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7화. 계속하자고. 이제 시작이니까. (2)
숨이 막혀 왔다.
저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감정과는 별개로, 이 비무에 얼마나 많은 것이 걸려 있는지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고 보니 지난 비무가 모두 여흥처럼 느껴지는군.’
한쪽은 무당의 장로인 허공.
그리고 반대쪽은 천하제일 후기지수이자 명실상부한 화산제일검 청명.
서로가 걸맞은 상대인가를 떠나서, 누구라도 한 번쯤 보고 싶은 승부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이 승부의 결과는 아마 지금까지 화산이 본산을 떠나와 벌인 그 어떤 일보다 더 소란스레 천하를 떠돌게 될 것이다.
“사형.”
백상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길 수 있을까요?”
“흐음.”
백천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다가 어렵사리 말했다.
“……어려워야 정상이긴 한데.”
“역시나 그렇죠?”
“…….”
백상이 보기에도 청명은 괴물 같은 놈이다.
이제는 화산만의 천재를 넘어 천하제일기재의 영역에 접어든 백천이나 유이설조차도 청명의 앞에서는 여전히 어린아이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상대가 무당의 장로라면…….’
상식적으로는 상대가 될 리가 없다.
이건 백상뿐 아니라 화산 제자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청명이가 상처받지 않아야 할 텐데.”
평범한 삼대제자라면 무당의 장로에게 패한다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저놈은 워낙 천상천하유아독존이다 보니, 상처를 입고도 남을 것만 같았다.
걱정 어린 시선으로 청명을 바라보는 백상의 귓가에 심드렁한 목소리가 스쳤다.
“그러니까…… 상식적으로는 그런데.”
“……예?”
백천의 얼굴에 묘한 빛이 어렸다.
“저게 어디 상식이 통하는 놈이어야지.”
백천의 말에 나머지 오검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도무지 지는 게 상상이 안 갑니다.”
“설천상이 셀까요, 아니면 저 허공이라는 장로가 셀까요?”
“……음. 이렇게 봐서는 확실히 모르겠는데.”
“안 질 것 같아.”
“저도요.”
오검의 대화를 듣던 백상의 얼굴이 황당함에 일그러졌다.
“다들 제정신이십니까? 상대는 무당의 장로라고요.”
“아니까 하는 말이다. 아니까…….”
말해 놓고도 본인의 말에 황당한 듯 백천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지. 상대는 무당의 장로지. 그러니 이게 말이 안 되는데…….”
그러다 이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겠느냐. 나는 청명이 놈이 지는 게 더 상상이 안 가는 것을.”
“……농담이시죠?”
“나도 농담이었으면 좋겠다.”
백상이 멍하게 백천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살펴봐도 농담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망연히 주변을 돌아보던 백상의 눈에 이 상황을 그나마 객관적으로 봐 줄 만한 한 사람이 보였다.
“스, 스님. 혜연 스님. 뭐라고 말 좀 해 주십시오.”
“……아미타불.”
혜연이 반장을 하더니 근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무당의 검은 무척 강하지요. 게다가 무당의 장로라면 그 검이 하늘에 닿았다고 해도 무방한 이들입니다.”
“그, 그렇죠.”
“그러니 좋은 승부가 될 수 있을 겁니다.”
“…….”
백상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다 미쳤나, 진짜?’
상대는 저 무당, 그러니까 천하제일검문의 장로다.
청명이 놈이 아무리 배분과 나이를 뛰어넘는 괴물 같은 놈이라지만 이건 절대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이게 뭔……. 이게…….”
넋이 나가 헛소리를 해 대는 백상을, 백천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놈들은 후기지수비무대회 이후로는 청명이 검을 펼치는 걸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만인방과의 격전 때에도 청명은 남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전투를 치렀고, 북해에는 이들이 따라오지 않았다.
그나마 최근 대별채와의 전투에서 얼핏 보기는 했겠으나 그것도 전투 와중이니 제대로 보지는 못했으리라.
게다가 대별채의 채주와 무당의 장로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실력을 넘어 가지는 위엄이 다르다.
‘그러니 이런 반응도 당연하겠지.’
머릿속에서 청명의 실력을 후기지수 중 최고 정도로 평가하고 있었을 테니까. 기껏해야 혜연보다 조금 나은 정도라 여기고 있을 것이다.
“쯧.”
백천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하고 싶지 않았던 말을 내뱉었다.
“다들 잘 지켜봐 둬라.”
“……예?”
“성격이야 개차반이지만.”
오검이 기다렸다는 듯 추임새를 넣었다.
“야차.”
“짐승 같은 놈이지만.”
“짐승한테 사과하십시오, 사형!”
“…….”
백천이 나지막이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저놈이 지금 명실상부한 화산제일검이다. 너희가 쫓아야 하는 검이 뭔지 잘 봐 둬라.”
그 말에 화산 제자들이 잡담하던 걸 멈추고 비무대에 오른 청명에게로 집중했다. 그들의 눈에는 묘한 기대와 흥분이 실려 있었다.
‘화산신룡.’
한편 무진은 비무대에 오른 청명을 보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청명은 달라진 게 별로 없어 보였다.
그새 키가 조금 자라고 몸집이 좀 더 커진 느낌은 있지만, 그때 보았던 여유 가득한 표정이며 몸짓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에게 참혹한 패배를 안겨 주었던 그때와 비교했을 때 말이다.
사람은 달라진 게 없지만, 청명이 가진 위상은 그때와 비교조차 할 수 없다. 그때도 지금도 천하제일후기지수로 불리고는 있으나 그 말에 담긴 의미는 결코 이전 같지 않았다.
그리하여 무진이 받아들이는 과거의 패배가 조금쯤 가벼워졌는가?
그럴 리가.
청명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진득한 호승심과 열정이 어렸다.
“진정하거라.”
“아…….”
그때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무진은 저도 모르게 쥐고 있던 주먹에서 힘을 풀었다.
“네가 설욕할 기회는 이번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있다.”
“……알고 있습니다.”
“사문의 명예를 되찾는 것이 우선이다.”
무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여기서 대신 나서겠다고 떼를 쓸 생각은 없었다. 이미 상황은 그가 어떻게 해 볼 수 없을 정도로 흘러 버렸으니까.
그저 화산신룡에게 설욕하는 이가 그가 아닌 사숙이라는 사실에 못내 아쉬울 뿐이다.
“저 아이는 확실히 대단한 아이다. 너를 꺾었을 뿐 아니라, 소림제일기재에게도 사실상 승리했고, 저 대별채 광우도의 목까지 베어 냈다고 하는구나.”
“……예.”
“하지만 지금 대단한 것이 반드시 후일로 이어진다고는 볼 수 없다.”
무진이 의문 어린 눈으로 허산자를 응시했다.
“무슨 의미십니까?”
“빛나는 재능이 사라지는 것은 수도 없이 보았다.”
“…….”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고고한 천재는 단 한 번의 패배로도 빛을 잃어버리기 마련. 저 아이에게 패배를 씹어 삼키고 다시 올라설 굳은 심지가 있을지는 모르겠구나.”
허산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화산은 위험하다.’
이곳에 올 때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이렇게 그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니 화산은 강호의 소문이 무색할 만큼 뛰어나다.
이대로 둔다면 대체 얼마나 더 강해질 것인지 두려울 지경이었다.
‘내 실수는 제대로 된 근원을 찾지 못했었다는 게지.’
허공이 나서는 순간에야 알게 되었다.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이를 앞에 둔 화산 제자들이 누구를 바라보는지.
적의 입장에서도 내심 그 실력을 인정하며 감탄할 수밖에 없었던 저 오검조차 허공이 나선 순간 무의식적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저 아이가 이끌고 있었던 게야.’
그런 소문을 들은 적은 있으나 이렇게 보기 전까지는 믿지 못했었다. 화산이 아무리 몰락했다고는 하나 한때는 천하를 오시했던 명문이다. 그런 문파를 이제 갓 약관을 넘은 아이가 이끌어 간다는 말을 대체 누가 믿겠는가?
상식이라는 게 조금이라도 있는 이라면 웃어넘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재능과 실력으로 한 몸에 기대를 받으며 훗날 문파의 미래를 짊어질 동량일 순 있어도 문파의 중심이 되어 상승세를 이끌어 간다는 소문은 과장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전자가 아니라 후자가 사실이었던 것이다.
이제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허공의 판단은 정확했다. 화산의 기세를 꺾기 위해서는 다른 누구도 아닌 저 청명부터 꺾어야 한다.
무당이 설사 완전한 승리를 거둔다고 해도 청명이 꺾이지 않는 이상, 화산의 기세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는 거꾸로 말하자면 무당이 완벽하게 패한다고 해도 저 청명만 꺾어 낸다면 화산은 더는 힘을 쓰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저 아이만은 이 자리에서 꺾어 버려야 한다.
‘설사 과하게 손을 써서 불상사가 생긴다고 해도.’
그리고 허공이라면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허도진인이 바로 저자를 보낸 것 아니겠는가?
‘무량수불.’
도인을 자처하는 이로서 감히 품어서는 안 될 마음이지만, 그에게는 도리보다 사문의 미래가 몇 배는 더 중요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허공이 화산의 맥을 끊는다.’
허산자의 눈이 차게 빛났다.
비무대 위로 올라와 앞에 마주서는 청명을 보며 허공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실로 어색한 상황이었다.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그가 무려 세 배분이나 낮은 이와 이리 진지하게 검을 나눌 일이 생길 거라 예상한 적 있었던가?
정말이지 낯뜨거운 일이지만, 사람이 하고픈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는 법.
평소의 방종을 보장받는 대신 맡은 일은 확실히 처리해야 하는 것이 무당 장로들의 역할이었다.
허공은 진지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검 한 번 섞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구나.”
“제가 좀 비싼 몸이라서요.”
허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렇지. 그저 비싼 몸이 아니라 아주 귀한 몸이시지.”
“오? 아시네요?”
“알다마다.”
허공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비무대 밖에서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너와 검을 섞기 위해 무당이 패배를 인정해야 했고, 장문께서 나를 특별히 보내지 않으셨느냐.”
“…….”
“꽤 비싼 대가를 치렀다만, 이렇게 너를 마주하고 보니 치른 대가가 아깝지 않구나.”
이건 진심이었다.
비무대 아래에 있으니 허세를 부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청명이라는 아이는 그의 앞에 서 있으면서도 비무대 아래에서 보였던 태도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대체 얼마나 성장할지 두려울 정도로군.’
허공의 결심이 더욱 확고해졌다.
장문인의 방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허산자의 논리도 때로는 신물이 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무당이라는 문파를 바로 세우기 위한 것.
이 아이가 무당의 앞길에 크나큰 방해가 된다면 그는 오욕을 뒤집어쓴다 해도 그 방해물을 제거할 생각이었다.
“한 수 가르쳐 주마. 내 훈육은 꽤 따끔하니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스르르릉.
허공이 천천히 검을 뽑았다.
하지만 상대가 자세를 잡았음에도 청명은 딱히 긴장하는 기색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이놈이고 저놈이고.”
“……뭐라 했느냐?”
날카로운 물음에 청명은 피식 웃었다.
온화하게 뻗어오는 허공의 기세 속에는 어지간해서는 알아챌 수 없을 만큼 미미한 살기가 섞여 있었다.
“뭐 구파 놈들이야 원래 그랬으니까 그건 이해할 수 있는데 말이야.”
영문 모를 말을 늘어놓는 청명을 보며 허공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의 의혹은 금세 사라졌다.
스르르르릉.
청명이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아까부터 자꾸 가르친다느니, 아깝지 않다느니.”
“…….”
“언제부터 무당이 화산 위에 있었다고 입을 털어 대는지 모르겠는데.”
청명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그 자부심, 제가 아주 산산조각 내 드리죠.”
두 사람의 성난 시선이 허공에서 서로 얽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