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601화 (599/1,567)

601화. 하려면 확실하게 해야지. (1)

“흐음.”

서찰을 읽는 당군악의 입술 새로 묵직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리 길지 않은 내용을 몇 번이고 반복해 읽던 그는 이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은 그리되었군.”

조용히 앞을 지키고 있던 당패가 그 표정을 보며 고소를 머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웬만하면 미소를 보여 주지 않는 이가 바로 당군악이었다. 당가 내에서도 특별히 더 그랬다.

물론 가주의 무게라는 것이 감정을 억누르는 면도 있겠으나, 화산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당군악이 보여 주는 반응은 확실히 다른 면이 있었다.

“화산이 세상에 알려진 것보다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 대별채를 피해 없이 토벌해 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당패는 화산신룡의 실력과 화산의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 중 하나다. 하지만 이번에 화산이 보여 준 활약은 그런 그마저 크게 놀라게 했다.

그러니 화산을 잘 모르는 이들이 받은 충격은 얼마나 크겠는가?

“그 정도는 해 줘야지. 그래야 세상이 바뀌는 것도 모르고, 아직 느긋하게 제 곳간만 지키고 있던 구파일방 놈들이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는 것을 알지 않겠느냐.”

구파일방 놈들이 이 소식을 듣고 어떤 얼굴이었을지를 생각하니 웃음을 참기 힘든 당군악이었다.

‘하여튼 귀신 같은 면이 있어.’

협의라는 것은 생각처럼 대단한 것도 아니고, 생각만큼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평소에는 오히려 귀찮고, 손은 많이 가지만, 돌아오는 것은 없는 애물단지에 가깝다.

하지만 그 협의라는 것은 정파를 자처하는 문파의 기본이다. 화려한 상승무학에 눈을 빼앗겨 기초를 등한시하면 곧 실력이 퇴보하는 것처럼, 이익과 재물에 눈이 멀다 보면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을 잊게 된다.

민심이라는 것엔 묘한 면이 있어서, 결국엔 그 사실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구파일방 쪽에서는 할 말이 많겠지.”

“예. 아마도 그럴 겁니다. 사실 대별채의 토벌이라는 건 현 강호에서 화산이 아니면 누구도 손대기 어려운 일이니까요.”

“하지만 그건 변명일 뿐이다.”

당군악이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고작 하나의 사건만을 두고 사람들의 마음이 바뀔 리 없지. 이번 일이 문제가 된다는 것은, 결국 그만큼 구파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등한시해 왔다는 걸 증명할 뿐이다.”

“예, 가주님.”

“그러니 너도 늘 명심하거라.”

당군악의 눈이 살짝 어둡게 가라앉았다.

“사천의 패자라는 이름으로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순간, 가문의 몰락이 시작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당패를 보며, 당군악은 조금 쓰게 웃었다.

‘그런 의미에서 화산신룡은 참 골치 아픈 존재지.’

계산이든 감각이든 이자는 상대가 싫어할 만한 일을 귀신같이 알아챈다. 그리고 중간중간 아무렇지도 않게 계획을 바꿔 상대가 예상할 수 없는 짓을 해 댄다.

아군이니 유쾌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이지, 적이었다면 배 속에 달군 돌덩이를 넣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여하튼 생각 이상으로 빨리 화제를 끌게 되었군.”

당군악이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청명이 이다음엔 무슨 말을 해 올지 이미 알 것 같았다.

“조금 서둘러야겠다.”

“어떤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세인들의 머릿속에서 화산의 이름이 다시 흐려지기 전에 천우맹을 발족해야 한다.”

가볍고 평온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말에 실린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적어도 화산파가 화산으로 복귀할 때까지는 준비를 끝내야 한다.”

“……너무 촉박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진 않을 거다.”

“예? 아무리 호북에서 섬서까지의 거리라지만, 저들은 무인입니다. 며칠 걸리지 않을 텐데…….”

당군악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 화산신룡이 그냥 순순히 대별산에서 화산으로 돌아갈 리가 없잖느냐.”

“……아.”

“분명히 뭔가 또 저지르겠지.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이해했습니다.”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설치다가 화산으로 돌아가자마자 왜 아직 준비가 덜 끝났냐고 닦달해 대겠지. 끄응.”

당패는 한 번씩 제 아버지가 화산신룡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당군악은 평소 같은 얼굴로 말했다.

“싫은 소리 듣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서두르거라.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가느냐?”

“다른 준비는 대부분 끝났습니다. 다만, 주변 유력 중소 문파들에게 천우맹에 합류할 의사가 있는지 물었던 것에는 답변이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재촉하거라.”

“…….”

당패가 뭔가 말하려는 순간 당군악이 손을 들어 끊었다.

“설득하라는 게 아니다. 재촉하라는 거다. 답변은 무엇이든 상관없다.”

“아…….”

“어차피 좋은 답변은 돌아오지 않을 게다. 사천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이들이라고는 하나, 기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질서를 무시할 수는 없을 테니까.”

“확실히 저어하는 느낌이긴 했습니다.”

“그러니 그저 참가할지, 말지만 들어 두면 그만이다. 굳이 그들이 개파부터 우리와 함께할 필요는 없다. 다만 개파식에는 참여해 자리를 빛내 달라고 하거라.”

“그 정도는 가능할 것입니다.”

“서두르는 게 좋을 거다.”

“예. 아니면 화산신룡의 잔소리를 들어야 할 테니 말입니다.”

“그래. 움직여라!”

“예!”

밖으로 달려 나가는 당패를 보며 당군악이 실소했다.

‘잔소리라.’

천하의 사천당가가 어린 도사의 잔소리가 무서워서 달려야 하는 처지라니.

생각할수록 어이없는 일이지만, 더 큰 문제는 그 처지가 딱히 싫지 않다는 거였다.

‘하기야.’

화산신룡의 존재 덕분에 바늘을 삼킨 꼴로 부들부들 떨고 있을 구파일방 쪽에 비한다면 이보다 좋을 수 없는 처지겠지.

슬쩍 동쪽을 바라본 당군악은 웃음기 남은 얼굴로 붓을 다시 쥐었다.

* * *

무한에서 가장 큰 상단인 금선상단(金船商團).

상단주 송태악(宋太岳)은 떨떠름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장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이런 거냐?”

“예?”

“왜 이런 거냐고?”

그러자 총관인 모완(毛完)이 어색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 사실 저희 상단의 주력은 차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최근 몇 년간은 그 차가 잘 팔려서 돈을 벌었고요.”

“그렇지.”

“헤헤. 그중에서도 고위층에다 파는 비싼 차가 돈이 되었지요.”

“그런데?”

모완은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런데 운남의 차 무역이 재개되면서 그 비싼 차 시장이 모조리 다 털렸습니다.”

“…….”

송태악은 슬그머니 눈살을 찌푸렸다.

“운남 차가 전에 없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좀 안 풀리다가 다시 풀리기 시작한 것 아닌가.”

“그렇지요.”

“그런데 왜 모조리 다 털린다는 건가? 그게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도 아닐진대.”

“그게 참…… 상계라는 게 오묘한 면이 있잖습니까. 아시다시피 예로부터 운남의 차는 고위층이 마시는 차였잖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그 차가 교역이 막히면서 품귀 현상이 일어나 값이 천정부지로 뛰었었습니다. 고위층이 마시던 차가 더 고위층! 말 그대로 돈이 썩어나는 인간들이나 마시는 차가 되어 버린 거죠.”

“…….”

“그쯤 되면 그건 그냥 차가 아니라 권력과 재력의 상징이 되어 버립니다.”

“그야 당연히 그렇겠지. 그런데 내가 묻는 건 그런 게 아니잖으냐! 왜 우리 상단의 매출이 폭락했느냐를 물었지.”

“그러니까, 그 고위층의 사치품이 되어 버린 운남 차가 갑자기 예전보다 싼값에 대량으로 풀린 겁니다.”

“…….”

“심지어 이놈들이 이젠 차에 등급을 나눠 팔아서 비싼 차는 더 비싸게, 싼 차는 마음만 먹으면 살 수 있을 정도로 가격 책정을 해 뒀습니다. 덕분에 평소에 차에 관심이 있던 이는 어떻게든 더 높은 등급의 차를 먹어 보려 돈을 풀고, 차에 관심이 없는 이들도 적당한 등급의 차를 구매해 볼 정도입니다.”

“…….”

“그러니 차 시장이 싸그리 박살이 날 수밖에요. 저희가 팔던 차는 이제 그 운남 차에 밀려 팔리지가 않습니다. 지금 창고에 쌓여 곰팡이가 피고 있습니다.”

“끄으응.”

송태악이 양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어 댔다.

“사치품이 적정가가 되어 버리니 이놈이고 저놈이고 한번 먹어 보겠다고 달려들고 있다 이 말이로군.”

“정확합니다.”

“그럼 대책은?”

모완이 빙긋 웃었다.

“태풍이 지나갈 때는 그냥 기둥을 부여잡고 무사히 살아남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운남 차에 대한 선호도 몇 년이면 수그러들 겁니다.”

“……그 몇 년 동안 망하지 않는 게 최선의 목표로군.”

송태악은 갑갑한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물론 금선상단이 그 몇 년간 차로 큰 이익을 남기지 못한다고 망할 만큼 작은 곳은 아니다. 이미 쌓아 둔 이익만으로 백 년은 더 먹고 살 수 있다.

이래 봬도 나름 중원십대상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지 않던가.

“몇 년이면 해결될 일입니다. 짧은 시간이죠.”

“그게 문제가 아니니 그러는 게 아닌가.”

“예?”

하지만 송태악은 모완을 보며 혀를 찼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저놈들은 확실히 돈을 벌 줄 아는 놈들이야. 무작정 비싸게 풀어서 당장 큰돈을 벌기보다는 적당히 가격을 낮춰서 이익을 높였다 이 말이지. 열 냥짜리를 하나 파느니 한 냥짜리를 스무 개 파는 전략이야.”

“그렇습니다.”

“그런 놈들이 결국 운남 차의 가격이 떨어질 걸 모르겠는가?”

“…….”

“차로 벌어들인 막대한 돈으로 또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게 문제지! 끄응. 차라리 그쪽에 줄을 대보는 게…….”

“에이, 중원십대상단의 자존심이 있지 않습니까.”

“상인한테 제일 쓸모없는 게 그 자존심이야! 돈만 벌면 되지, 자존심이 무슨 상관이야!”

“그렇다고 해도 무리입니다. 운남 차를 전매하고 있는 쪽은 다름 아닌 그 화산입니다.”

“…….”

“호북에 위치한 우리가 그들과 거래를 트는 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누가 그걸 몰라서 그래? 그냥 속이 터진다 이 말이지!”

송태악은 괜히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상인으로서 가장 힘들 때가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 돈이 흐르는 맥이 변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음에도, 그 맥을 향해 다가갈 방법이 없을 때.

‘그렇다고 무당과의 관계를 끊을 수도 없고.’

명분도 없는 데다가 무당과 거래를 하던 그들을 화산이 받아 줄 이유도 없었다. 이미 잘나가는 이들이 뭐 하러 그러겠는가.

“끄응. 강호 놈들이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겠군.”

결국은 돈이다.

성장하는 문파는 반드시 돈을 거머쥔다. 성장해서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돈을 벌기에 성장하는 것이다. 소림이 천하제일문이 된 이유는 그들이 천하에서 가장 부유한 문파이기 때문이다.

돈을 버는 문파는 이런저런 일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굳이 제자들을 밖으로 돌릴 이유 없이 수련에만 매진할 수 있고, 값비싼 영약을 사들일 수도 있다.

평생을 걱정 없이 수련에 전념하는 이들과 당장 내일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이들 중 누가 더 강해지겠는가?

‘그런데 지금 저 화산으로 금맥이 흐른단 말이지.’

불과 십 년만 지나면 그 돈이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할 것이다.

“끙. 그림의 떡이구나. 그림의 떡이야.”

송태악이 한숨을 내쉬며 장부로 손을 뻗은 바로 그때였다.

“초, 총관님!”

“음?”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완은 목소리가 들려온 문 쪽을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이냐?”

“나,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거래를 하려는 자들이 왔는데, 이, 이게 양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양이 심상치가 않다니? 곡물이라도 가져왔다는 거냐?”

“그게…… 아, 아니 말로는 설명이 어렵습니다. 직접 보셔야 합니다.”

모완이 고개를 갸웃했다.

“쯧. 나가보자고.”

송태악은 가볍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안 그래도 속이 터질 지경인데 이럴 때는 돈이 될 물건을 눈으로 보고 마음을 삭이는 게 최고였다.

“뭐 얼마나 대단한 게 왔는지 말이야.”

그는 히죽 웃으며 발걸음 가볍게 밖으로 나갔다.

“…….”

들어온다.

“…….”

뭐가 계속 들어온다.

금선상단의 커대란 대문으로 수레들이 연이어 들어왔다. 각 수레에는 흰 자루들이 사람 키보다도 더 높게 쌓여 있었다.

“이, 이게 대체 뭐냐?”

곡식은 아닌 것 같고.

이게 다 곡물이라고 해도 어마어마하다고 할 양인데, 이게 곡물이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그…….”

쩔그렁.

그때 수레에 실린 자루 중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그 안에 든 물건들이 밖으로 쏟아졌다.

“패, 패물?”

모두 보석과 장신구였다.

한눈에 보아도 값비싸 보이는 패물들이 더러운 자루에 아무렇게나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이, 이게……. 아니, 미친 이게 전부 패물은 아니……. 그래, 아니겠지. 아니, 그래도 이게…….”

패물은 아니어도 뭔가 비싼 거겠지. 아니면 패물을 따로 실었을 테니까.

그럼 지금 여기로 들어오는 것들이 대체 다 얼마란 소린가?

갑자기 딸꾹질이 나기 시작했다. 이게 복인지 화인지, 송태악은 도저히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때 한 젊은 청년이 안으로 터덜터덜 걸어 들어오며 송태악을 보더니 씨익 웃었다.

“아저씨가 상단주예요?”

“으응?”

“듣자 하니 여기가 돈이 많다고 하던데. 이거 다 팔면 얼마나 되는지 확인 좀 해 주세요.”

“…….”

송태악의 이마에 식은땀이 비질비질 배어나기 시작했다.

‘재신(財神)이 왔구나!’

물론.

재신(財神)인지 재신(災神)인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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