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7화. 화산을 대표하는 검이 될 테니까. (2)
호흡이 가빠 오기 시작했다. 손끝이 살짝 떨리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하지만 이는 딱히 나쁜 징조는 아니었다. 승부를 앞둔 이가 긴장하지 않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니까 말이다.
적어도 검수라면, 검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자라면 무엇이 걸려 있는지에 무관하게 승부 자체를 무겁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그게 검을 든 자가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다.
“후우.”
윤종은 짧게 심호흡한 후 건너편에 서 있는 무연을 바라보았다.
지금 느껴지는 이 감정은 아무래도 위압감이라 칭해야 할 듯했다. 그럴 만도 했다.
무당의 일대제자.
무당삼검의 일인.
어느 수식어 하나 가벼운 것이 없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 무연은 아직 윤종에게 버거운 상대였다.
하지만…….
‘버겁지 않은 적이 있긴 했던가?’
생각하면 우스울 뿐이다.
화종지회 역시 그에게는 버거웠다. 비무대회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만인방과의 싸움에서는 목숨을 걸어야 했고, 북해에서는 스스로의 한계가 어디인지 뼈저리게 실감했다.
스스로 선택한 길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는 언제나 감당하기 버거운 이들과 싸워야 했고, 이겨 내기에 버거운 일들에 내던져졌다.
‘뱁새가 황새를 쫓으려다간 가랑이가 찢어지는 법이지.’
그는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천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른 이들과 함께 오검으로 불린다고 해서 그가 그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백천은 굳이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은 천재고, 유이설은 때때로 그런 백천마저 능가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괴물이다.
청명?
그놈은 말해 봐야 입만 아프다.
심지어 조걸의 재능마저도 그에게는 눈부실 만큼 대단하게 느껴졌다.
다른 이들의 생각이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윤종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의 재능은 감히 저들에게 비할 수 없다. 그는 하늘을 훨훨 나는 매와 독수리 아래에서 흙먼지를 마시며 달리는 소에 불과하다.
조금만 방심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모두가 그를 추월해 나갈 것이다. 조걸은 물론이고 다른 삼대제자들까지.
알고 있다.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긴장돼 보이는군.”
그때 무연이 나지막이 말을 걸어왔다.
윤종은 고개를 들어 그런 무연을 마주보았다. 생각해 보면 이건 그저 서로의 검을 견식 하는 친교의 자리였다. 그러니 비무 상대라고 해서 이를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꽤 그렇습니다.”
“음?”
그러자 무연이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승부를 겨룰 상대가 이런 말을 건네면 허세로라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 젊은 도사는 담담한 어투로 자신이 긴장했음을 시인하고 있다.딱히 큰 의미를 부여할 일은 아니지만, 왠지 관심이 갔다.
“그리 긴장할 것 없네. 제 실력만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면 승패 같은 것은 자연히 따라오는 게 아니겠는가?”
“확실히 그 말씀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고요한 윤종의 두 눈에 정광이 어렸다.
“제가 자연히 따라오는 것만을 취해서는 안 될 입장이라.”
“호오?”
담담하면서도 당돌하지 않은가.
조금 전 그들의 속을 뒤집어 놓은 조걸과는 그 분위기부터 완전히 달랐다.
‘같은 사형제끼리 이리 느낌이 다르다는 것도 신기한 노릇이로군.’
사람이 어찌 다 같을 수 있겠냐마는, 오랜 세월 동안 같이 생활하고, 같은 무학을 익히고, 같은 일을 겪는 이들의 기질은 비슷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무연이 보기에, 이 화산의 제자들은 신기할 만큼 그 기질이 달랐다.
“그리 걱정이 된다면 굳이 상대로 나를 선택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뭐가 그리 다르겠습니까.”
“흐음?”
무연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 말은 무당삼검이라 불리는 나나, 다른 무당의 일대제자들이나 자네에게는 별 차이가 없다는 뜻으로 들리는군. 맞는가?”
윤종이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제게는 누구 하나 만만치 않다는 걸 말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무연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꽤 관심이 가는 이였지만, 이곳은 긴 대화를 나누기에 적절한 곳이 아니었다. 짧은 대화만으로 상대에게 호의를 품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 호의는 언젠가 다른 곳에서 나눌 날이 있을 터.
“검을 뽑게.”
“예.”
“미리 말해 두지만 나는 만만한 이가 아니네. 최선을 다하게나.”
“그건 굳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잘 알고 있습니다.”
스르르릉.
윤종의 검집에서 매화검이 뽑혀 나왔다.
“최근 몇 년간이라면, 저는 한 번도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까요.”
그는 언제나 필사적이었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
본격적으로 검을 섞기 전, 윤종은 화산의 제자들 쪽을 향해 시선을 슬쩍 돌렸다.
백천을 비롯한 오검이 아닌, 화산의 제자들. 특히나 청자 배, 삼대제자들이 있는 곳을 말이다. 이쪽으로 고정되어 있는 삼대제자들의 눈빛을 확인한 윤종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한테는 버거워.’
삼대제자 중 맏이라는 자리.
이는 딱히 윤종이 원해서 얻은 자리는 아니었다. 그저 나이가 많고 입문이 빨라 자연히 주어진 것에 불과했다.
물론 한때는 자신이 삼대제자의 대사형이라는 사실에 도취되어 즐기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되레 그 사실이 시시때때로 어깨를 짓눌러 왔다.
재능을 타고난 사제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괴물 같은 사제 놈과 함께 싸워 나간다는 것은 범인(凡人)에 불과한 그에게 지나치게 무거운 짐이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윤종이 마음 편히 포기해 버릴 수 없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시작하지.”
“예.”
무연이 무당검의 기수식을 펼쳤다. 윤종 역시 화산의 기수식을 펼쳐 내며 마음을 다잡았다. 검을 치켜든 두 사람 사이에 짧은 긴장감이 흘렀다.
먼저 움직인 것은 무연이었다.
팟!
비무대를 짧게 박찬 무연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윤종의 정면을 찌르고 들어왔다.
실로 쾌속무비한 찌르기였다.
카캉!
윤종은 다급하게 검을 들어 올려 송문고검을 쳐 냈다. 꽤 강한 힘을 실어 쳐 냈음에도 무연의 검은 그 힘을 가볍게 흘려 내더니 재차 윤종을 찔러 들어왔다.
빠르다.’
아니, 빠른 것뿐만이 아니다.
가벼운 교환에 불과했지만, 그 안에는 상승의 묘리가 수도 없이 숨어 있었다. 긴 검이 횡으로 쳐 내는 힘을 버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무연은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순간 윤종이 실었던 힘을 부드럽게 흘려 내고, 그 힘을 역으로 이용하여 재차 검을 찔러 왔다.
이화접목(移花接木)과 능유제강(能柔制强).
한 번에 하나도 제대로 펼쳐 내기 힘든 상승의 묘리가 동시에 중첩된 것이다.
‘이게 무당!’
화산에서는 볼 수 없는 검. 그렇기에 상대하기가 까다로웠고, 그렇기에 막아 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윤종은 짧게짧게 검을 끊어 치며 날아드는 검을 쳐 내고, 피하고, 흘렸다.
‘더 낮게!’
다시 한번 매섭게 들어오는 검을 피하며 윤종은 자세를 낮추었다. 단단히 고정된 다리는 상체가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 덕에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속도로 날아드는 검들을 모조리 피해 낼 수 있었다.
무연의 눈에 가벼운 이채가 어렸다.
“나쁘지 않군.”
쇄애애애액!
동시에 그의 검이 조금 더 빨라졌다.
카가강!
하나 윤종의 검은 이번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일체의 낭비가 없는 검.
그저 빠르게 휘두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속도가 대단하다 해도 그 검로(劍路)가 올바르지 않다면 결국엔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윤종의 검은 상대에 검에 이르는 가장 빠른 경로를 완벽하게 그려 내고 있었다.
‘단단하구나.’
무연의 안색이 조금 변했다. 앞서 보았던 조걸의 검은 실로 쾌활하고 빠르며 기괴했다. 하지만 지금 윤종이 선보이는 검은 그야말로 굳건하고 충실했다.
‘차라리 무당의 검에 좀 더 가깝겠군.’
유검(柔劍)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 기저에 깔린 것은 그리 다르지 않다. 그가 날린 검이 바람이라면, 윤종은 그 바람을 받아 내는 거목과도 같았다.
‘이 나이에…….’
기초를 단단히 하고, 굳건한 하체를 바탕으로 상체를 가벼이 한다. 말로 할 때는 참으로 쉽다.
하지만 그걸 이루기 위해서는 죽을 만큼의 기초 수련이 동반되어야 한다. 심지어 그저 잠깐 열심히 한다고 완성되는 것도 아니다.
수많은 시간, 수많은 나날을 쉬지 않고 우직하게 같은 수련을 하고 또 해야 겨우 그 효과를 눈에 띄게 볼 수 있는 것이 기초다.
이 나이에 이런 굳건함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수련을 해야 했을까?
하루 만 번의 휘두르기? 무학을 목표로 하는 이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만 번의 휘두르기를 열흘 내내, 백 일 내내, 천 일 내내 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무연의 시선이 슬쩍 윤종의 손으로 향했다. 검 손잡이와 맞닿은 채 살짝 드러난 손바닥엔 아니나 다를까 굳은살이 잔뜩 박여 있었다.
“좋구나!”
흥이 돋은 무연이 검을 크게 휘둘렀다.
촤아아아악!
그의 검 끝에서 물과 같은 검기가 강처럼 도도하게 흘러나왔다. 맑고 푸른 검기가 윤종을 향해 물밀 듯 밀려들어 갔다.
쾌검에서 유검으로, 이윽고 중검으로의 급격한 전환.
하지만 윤종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촤아아아아악.
비스듬히 세워진 윤종의 검이 검기를 머금고 밀려오는 무연의 검기를 옆으로 흘려 냈다.
촤아아아악!
힘으로 저항하지 않고 최대한 흘려 내는 일 수였다. 하지만 모든 힘을 다 흘려보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콰드득!
윤종의 발이 단단한 청석을 파고들었다. 검을 잡고 있는 손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흐르는 물의 힘은 바위를 부수고, 지형을 바꾼다. 폭발할 듯 몰아치는 힘은 순간으로 끝나지만, 면면부절 이어지는 힘은 한 번 받아 낸다고 해서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큭!”
이를 악문 윤종은 검을 확 밀쳐 내며 몸을 옆으로 뺐다.
하지만 그 순간, 무연이 당연히 알고 있었다는 듯 앞으로 달려들어 어깨로 윤종을 들이받았다.
투우우웅!
가죽 북을 세게 친 듯한 소리와 함께 윤종이 뒤로 맥없이 튕겨 나갔다.
쿵! 쿵!
바닥에 몇 번이고 처박힌 윤종은 이내 다시 처박히기 직전에 빙글 몸을 회전시켜 검을 청석에 콱 박아 넣었다.
카가가각!
그러고도 한참이나 밀려난 그는 재빠르게 다시 자세를 잡았다. 입술 새로 피 한 줄기가 죽 흘러내렸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처음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훌륭하군.”
무연의 입에서 순수한 감탄이 새어 나왔다.
무당은 정파. 대기만성의 검을 추구하는 곳이다.
그런 만큼 무당은 세상 그 어느 문파보다 기초를 강조한다. 당장 눈앞의 깨달음을 위해 기초를 등한시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는 곳이 바로 무당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윤종이라는 아이의 검은 무당의 기초가 초라하다 느껴질 만큼 두터웠다.
“자네를 조금 얕봤던 걸 사과하지.”
“…….”
“지금부터는 전력으로 갈 테니, 어디 한번 최선을 다해 받아 보게.”
“예!”
“가네!”
탓!
다시 한번 바닥을 박찬 무연은 나비처럼 가볍게 윤종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의 검이 수십 개의 검영을 그려 냈고, 동시에 동그란 원을 그린 그의 왼손에선 새하얀 장력이 시내처럼 흘러나와 윤종을 향해 밀려갔다.
내내 평정을 유지하던 윤종도 이 광경에는 두 눈을 부릅떴다.
‘도, 동시에 두 가지 무공을?’
수많은 검영과 장력이 윤종을 향해 휘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