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619화 (617/1,567)

619화. 화산을 대표하는 검이 될 테니까. (4)

손끝이 으스러지는 것 같다.

아니, 손끝만이 아니다.

팔, 어깨 따질 것 없이 상체 전체가 무거운 종(鐘)이라도 올려 둔 것처럼 뻐근했다.

저 검기가 아직 윤종의 검 끝에 닿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실로 무시무시하다 표현해야 할 내력이었고, 얼핏 공포마저 느껴질 만큼 그 기세가 도도했다.

지금껏 다른 강자들을 겪을 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압박감이 윤종을 짓눌렀다.

‘확실히 다르다.’

강하지만 마교의 주교와는 비할 수 없다. 주교의 힘은 말 그대로 천재지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위력이었으니까.

하지만 다른 게 있다면…….

‘이건 오로지 나 혼자 버텨 내야 한다.’

청명이 함께 싸워 주던 것과는 다르다. 조걸이 등을 받쳐 주고 백천과 유이설이 이끌어 주는 그런 싸움이 아니다.

승리도 패배도 온전히 윤종의 몫이 될 것이었다.

‘그러니 질 수는 없지!’

우우우우우웅!

단전에서 솟아오른 내력이 기혈을 타고 그의 전신을 돌았다. 공청석유와 자소단을 추가로 복용한 날 이후, 윤종은 그 내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해 왔다.

그 노력의 결실이 지금 그의 검 끝에 어렸다.

촤아아아아아악!

밀려온 검기가 그의 검 끝과 만나는 순간 좌우로 갈라졌다.

“큭!”

윤종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팔이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만 같았다.

이건 마치 흐르는 강 한가운데에 서서 밀려오는 강물을 가르겠다며 검을 휘두르는 형국이었다. 애초에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야 한다

.‘조걸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할 것도 없다. 아마 조금 전에 보여 줬던 것처럼 날다람쥐처럼 밀려오는 내력을 피해 내고 상대의 빈틈에 검을 찔러 넣었을 것이다.

그 한순간의 틈을 파악하고 모든 것을 건 일격을 날릴 만큼의 감각이 윤종에게는 없었다.

우득! 우드득!

손목에서 뼈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위만 한 쇳덩어리라도 달려 있는 것처럼 검이 무겁게 느껴졌다.

‘사숙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 역시 빤하다.

백천에게 물러서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라면 강물처럼 밀려오는 검기를 정면으로 뚫어 내었을 것이다. 힘을 힘으로 맞받아서 되레 전진했을 테지.

그래, 흡사 이야기 속에 나오는 영웅처럼.

하지만 윤종에게는 그런 강건함과 천재성도 없었다.

“쿨럭!”

목구멍으로 뜨거운 것이 울컥 솟아올랐다.

압력에 이기지 못한 내부의 어딘가가 출혈을 일으킨 모양이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넘어오며 코를 찔렀다.

‘내게는 없어.’

윤종의 눈이 가라앉았다.

유이설이라면 이런 느린 검기 따위는 몸에 닿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과감함까지 갖추고 있으니 피하는 것과 동시에 길을 뚫었을 것이다.

청명? 청명이 놈이라면 검을 떨치기도 전에 저 머리 위 도관을 찌부러뜨리며 검집으로 대가리를 깨 버렸겠지.

하지만 윤종에게는 없다.

그런 눈부신 재능들이.

윤종의 시선이 슬쩍 돌아갔다. 몰려오는 기운을 받아 내는 것만으로도 버겁지만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토록 간절히 그만을 바라봐 오는 삼대제자들을 외면하는 방법을, 그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한테 뭘 어쩌라는 거냐?’

재능이 없다고 바닥에 엎드려 천재들이 날뛰는 걸 지켜보고만 있으라고?

웃기는 소리.

“내게는!”

그는 이를 악물며 기운을 끌어 올렸다.

“내 방식이 있다!”

사람이란 응당 폭포를 거스를 수 없고, 몰려오는 강을 막을 수도 없다.

때문에 백천의 눈에 지금 윤종의 모습은 너무도 위태로워 보였다.

한참 굳은 얼굴로 보던 그가 저도 모르게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청명의 손을 뻗어 그런 그의 팔을 꽉 움켜잡았다.

백천이 움찔하며 돌아보았다.

“그냥 좀 지켜봐 줘라, 이 천재 양반아.”

“…….”

그 와중에도 청명의 시선은 처음부터 줄곧 윤종에게서 한 치도 떨어지지 않았다. 백천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너, 너무 무모하지 않느냐! 저 힘을 정면으로 맞받는 건…….”

“사숙은 되고, 사형은 안 된다?”

“너는 왜 자꾸 그렇게!”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아.”

백천이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도 머릿속으론 알고 있었다.비무대 위에 오른 게 그였다면 분명 저 기운을 정면으로 뚫으려 했을 것이다. 그게 가장 확실하게 승리를 거머쥘 수 있는 방법이니까.

하지만…….

‘내가 진정 윤종이를 무시하고 있는 건가?’

자못 심각해진 백천의 얼굴을 흘끗 본 청명이 피식 웃었다.

“농담한 것 가지고 그렇게 심각하게 굴 것 없어.”

“…….”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한 거니까. 사형에게는 아직 무거운 짐이기는 해.”

“하면 왜?”

“그런데 윤종 사형은 말이야.”

청명은 이제 검기에 휩쓸려 거의 보이지도 않는 윤종의 형체를 담담히 보며 말했다.

“그 무거운 짐을 끌고 나아가야 하는 사람이거든.”

“…….”

잠깐 고민하던 백천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왜 그래야 하는 거냐? 나도, 다른 이들도 도울 수 있지 않느냐? 네가 한 말을 이해 못 한 건 아니다만, 이건…….”

“아니. 사숙은 이해 못 해.”

청명이 고개를 저었다.

“사숙은 화산의 이름을 만방에 떨칠 사람이지. 가장 화려하게 빛나야 할 사람이야.”

“나는…….”

“하지만 사숙의 검은 이어지지 못해.”

이유야 간단하다.

백천은 천재니까.

굳이 세상을 떨게 할 만큼 빛나는 재능일 필요도 없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 앞서 있는 재능. 그것만으로도 자격을 잃는다.

“돕는다고?”

“그래.”

“사숙의 검을 저기 있는 놈들이 완전히 이해하고 따라할 수 있을까?”

“…….”

백천의 시선이 청명이 턱짓한 곳을 향해 돌아갔다. 간절하기 짝이 없는 눈으로 윤종을 보고 있는 삼대제자들이 모여 있었다.

백천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그동안 이대제자들과 삼대제자들을 꾸준히 수련시켜 왔다. 하지만 그건 결국 기초와 체력, 그리고 대련에 국한된 것이었을 뿐, 제대로 된 검을 전수한 적은 없었다.

이유?

표면적으로는 화산에 운검과 청명이 있으니까.

하지만 백천도 내심으로는 알고 있었다. 그건 그저 면피일 뿐이라는 것을. 그는 저들을 제대로 가르칠 수 없었다. 기본적인 재능과 이해력이 다르니까.

“사숙도, 사고도, 심지어 조걸 사형도 마찬가지야. 나는 이렇게 쉽게 하는 걸 왜 하지 못하냐고 다그칠 수 있을 뿐이지. 평범한 재능을 타고난 이들이 어떻게 검을 익히는지 평생 이해할 수 없어.”

“……그래서 이어질 수 없다고?”

“그래. 정확히는, 이어져선 안 돼.”

청명이 싸늘한 목소리로 딱 잘랐다.

“문파의 무학이라는 것은 입문하는 이들 중 가장 이해력이 떨어지는 이에게 맞춰져야 해. 천재만 배울 수 있는 무학은 언젠가는 맥이 끊기고 실전되고 마니까.”

“…….”

“명문은 천재를 키우는 곳이 아니야. 범재를 강자로 만드는 곳이 명문이고, 그런 곳만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살아남는다.”

문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천재를 키워 내는 것이 아니다.

특별한 재능 없이 입문하는 평범한 이들을 키우는 것이다.

지금 화산의 구조는 기형적이기 짝이 없다. 단기간에 실력을 올리고 명성을 높이기 위해서 청명은 오검의 실력을 높이는 것에 집중해 왔다.

재능 높은 이들을 강하게 만드는 거야 당연하지만, 이에 대한 반작용도 분명 존재한다.

‘저들 중에 과연 사숙을 이기겠다는 의지를 가진 이가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애초에 타고난 것이 다르다고 생각할 테니까.

백천도 유이설도, 그리고 조걸도 저들에게는 참고가 되지 않는다. 방식이 너무도 다르니까.

그런 이들에게 희망이 되어 줄 이가 바로 윤종이다.

딱히 대단한 재능도 없이 오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대단한 강점 하나 없이 험난하기 짝이 없던 오검의 모든 여정을 함께 이겨 낸 이.

수수하고, 찬란히 빛나지 않으며, 그저 버텨 내는 것만으로 자신의 역할을 해 내는 이.

그렇기에…….

‘누구보다 빛나지.’

모자란 재능을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에 대한 정답이 바로 저기에 있다. 스스로 부족함을 느끼는 이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정표가 바로 저기에 있다.

문파의 이름을 빛내는 이들은 천재지만, 문파를 이끌어 나가는 이는 결코 천재여서는 안 된다.

‘장문지재(長門之才).’

장문인이 될 사람은 그렇게 사람을 이끄는 이여야 한다.

과거 청명이 그토록 강했음에도 화산의 누구도 그를 장문인의 자리에 올리려 하지 않았던 것이 그 이유에서였다.

그 자리는 응당 청문의 것이었다.

문파의 장문은 뒤따르는 이들의 이정표가 될 수 있는 자의 자리니까.

“윤종 사형의 가장 큰 단점이 뭔지 알아?”

“모르겠다.”

“너무 잘 안다는 거야.”

“……그건 뭔 소리냐?”

청명이 대답 대신 윤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적당히 몰라도 될 일을 너무 잘 알지.’

윤종은 이미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만이 다른 사제들에게 길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패배가 다른 사제들의 패배나 다름없다는 것을.

저 어깨에 실린 부담은 선두에서 화산을 짊어진 백천보다 오히려 더 무거울 것이다.

‘버텨 내라.’

청명의 두 눈에 찰나간 안쓰러움이 스쳤다.

이것만은 청명도 어찌해 줄 수 없는 일이었다. 청명도 해 본 적이 없는, 할 수 없는 일이니까.

이건 오로지 윤종이 혼자만의 힘으로 스스로 해내야 할 일이었다.

“걱정할 것 없어요.”

그때 내내 말없이 윤종을 바라보던 조걸이 단호히 입을 열었다.

“사형은 안 집니다.”

윤종을 가장 잘 아는 이는 조걸이다. 그 조걸이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비무대를 응시하며 말했다.

“겨우 저 정도에 질 사형이 아닙니다.”

이성에서 나온 게 아니라 믿음에서 나온 말이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청명도 이 말을 그저 믿어 보고 싶었다.

강한 힘이 밀려올 땐 맞받아 내지 않고, 흘려 내거나 피한다.

‘말이 쉽지.’

그건 요령 좋은 이들이나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받아 내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 없었다.

하지만.

‘버티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발은 거목의 뿌리보다 더 단단하게 바닥을 움켜잡고, 하체는 굳건하게 몸을 지탱해야 한다. 허리는 꼿꼿이 세워 바닥에서부터 이끌어 낸 힘을 유지하고, 상체는 느슨하게 풀어 밀려오는 힘을 최대한 흘려 낸다.

그래. 마치 한 그루 나무처럼.저 화산에 핀 매화나무처럼 말이다.

‘그런 거였네.’

새삼 알 수 있었다.

사숙조들이 그토록 강조하던 기본자세가 무엇이었는지. 저 청명이 놈이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말하던 기초가 무엇이었는지.

‘나는 도인이었지.’

도사는 자연을 닮아 가는 이다.

이끄는 가르침을 따라 그저 행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가 나무가 되고, 그가 자연이 된다.

이는 화산이 수백 년 동안 축적해 온 가르침이자 제자들에게 올곧게 전하는 목소리였다.

‘알고 있다.’

그의 등을 지금 사형제들이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지켜보는 이들의 의지가 그의 힘이 된다든가 하는 요령 좋은 일이 실제로 벌어질 리는 없다. 의지는 의지, 힘은 힘이다.

이건 오로지 그 홀로 버텨 내야 할 싸움이다.

우두두둑.

검의 손잡이에 굳건히 붙어 있던 새끼손가락이 끝내 기이한 방향으로 뒤틀리며 떨어졌다. 압력이 전신을 으스러뜨릴 것만 같았다.

‘저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

그런 건 없었다.

그저 한 몸 간수하기에도 버거웠다. 그런 그가 무어 대단하다고 저들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그는 그저 발버둥질할 뿐이다.

필사적으로, 마지막 남은 기력 한 방울까지 모조리 끌어내서!매서운 태풍이 몰아치며 산을 휩쓸어도, 그리하여 가지가 부러지고 꽃이 모조리 뜯겨 나가도 대지에 박힌 뿌리는 끝없이 뻗어 나간다.

그게 나무가 살아가는 법이다.

매화 숲에 얼마나 많은 나무가 있던가? 따로 두고 보면 대개 특출 나게 아름답지 않고, 유별나게 아름다운 꽃을 피워 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하나하나가 모여 일제히 피어날 때, 산은 붉게 물들고 마침내 장관을 이룬다.

우두두둑!

약지마저 부러지며 뒤틀렸다.

생생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윤종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뻗어라.”

그리고 마침내.

태풍에 꺾일 듯 휘청대던 매화나무의 가지 끝에서 옅은 붉은빛을 띤 매화가 가만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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