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3화. 덕분에 아주 잘 배웠습니다. (3)
“……이겼다.”
“저 미친놈이 기어코…….”
백천과 조걸, 윤종은 황당한 얼굴로 비무대를 바라보았다.
우뚝 서 있는 청명과 그 앞에 쓰러진 허공의 모습이 눈에 선명히 새겨졌다.
“세상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청명이라는 놈이 지금껏 보여 준 모습이라면 무당의 장로를 상대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머리로 생각만 하던 것과 생각하던 결과를 눈으로 직접 보는 건 천지차이였다.
‘이길 수는 있을 거라 생각했지, 이렇게…….’
이건 그냥 승리도 아니다. 말 그대로, 압승이었다.
“……사숙.”
“응?”
“그새 더 세진 거죠, 저놈?”
“……그런 것 같은데.”
“이게 말이 되나…….”
조걸의 넋두리에 백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이지 저놈은…….’
이제 좀 따라잡았다 싶으면 어느새 훌쩍 멀어져 버린다.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늘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청명의 그림자뿐이었다.
하지만 백천은 이제 더 이상 그런 일로 좌절하지 않는다.
그림자가 보인다는 건 그 너머에 청명이 있다는 말이니까. 거리가 마음같이 좁혀지지 않아도 백천은 착실하게 그를 좇고 있다.
“그보다…….”
“예?”
“일단은 저분들부터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은데.”
“…….”
백천의 말에 윤종과 조걸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제자들의 선두에 선 현상과 현영이 보였다.
‘턱 빠지시겠는데.’
‘좀 위험한 것 아닌가?’
더 벌어질 수도 없겠다 싶을 만큼 없이 한껏 열린 현상의 입을 보고 있으니 웃음과 동시에 우려가 들었다. 진짜 저러다가 턱이 빠지고도 남을 판이었다.
“이겼…….”
“허허허허.”
현상도 현상이지만, 황당해서 할 말도 없다는 듯 보이는 현영의 얼굴도 가히 절경이었다.
“저…….”
“흐음. 이거 좀 복잡하네. 복잡해.”
현영의 중얼거림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현상이 옆을 보며 물었다.
“뭐가?”
“거 생각해 보십시오, 사형. 저 잘난 무당의 장로도 까불다가 얻어맞는데 우리라고 맞지 않을 거란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이거 앞으로 저놈 앞에서 말조심을…….”
“에라, 이 썩을 놈아!”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현상이 현영의 엉덩이를 뻥 걷어찼다.
“최선을 다해 이긴 제자에게 그게 할 말이냐!”
“내가 뭐 틀린 말 했습니까!”
“끄응.”
한 마디도 지지 않으려 드는 사제를 흘겨본 현상은 다시 청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믿을 수가 없구나.’
다른 곳도 아닌 저 무당의 장로를 상대로 압승을 거뒀다. 이건 지금까지 청명의 거둬 온 승리와는 결이 다른 이야기다.
무당이 어디인가. 천하의 수많은 검문들 중에서도 당당히 최고로 꼽히는 문파다.
그런 무당에서도 최고의 전력인 장로를 후기지수에 불과한 청명이 꺾어 버린 것이다.
‘이런 일이 있었던 적이 있기는 한가?’
화산의 제자라 모르는 것이 아니다.
현상은 살아생전 이런 이야기는 들어 본 적도 없다. 아니, 상상조차 해 본 일이 없었다.
“저…… 망둥이 같은 놈이.”
현상의 입에서 자꾸 비실비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살짝 주름진 눈가에는 자꾸 물기가 묻어났다.
넘을 수 있을 거라 생각조차 할 수 없던 무당을 상대로 당당히 싸웠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청명이 어떤 심정으로 저곳에 나가 싸웠는지를 알기에 기쁘면서도 자꾸만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악물고 참으십시오, 사형.”
“…….”
“주책입니다.”
“안다, 이놈아!”
현상이 어깨를 쫙 폈다.
제자들이 피를 흘리며 만들어 낸 과업이다. 그걸 일시적 감정으로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침 비무대 위의 청명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봐 왔다.
‘오냐, 이놈아.’
그 뜻을 왜 모를까.
반사적으로 손을 내려 의관을 정제한 현상이 어깨를 쫙 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화산의 장로가 아니라, 화산을 대표하는 장문인의 대리가 되어야 한다.
그러니 모자란 모습은 추호도 보여선 안 된다.
“다녀오마.”
“예!”
현영의 입에서도 들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현상은 떨리는 가슴을 필사적으로 진정시키며 비무대 위로 올라갔다.
“…….”
뇌가 깨끗하게 씻기기라도 한 것 같았다.
사람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만나면 머릿속이 텅 비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다.
지금 허산자의 상황이 딱 그랬다.
패배.
그 두 글자만이 머릿속에 새겨진 듯했다. 이건 변명의 여지조차 없는 패배였다.
오검에게 당한 패배도 당혹스럽기는 했다. 무당의 일대제자들이 화산의 이대제자와 삼대제자에게 패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지금 상황과는…… 완전히 경우가 달랐다.
화산의 삼대제자에게 무당의 장로가 패했다. 그것도 제대로 상처조차 입히지 못하고.
이걸 대체 무슨 수로 수습하란 말인가?
어디서 들어 본 적도 없는 삼류 문파의 장로가 명문의 삼대제자에게 패했다 해도 이는 비웃음을 살 일이다. 그런데 심지어 그 무당의 장로가 타 문파의 삼대제자에게 패했다. 이건 어떤 변명으로도 수습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이는 허산자의 잘못은 아니었다.
천하의 누구라도 이런 상황을 예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허도진인과 그의 계략은 애초에 허공이 청명을 잡아 낸다는 가정하에 세워졌다.
앉아서 천하를 내려다본다는 저 허도진인조차 청명이 허공을 이길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런데 허산자가 무슨 수로 이 일을 미리 예상하고 대처할 수 있었겠는가?
“장로님…….”
무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허공…… 장로님을 수습하겠습니다.”
“…….”
“장로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허산자는 무진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넋이 나간 얼굴로 비무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리도 아니지.’
그조차도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충격을 받았는데, 허산자가 받은 충격이야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이리 망연하게 있을 때가 아니었다.
“무각과 무공은 올라가 장로님을 수습해 오거라.”
“……예. 사형.”
비무대 위로 향하는 사제들을 보며 무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
패배의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저 그들이 화산보다 약했을 뿐이다. 굳이 다른 변명거리를 찾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우린 저들보다 간절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다그쳐 수련하는 것에 게을러 본 적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화산의 제자들이 보여 준 간절함을 직면하는 순간, 무진은 그들이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타성에 젖어 있었음을 인정했다.
허공을 들쳐 업고 돌아오는 사제들을 보며 무진이 푹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떠하느냐?”
“깊은 내상을 입으신 것 같진 않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의원께 보이겠습니다.”
“그래.”
허산자 대신 상황을 수습한 무진은 여전히 비무대 한가운데에 우뚝 선 청명을 응시했다.
“장로님.”
“…….”
“한 사람의 격은 시작이 아니라 그 끝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문파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패배는 실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패배를 어찌 받아들이느냐가 무당의 격을 결정할 것입니다.”
“…….”
“장로님…….”
그러나 허산자는 여전히 길을 잃은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뒤쪽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당의 제자들 모두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단 얼굴로 얼이 빠져 있었다.
‘그럴 만도 하지.’
살면서 이토록 처참한 패배를 당해 본 적이 언제였던가?
무진이 지금 어떻게든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을 수 있는 까닭은 그가 다른 이들에 비해 더 강건한 정신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이미 청명을 겪고 비슷한 패배를 당해 보았기에 충격을 덜 받은 것뿐이다.
‘우리는 너무도 오만했는지도 모른다.’
그때, 현상이 비무대 위로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실로 당당한 걸음걸이를 보며, 무진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현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에 변화가 생겼음을 스스로 인지한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 이전까지는 화산의 장로들을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다.
무진은 청명을 겪어 보았고, 지난 화산의 모든 변화가 결국은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때문에 무진에게 있어 화산의 장로들은 다시없을 천재를 우연히 제자로 받아들인 덕에 호사를 누리는 무능력자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나 지금은 현상이 썩 달라 보였다.
‘저 운검이라는 검수와 백자 배들을 키워 낸 이로구나.’
운검 하나만 보더라도 화산의 검수들이 어떤 자세로 검을 익혀 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이를 키워 낸 이라면 마땅히 존중을 받아야 한다.
화산과 무당을 떠나 같은 도인으로서, 그리고 같은 검수로서 말이다.
청명의 옆에 선 현상은 가만히 무당을 바라봤다.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무당의 제자들을 지나 넋이 나가 버린 허산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그는 가만히 입을 열었다.
“좋은 비무였습니다.”
“…….”
“비무의 승패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 검을 겨누며 무엇을 배웠고, 무엇을 얻어 가느냐겠지요.”
담담하지만 굳건한 힘이 실린 목소리였다.
새삼 무진은 깨달았다.
‘노송(老松)이구나.’
힘이 세다는 것이 그 사람의 강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화산에 몸을 담고 수많은 세월 부침을 겪어 온 이는 묵묵히 세월의 격랑을 버텨 온 노송처럼 단단하고 절도가 있었다.
그건…….
‘우리 무당이 추구해야 하는 것이었는데.’
화산을 지켜 낸 이들은 그 화려한 검의 이면에서 무당의 이상을 오롯이 삶으로 구현하고 있었다.
어쩐지 숙연해진 무진은 저도 모르게 살짝 고개를 숙여 현상에게 경의를 표했다. 현상이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화산이 많은 것을 얻어 갑니다. 하지만 지금 드러난 비무의 결과는 그저 잠시간의 승리일 뿐, 이 비무를 통해 더 발전하는 쪽이 진정한 승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가만히 두 손을 모아 포권 해 앞으로 내밀었다.
“잘 배웠습니다. 귀문에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
허산자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하나 그 역시 이곳에 무당을 대표해 나온 자였다. 상대의 예의를 예의로 받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잘…….”
입술을 질끈 깨문 그는 억지로 포권 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잘…… 배웠습니다. 귀문의…… 귀문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어깨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현상은 굳이 그 양을 오래 지켜보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승리가 기쁜 것은 사실이나, 패자에게 치욕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패한 자의 심정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바로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그의 고개를 다시 돌려세우는 목소리가 울렸다.
“다만!”
허산자가 두 눈에 핏발을 세운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걸로 화산이 무당을 이겼다고 생각하지는 마시길 바랍니다. 이건 그저 한 번의 비무일 뿐입니다! 아직 화산은…….”
“무당을 따라잡기는 먼 문파지요.”
“…….”
“알고 있습니다, 도장.”
현상은 선선히 미소를 지었다.
“무당이 있기에 화산이 노력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귀문에도 화산이 그런 존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그럼.”
가볍게 몸을 돌린 그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좋은 날이구나.’
비무대 위로 내리쬐는 햇살이 괜히 더욱 따뜻하고 기껍게 느껴졌다.
가야 할 길은 여전히 멀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만은 이 따사로운 볕을 즐기고 싶었다.
호북성 무한.
무당의 안방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화산이 무당을 상대로 완전한 승리를 거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