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8화. 계속하자고. 이제 시작이니까. (3)
허공은 어이없다는 듯 웃어 버렸다.
‘화도 나지 않는군.’
조금만 더 어렸다면 어린아이의 객기로 취급하여 봐줬을지 모른다. 하지만 허공이 보기에 청명은 이미 자신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할 나이였다.
“모든 화는 혀 끝에서 나오는 법.”
허공의 검 끝이 청명을 똑바로 겨누었다.
“자네는 스스로 뱉은 말들에 책임을 져야 할 걸세.”
무당 장로의 말에는 그에 합당한 힘이 실린다. 하지만 청명은 그 엄중한 말을 듣고도 심드렁할 뿐이었다.
“제가 책임하면 어디 가서 안 빠지죠. 한 책임 하거든요.”
“……못 당하겠군.”
허공은 작게 고개를 저으며 가만히 기운을 끌어올렸다.
솔직히 화가 났다.
그의 무례한 언행만 두고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일에 뒤흔들릴 만큼 그의 수양이 얕진 않았다.
다만 그와 무당의 검을 얕잡아보는 듯한 태도가 신경에 거슬렸다.
그리고 저 눈. 저 눈이 못 견디게 거슬렸다.
‘이해할 수 없군.’
그가 살아온 세월이 어디 하루 이틀이던가.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만큼 수많은 이들을 만났고, 자연스레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이들과 검을 겨뤘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눈빛만 보아도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저건 분명 강자가 약자를 바라보는 눈이다.’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근거 없는 자신감?
물론 가질 수 있다.
기세에서 눌리기 싫어서 부리는 허세?
그래. 그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 것쯤은 얼마든지 이해해 줄 마음이 있었다. 화산에서만 성장한 천재가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알기란 어려운 일일 테니까.
하지만 저 눈은 그런 눈이 아니다.
저건 근거 없는 오만함 바탕으로 상대를 무시하는 눈이 아니었다. 정말 상대보다 무조건 우위에 서 있단 확신을 가진 자만이 저런 눈빛을 보일 수 있다.
“흠.”
허공은 작게 헛기침을 하고 천천히 입을 뗐다.
“그저 가르침을 준다고 했었지. 딱히 훈계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네만.”
그의 눈빛이 점점 더 어둡게 가라앉았다.
“아무래도 자네는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알 필요가 있겠군.”
“호오.”
청명이 씨익 웃었다.
“그것 참 듣던 중 반가운 말이네요.”
“응?”
“지금까지 저한테 그 말을 했던 사람이 꽤 많았는데, 성공한 사람이 아무도 없거든요? 덕분에 저는 아직도 하늘이 얼마나 높은 줄 모르죠.”
“…….”
“장로님이 그걸 알려 주신다면 참 고마울 것 같네요.”
허공의 얼굴에 서려 있던 여유는 이제 흩어진 지 오래였다.
딱히 대단한 말도 아니건만, 저 태도와 눈빛이 자꾸만 그의 수양을 깨뜨리는 느낌이었다.
그때 청명이 다시 피식 웃었다.
“그런데 가르침이라……. 세상이 많이 바뀌기는 했나 보네요. 요즘은 그렇게 살기를 풀풀 흘리는 걸 가르침이라고 하나 보죠?”
허공이 살짝 흠칫했다.
‘저 녀석이 설마 내 살기를 느꼈단 말인가?’
뭐라도 변명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데 청명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아이, 됐어요. 뭔 비무대에 올라와서 말이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네.”
“…….”
“어차피 중요한 건 결과 아니겠어요? 그쪽 말이 옳은지 내 말이 옳은지 붙어 보면 알겠죠.”
청명의 검이 자신만만하게 허공을 겨누었다. 허공은 그만 웃고 말았다.
‘적어도 배짱만은 천하제일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군.’
그래서 더 위험하다.
강한 자가 반드시 강한 영향력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무학만을 탐하여 사형제와의 교류조차 끊고 스스로의 검에만 몰두하는 이는 아무리 강해져도 문파를 바꾸지 못한다.
하지만 저런 이는 그 강함과는 별개로 문파를 이끌어 나가게 되는 법이다.
말을 섞을수록, 또 지켜볼수록 결심이 확고해졌다.
허공의 검 끝에서 푸른 검기가 솟아올랐다.
‘아무래도 오욕을 감수해야 할 모양이군.’
그의 눈이 맹수의 그것처럼 흉성(凶星)을 머금었다.
“소도장은 조심하도록 하게. 나는 검을 쓸 때 자비를 모르는 사람이니.”
“그 말 그대로 돌려드리죠.”
심공을 암송한 허공은 평온을 되찾았다.
검을 든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니 사위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고요가 내려앉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간임에도 바늘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릴 것처럼 조용했다.
먼저 그 침묵을 깨고 나선 것은 다름 아닌 허공이었다.
팟!
그의 검이 앞으로 쭉 내뻗어졌다.
배분 차이가 나는 이들이 검을 겨룰 때는 배분이 낮은 이에게 세 번의 공격을 양보하는 것이 강호의 상식이다. 하지만 지금 허공은 청명의 공격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움직였다.
마치 이 비무에는 배분과 직위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말이다. 그가 얼마나 이 비무에 진심으로 임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엿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짧게 끊어 친 검 끝에서 발출된 검기는 눈 깜짝할 새 청명에게 거의 도달했다.
‘빠르다!’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은 백천조차 포착하지 못할 만큼 가공할 속도였다.
하나.
쾅!
짧은 폭음이 울렸고, 동시에 날아들던 검기가 부러질 듯 꺾여 바닥에 처박혔다.
콰가가가각!
거친 소음이 이어졌다. 허공의 검기는 단단한 청석을 파고들며 바닥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청명이 태연하게 검을 휘둘러 날아드는 검기를 바닥에 내쳐 버린 것이다.
딱히 대단할 것 없는 단순한 교환이었다.
하지만 이 광경을 본 이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으니 제대로 이해가 될 리 없음에도 감탄사를 터트렸고, 심지어 무위가 높지 않은 이들도 그 쾌속함에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이 교환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이들은 감히 숨도 내쉬지 못했다.
“이게…….”
조걸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게 진짜 검수들의 비무.’
확실히 다르다.
왜 다르다고 느끼는 건지는 스스로도 명확히 알지 못했다. 이건 딱 떨어지는 논리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손끝으로 느끼는 감각의 문제였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저 두 사람이 지금 조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서 검을 나누고 있다는 점이었다.
‘조금 더.’
더 보고 싶다.
그런 그의 갈증을 풀어 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허공의 검이 다시 한번 공간을 갈랐다.
파아아앗!
쾅!
검기를 내뿜는 발출음과 청명의 검이 맞받아치는 소리가 거의 동시에 울려퍼졌다.
그렇게 날아드는 몇 번의 검기를 연이어 힘든 기색도 없이 모조리 쳐낸 청명은 차분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해를 못 하는 모양인데.”
“…….”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졌다는 추한 변명을 늘어놓고 싶지 않으면 제대로 하는 게 좋을 거예요.”
허공의 얼굴에서 감정이 씻은 듯 사라졌다.
저 말에 흔들린 게 아니다.
그를 뒤흔든 것은 그가 날린 검기를 너무도 쉽게 쳐내는 청명의 검이었다.
‘저건 대체 뭐란 말인가.’
아는 만큼 보인다. 이는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진리다.
조걸은 그저 감각으로 잡아 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 허공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검이 그리는 궤적. 검을 다루는 힘의 배분. 검과 검기가 충돌하는 순간 느슨하게 충격을 흡수하는 기운의 운용.
소름이 돋을 만큼 일체의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검격.
대체 저 검에는 무엇이 실려 있단 말인가?
평생을 검만 바라보며 살아온 허공은 직감적으로 저 검에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그의 반도 살지 않은 아이의 검이 그의 이해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말인가?
전신의 털이 쭈뼛 곤두섰다. 서늘하다 못해 시린 한기가 등골을 타고 내달렸다.
인정할 수 없는 일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일까.
“하아아아압!”
이내 잡념을 날리듯 고함을 내지른 허공이 검을 휘둘렀다. 날카롭되 웅혼한 검기가 청명을 향해 연이어 날아들었다.
중첩.
먼저 날아든 검기에 뒤이어 발출된 검기가 겹치고, 뒤따르는 검기가 다시 겹쳐졌다. 그렇게 몇 번이고 겹쳐진 검기는 마치 거대한 벽처럼 청명을 덮치고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허공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을 직면했다.
그가 만들어 낸 거대한 검벽(劍壁)을 향해 청명이 느릿하게 한 발짝을 내민 것이다.
마치 눈앞에서 날아드는 검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무슨!’
허공이 두 눈을 부릅떴다. 금방이라도 검기가 청명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파아아앗!
하지만 그때 청명이 태연하게 내뻗은 검이 검벽에 틀어박혔다.
콰가가가각!
중첩되고 중첩된 벽을 일 검에 찢는다는 건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검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다.
가가가각!
연이어 휘둘러진 검이 검기의 벽 중앙을 후려치고, 다시 무자비하게 찌르고 비틀었다.
콰각!
그렇게 생겨난 틈으로 검이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하앗!”
뒤이어 충천(衝天)한 붉은 검기가 허공이 만들어 낸 검기를 말 그대로 찢어발겼다.
비산하는 검기의 파편들 사이로 청명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늘어뜨린 검이 작게 까딱거렸다. 다만 그의 가라앉은 눈에는 흔들림이라곤 존재하지 않았다.
“…….”
천하의 허공조차도 이 순간만큼은 할 말을 잊었다.
물론 그도 이 한 수로 승기를 잡을 거라고는 애초에 생각지 않았다. 그저 한 번 물러나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 화산의 제자는 물러나기는커녕 되레 그와 같은 방식으로 받아쳐 검기를 무력화시켰다. 어느 하나 그에 비해 부족한 것이 없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듯.
실로 지독한 승부욕이었다.
허공은 천천히 다가오는 청명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입장을 다 떠나서 순수한 감탄을 전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청명의 입가가 기묘하게 비틀렸다.
“……삼 초.”
음?
허공의 의문 어린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청명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새하얀 이가 드러나도록 웃었다. 어쩐지 섬뜩한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이걸로 세 번 다 양보했어요.”
“…….”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해하던 허공의 몸이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듯 경련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분노로 온몸이 벌벌 떨렸다.
‘삼 초? 설마…….’
강호의 상식.
비무를 치를 때, 배분이 높은 이는 배분이 낮은 이에게 세 번의 공격을 양보한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은 아니지만, 그 실력에 현격한 차이가 있을 때는 상대가 너무 크게 좌절하지 않도록 배려를 해 주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 삼 초의 양보를……
‘저놈이 내게 베풀었다는 건가?’
“이…….”
허공의 표정이 처절하게 무너졌다.
이건 그의 생에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큰 굴욕이었다.
“이 빌어먹을 놈이…….”
손자뻘에 불과한 놈이 그를 배려하여 삼 초를 양보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사문의 명예와 그의 임무 등, 그 모든 것이 흐려지고 오로지 청명이라는 존재 하나만이 그의 안에서 팽창했다.
눈앞이 아찔할 정도의 분노가 온몸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분노로 이성을 잃어 가는 그의 귓가에 청명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이 정도면 배려는 충분히 해 드렸으니…….”
부러 살짝 뜸을 들인 청명은 또렷하게 말했다.
“제 검이 무정하다 탓하지 마세요.”
“이, 이…….”
결국 허공의 이성이 끊어졌다. 이렇게 수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생에 단 한 번도 없었던 굴욕을 당했으니 그러고도 남았다.
“이노오오오오오오옴!”
짐승 같은 비명을 내지른 허공은 살을 모조리 베어 낼 것 같은 살기를 내뿜으며 달려들었다.
그런 그를 맞이하는 청명의 입가에 마귀와도 같은 미소가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