한 번 이긴 거니까. 똑같은 일승이지.”
“……그게 어떻게 같냐?”
“너 머리가 좀 이상한 것 아니냐?”
“그리고…….”
청명이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은 진 놈들도 잘했어.”
“…….”
“장로님이 말씀하셨지. 이 비무는 무엇을 얻었느냐로 승패가 갈린다고. 마찬가지야. 승부에서 패했다고 패한 게 아냐. 그 패배로 더 강해질 수 있다면 그게 승리지.”
제자들이 조금 차분해진 얼굴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히죽 웃은 청명이 낄낄대며 말했다.
“어때? 막상 붙어 보니까 별거 아니지?”
“……별게 아니라기보다는.”
곽회가 어정쩡하게 발을 뺐다. 그러자 옆에서 청명의 말을 듣고 있던 백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직 저 높은 곳에 있기는 하지만, 오르지 못할 나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을 들은 청명이 환하게 웃었다.
“그래. 그거면 돼.”
지금은 그걸로 족하다.
오늘의 비무를 치른 화산의 제자들은 더 이상 무당을 구름 속 존재로 느끼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그들의 위에 있기는 하지만,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이들이라 여기게 될 테다.
그게 이 비무에서 화산이 얻은 가장 큰 성과였다.
그때였다.
“사숙조!”
“관주님!”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청명이 고개를 획 돌렸다. 어느새 의식을 회복해서 제자들의 부축을 받는 운검의 모습이 보였다.
청명의 눈이 확 일그러졌다.
“뭐 대단한 일 났다고 움직이고 그러세요. 좀 누워 계시지. 등이 배기셨나?”
운검이 그 말을 듣고는 쓰게 웃었다.
“제자 녀석이 활약했다는데, 누워서 구경만 할 수는 없잖느냐.”
“거 대단한 일 아니라니까 그러시네요.”
청명은 정말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장로라고 해 봐야 그중에서도 막내 정도일 뿐이에요. 무당에는 귀신 같은 양반들이 아직 넘쳐날 거고요. 그런 양반들까지 꺾기 전에는 아직 멀었어요.”
“하핫.”
운검이 어쩔 수 없는 놈이라는 듯 웃어 버렸다.
제자들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는 동시에 자만을 경계한다. 저건 원래라면 운검이 해야 할 역할이었다.
한 사람이 자리를 비우면 자연스레 다른 이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래, 이런 게 가족이고 문파라는 거겠지.
“청명아.”
“예.”
“고생 많았다.”
“…….”
운검의 눈을 본 청명은 뭔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고개를 획 돌렸다. 그리고 겸연쩍은 얼굴로 구시렁거렸다.
“공치사는…….”
턱!
그런데 어느새 다가온 현영이 그의 머리를 움켜잡고는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요놈! 요 요물 같은 놈!”
“악! 아파요!”
“이젠 하다하다 장로까지 잡고 오는구나! 두어 번만 더 돌리면 용도 잡아 오겠어!”
그 비슷한 건 이미 한번 잡았는데.
이건 말해 봐야 의미 없겠지?
“거참. 이번에는 워낙 황당해서 좋은 기분도 딱히 들지 않는구나.”
“돈 버는 일이 아니라 그런 게 아니고요?”
“어……?”
뭔가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입을 벌리는 현영을 보며 청명이 되레 움찔했다.
‘진짠가?’
이거 좀 소름 돋는데?
“자!”
중앙으로 걸어온 현상이 가볍게 손뼉을 쳐 분위기를 환기했다.
“기분은 알겠지만, 여기에서는 아니다. 지켜보는 눈이 많고, 아직 무당이 저기에 있지 않느냐?”
“아, 그럼 좋아하는 티를 더 팍팍 내 볼까요?”
“…….”
“……아니, 무당이 저기 있다고 하시기에.”
이 새끼는 대체 인성이 어떻게 되어 먹은 거지? 인성을 제물로 바쳐서 무공 실력을 얻는 건가?
떨리는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던 현상이 크게 헛기침했다.
“남은 말은 숙소에서 마저 하자꾸나. 정리하거라. 일단 돌아간다.”
“예, 장로님!”
“알겠습니다!”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화산의 제자들이 분주히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살짝 머쓱해진 청명은 같이 움직이려 걸음을 옮겼다.
“어? 누가 오는데?”
“……무진 대협이다.”
“왜 오는 거지?”
그런데 화산의 제자들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무진을 발견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 비무에 나서지 않은 이가 이쪽으로 다가오니 은근한 불안을 느낀 것이다.
‘시비라도 걸려는 건가?’
‘글쎄.’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화산의 진영 바로 앞에 당도한 무진은 가볍게 포권 하더니 한 사람을 응시했다.
“도장.”
“네?”
“잠시 말씀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저요?”
“예, 도장.”
청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가 뭐 따로 할 이야기가 있나? 칼질이라면 몰라도.”
“…….”
“왜요? 못 싸워서 근질근질한 거면 한판 붙어 드릴 수 있는데.”
“……그런 게 아니라…….”
무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지막 비무가 너무 강렬해서 청명이 이런 놈이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조언을 구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흐음.”
청명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아요. 저쪽으로 가시죠.”
“예.”
무진이 먼저 몸을 돌려 한쪽 구석으로 향하자, 청명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를 따라갔다. 아니, 따라가려 했다.
누군가가 청명을 불러 세우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청명아.”
“응?”
백천이 빙그레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 풀어 놓고 가라.”
“…….”
청명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왜? 내가 이제 와서 칼질이라도 할까 봐?”
“그래, 안 그러겠지. 알았으니 놓고 가거라.”
“아니, 근데!”
“청명아.”
운검이 곁에서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놓고 가라.”
“…….”
여기에 그의 편은 애초부터 없었다.
“……검은 왜 두고 오시는지…….”
“아, 됐어요. 묻지 마세요.”
주둥이가 댓 발은 나온 청명을 보며 무진이 쓰게 웃었다.
‘참 대단한 사람이다.’
강호는 결국 무위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강한 자는 더 높은 취급을 받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무당의 장로를 꺾은 청명을, 화산에서는 딱히 두려워하거나 경계하지 않는 듯했다.
무진은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다.
일례로 허공 역시 격식과 예의를 혐오하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주변에는 사람이 모여들기는커녕 모두가 그를 경원시되지 않는가.
처음 보았을 때의 청명과 지금의 청명은 다른 사람 같다. 어쩌면 청명이 변했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무진이 그때와는 달라졌기에 예전에는 몰랐던 게 보이는 걸 수도 있다.
“그런데 왜요?”
“아…….”
무진이 잠깐 망설이다 차분히 입을 열었다.
“도장께 가르침을 청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네. 말하세요. 제가 사람을 가르칠 주제는 안 되지만, 어떻게든 잘 대답해 드릴게요. 일전에 저지른 일도 있고.”
“……그 복면은 확실히 인상적이었지요.”
애초에 숨길 생각도 없이 뻔뻔히 나오는 청명을 보니 헛웃음이 나오는 무진이었다.
“도장.”
“네.”
“도장께서는 화산에서 가장 배분이 낮지 않으십니까.”
“지금 무시하는 거예요?”
“……그런 게 아니라.”
이놈은 왜 이리 말을 삐딱하게 받나.
헛기침을 두어 번 한 무진은 오해가 더 생기기 전에 말을 이었다.
“무당과 화산이 다르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묻고 싶습니다. 배분과 지위가 낮은 이가 존장들과 그 의견이 다를 때는 어찌해야 합니까?”
“네?”
그의 목소리는 더없이 진중했다.
“내가 생각하는 옳음과 존장들께서 생각하는 옮음이 다를 때, 제자 된 이는 어찌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청명은 살짝 눈을 가늘게 떴다.
“흐음. 그걸 왜 저한테 묻는지 모르겠는데요.”
“……예. 그렇긴 하지요.”
“답은 이미 알고 있지 않아요?”
청명은 무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사람은 대부분의 문제에 이미 답을 알고 있어요. 다만 엄두가 나질 않으니 모르는 척할 뿐이죠.”
“…….”
“남한테 물을 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다 물어야죠.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말은 이게 다예요.”
무진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그렇게 한동안 멍하니 떠가는 구름을 응시하던 그는 고개를 내리고 정중히 포권 했다.
“감사합니다, 도장.”
“별말씀을.”
“다음에 도장의 검을 견식 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예. 검이 없군요.”
“쯧.”
“그럼.”
무진이 다시 한번 예를 표하고 몸을 돌렸다. 무당의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이쪽으로 올 때보다는 조금 가벼워 보였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청명은 이내 피식 웃었다.
무진은 젊다.
변화할 의지가 있고 가슴 안에 열정을 품은 이는 그 나이가 몇이든 젊다는 말을 들을 자격이 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에는 분명 한계가 있겠지만, 스스로 의문을 품은 이가 있는 이상 무당 역시 지금에 머무르지만은 않을 것이다.
‘보고 있으니 생각나는 놈이 있네.’
그놈은 어떻게 됐을까.
이송백.
잠깐 그를 떠올리던 청명은 말없이 머리를 벅벅 긁고는 몸을 획 돌렸다.
이번에 강호로 나온 목적은 모두 달성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야지.’
화산에 남은 현종이 쓸쓸함에 눈물짓기 전에 말이다.
‘뭐 그래도 나름 좋은 선물 들고 가는 거니 좋아하시겠지.’
화산의 제자들 쪽으로 달리는 청명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