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8화. 사나이가 검을 뽑았으면 목이라도 잘라야지! (3)
휘이이잉!
매서운 바람이 불어왔다.
녹채의 중앙에 펼쳐진 드넓은 마당에선 병장기를 뽑아 든 대별채의 산적들이 활짝 열린 입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저벅. 저벅. 저벅. 저벅.
그 활짝 열린 문을 통해 검은 무복을 입은 화산의 제자들이 열을 맞춰 전진해 들어왔다.
꿀꺽.
누군가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대비를 하고 있었건만, 막상 화산의 모습을 보니 절로 몸에 힘이 들어가고 등줄기가 차갑게 식기 시작한 것이다.
대별채는 녹림을 대표하는 산채 중 하나다.
당연히 다른 사파들과도 여러 번 전쟁을 치렀고, 나름 이름 있는 정파와 문제가 생겼던 적도 있었다.
그러니 대별채에서 나름 오래 굴러먹었다 자부하는 이들은 백전노장이라는 수식이 아깝지 않을 정병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들조차도 지금 화산파의 모습을 보고는 긴장을 숨기지 못했다.
‘기이하군.’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정파에게는 정파 나름의 무게감이 있고, 사파에게는 사파 나름의 날카로움이 있다. 하지만 저 화산이라는 놈들에게서는 정파의 무게감과 사파의 날카로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흐트러짐 없이 걸어오는 모습에는 정파 특유의 엄정함이 있었고, 내뿜는 기세에는 사파처럼 거칠고 자유분방한 느낌이 있었다.
대체 어떤 무학을 익히고, 어떤 수련을 해 오면 상대하는 이로 하여금 이런 느낌을 받게 한단 말인가. 쉬이 짐작도 하지 못할 정도였다.
꿀꺽.
그 감각에 전율한 사람이 한둘이 아닌지, 여기저기서 침 삼키는 소리나 병장기 꽉 움켜쥐는 소리가 들려왔다.
‘적웅채와 혈랑채가 손도 써 보지 못하고 당했다 이거지…….’
그런데 채주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문을 열고 저들을 맞이하라 명한 거지? 대화가 통하는 상대도 아닐 텐데.
이런저런 추측을 해 볼 여유도 없었다. 목책 안으로 들어온 화산파 무리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 수가 겨우 백을 조금 넘는 정도였다.
따지자면 오히려 화산파가 세 배에 가까운 인원에게 둘러싸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화산의 제자들의 얼굴에는 조금의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되레 언제든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잡기에 눈을 돌리지 않고, 오로지 정도만을 걸어온 이들 특유의 여유와 자신감, 그리고 단단함이 있었다.
딱히 어떤 일이 벌어지지 않았음에도 대별채의 산적들이 그 기세에 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저벅. 저벅. 저벅.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뒤에 버티고 선 이들의 얼굴엔 아직 어린 티가 역력한 반면, 앞으로 나선 이의 얼굴에는 명백한 세월의 흔적이 녹아 있었다.
그는 날카로운 병장기를 쥔 산적들을 쭉 훑어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화산파의 장로인 현상이다.”
화산파의 장로.
불과 하루 전이었다면, 이곳에 있는 이들 중 누구도 화산파의 장로라는 호칭에서 무게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불과 하루 만에 그 이름을 절대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명성이란 실적을 기반으로 퍼져 나간다. 화산이 단 하루 만에 이룩한 실적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그리고 지금 이들은 대별채마저 명성을 드높이기 위한 발판으로 삼기 위해 이곳까지 쳐들어온 것이다.
“대별채의 채주는 앞으로 나서라.”
현상에게서 고고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상대를 크게 짓누를 만한 과격한 기세도 아니건만, 산적들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쯧쯧쯧. 이 한심한 놈들 같으니.”
그런데 그런 그들의 등 뒤에서 거친 음성이 터져 나왔다.
“비켜라!”
굶주린 호랑이가 으르렁대는 것 같은 목소리와 함께 정렬해 있던 대별채의 녹림도들이 좌우로 쫙 갈라졌다.
열린 길을 따라 전신을 검은 늑대 가죽으로 감싼 광우도 고홍이 단숨에 걸어 나왔다.
쿵! 쿵! 쿵!
그리 커다란 덩치는 아니건만, 걸음마다 묵직한 내력이 실려 있었다. 그 내력의 여파로 주변의 산적들이 억눌려 있던 숨을 드디어 편하게 내쉬며 눈을 빛냈다.
‘확실히…….’
현상은 눈을 가늘게 뜨고 광우도 고홍을 바라보았다.
듣던 대로인 사람이자, 듣던 것과는 판이한 사람이었다.
표정과 몸짓을 보면 확실히 산적의 표본 같은 거친 면이 두드러졌다. 하지만 단숨에 주변의 기세를 다시 일으키는 노회한 수작을 보아, 이자가 생각만큼 단순한 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벅.
앞으로 나선 고홍은 현상과 화산파의 문도들을 쭉 훑어보더니 입꼬리를 뒤틀며 비웃었다.
“화산의 장로?”
“…….”
“섬서 촌놈들이 많이도 컸구나. 들어 본 적도 없는 삼류 문파가 이름 좀 날렸다고 목을 뻣뻣이 세우는 걸 보니 말이다.”
“명성이 무어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중요한 건 실력이지.”
“하핫?”
고홍이 이죽이며 현상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죽을 날 가까운 늙은이가 입은 잘도 터는군.”
현상은 그 도발에 반응하지 않았다. 상대의 격장지계에 넘어가 주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
“아니, 근데 저 새끼가 지금 누구한테 아가리를 놀려!”
“처, 청명아! 참아라!”
“지금 장로님이 이야기하고 계시잖아, 청명아. 참아라, 응?”
“저 소대가리 새끼가 우리 장로님을 관 짜 놓은 늙은이 취급하잖아!”
“그, 그렇게까지는 안 했어!”
뒤에서 들려오는 실랑이에, 현상의 어깨가 미미하게 처졌다.
‘……멍청하면 어떤가.’
뇌가 맑으면 좋은 거지…….
“크흠.”
낮게 헛기침을 한 현상이 고홍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가 반란을 일으켜 녹채를 점거하고, 녹림왕의 목숨을 노린다는 말을 들었다. 화산은 중원의 평온과 녹림의 안정을 위하여 그대를 제압하고 녹림을 원래대로 되돌리려 한다.”
서로 싸우는 길밖에 남지 않은 이들이니 굳이 나누지 않아도 될 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상은 이 작은 대화 하나하나가 뒤에 서 있는 화산의 제자들에게 확실한 명분과 목표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강한 것도 중요하고, 최선을 다해 싸우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왜 싸우는지를 아는 것이다. 목적 없이 마구 휘두르는 힘은 그저 폭력일 뿐이며, 결국은 스스로를 좀먹게 될 테니까.
“평온?”
고홍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칼 들고 쫓아온 놈들이 주둥아리는 잘도 털어 대는구나. 긴말할 것 없다. 너 같은 늙은이 상대할 있을 시간 없으니, 네놈들을 구슬린 쥐새끼를 당장 내보내라!”
“아니, 근데 저 새끼가 진짜 뒈지려고!”
“아, 이 새끼야! 좀 참으라니까!”
“네가 지금 나서면 꼴이 이상해진다고!”
“…….”
비장하게 외쳤던 고홍의 얼굴이 파들파들 떨렸다.
‘저 애새끼는 아까부터 뭘 하는 거지?’
나름 근엄하게 선 장로 뒤에서 쥐방울만 한 놈 하나가 자꾸 버둥거리며 발작을 해 대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다른 애송이들이 그 쥐방울의 팔다리를 잡고 필사적으로 늘어졌다.
“아오! 나 진짜 성질 많이 죽었다. 옛날 같았으면 그냥 주둥아리 열기도 전에 강냉이부터 다 털어 버렸을 텐데! 확 마, 저걸 진짜!”
“아, 좀 나가 보십쇼!”
“애 발작하잖습니까! 빨리 나가 보십쇼!”
계속되는 소란에 옆구리 찔리고 등 떠밀린 임소병이 한숨을 쉬며 앞으로 터덜터덜 나섰다. 고홍을 보며 마주 서고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이군, 고홍.”
“……쥐새끼.”
고홍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그래도 녹림왕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놈이 녹림 내부의 일에 정파를 끌어들여? 그러고도 네가 선대를 잇는 녹림의 호걸이더냐?”
“호걸이라…….”
임소병은 별로 타격을 받지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는 굳이 호걸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그렇겠지. 너는 쥐새끼니까.”
“그래. 나는 쥐새끼여도 상관없다.”
태연하게 말하는 임소병의 눈은 어느새 차게 가라앉아 있었다.
청명에게 내도록 구박받고, 토벌 내내 딱히 이렇다 할 존재감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그의 두 눈은 이곳에 올라올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는 정광이 흐르는 눈으로 침착하게 고홍을 응시했다.
“중요한 것은 내 자존심이 아니고, 내 명성이 아니다. 비웃음을 받고 무시받는 일쯤이야 하찮지. 중요한 것은 내가 책임져야 할 녹림의 형제들이 단 한 방울의 피라도 덜 흘리는 것이다!”
아파서 골골거린 것도 다 옛말인 듯, 임소병의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아래로는 만인방의 위협을 받고, 옆으로는 장강수로십팔채의 견제를 받고, 언제나 정파의 토벌의 대상이 되고, 관의 눈치를 살피며 피해 다녀야 하는 것이 녹림의 처지다. 너같이 명성과 자리에 눈이 멀어 일을 벌이는 놈이 녹림왕의 자리에 오른다면 모든 산이 녹림의 피로 뒤덮이는 것은 명약관화일 터.”
임소병의 시선이 고홍을 똑바로 응시했다.
“나는 그걸 막을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 설사 그게 비겁하다 손가락질 받는 일이라고 해도 전혀 상관없다.”
“흐.”
고홍은 그런 임소병을 대놓고 비웃었다.
“쥐새끼가 할 법한 생각이로군. 너같이 나약한 놈이 녹림왕의 자리에 있으니 다른 문파들이 우리를 우습게 여기고 찔러 대는 것이다!”
고홍의 우렁우렁한 고함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네놈은 저 만인방과의 전쟁이 확대될 것이 두려워 언제나 소극적으로 전쟁에 임했다. 형제들이 죽어 나감에도 공격을 허락지 않았고! 피는 피로 갚는다는 녹림의 율법을 무시했다!”
내용이야 어떻든, 그 목소리에 실린 내력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하나 나는 다르다! 나는 너 같은 겁쟁이가 아니다! 나는 가장 선두에서 도를 휘둘러 녹림이 세상 어디에도 무시당하지 않을 만한 힘이 있음을 증명할 것이다!”
“오오오오오오!”
고홍의 피 끓는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별채의 녹림도들이 사기 백배하여 함성을 내질렀다. 병장기를 일제히 들어 올린 그들에게서 조금 전과는 다른 자신감이 보였다.
논리와 이치를 떠나서, 저 고홍에게 확실히 사람을 잡아끄는 힘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때 임소병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녹림을 위한 길이 아니라 네 욕심을 채우는 길이겠지.”
“크흐흐. 쥐새끼. 이제 됐다. 어차피 네놈과 나는 예전부터 말이 통하질 않았지.”
“통하지 않는 게 아니라, 네가 말귀를 못 알아 처먹는 거다.”
임소병이 살기 어린 눈으로 고홍을 노려보더니 나지막이 한숨 쉬었다.
“나는…….”
“아, 거 씨! 말 더럽게 많네!”
“…….”
이젠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에, 임소병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모든 기세를 일순간 꺼트리며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저를 막아서던 이들을 모조리 뿌리친 청명이 짜증이란 짜증을 다 부리며 앞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왜? 뭐, 다과회라도 열려고? 다탁이라도 놔 드려?”
“……아니, 그게 아니라…….”
“어차피 칼 들고 찔러 댈 사이에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산적이라는 것들이 이름값도 더럽게 못하네!”
“……예?”
청명이 배를 쭉 내밀며 말했다.
“화산의 법도는 간단하지! 이긴 놈이 맞다!”
“……그런 법도는 없다, 청명아.”
“저게 이제는 화산의 법도까지 날조하네.”
백천과 조걸이 딴죽을 걸었지만, 평소에도 안 들리던 말이 지금이라고 청명의 귀에 들어갈 리 없었다.
“산에서 마냥 편하게 산 산적 놈들이라 여유가 넘치시는 모양인데, 우린 바쁜 사람이니 빨리빨리 좀 하자고. 엉?”
고홍은 황망하게 청명을 바라보다 얼굴을 구겼다.
“누울 곳도 가리지 못하는 애송이 놈이 함부로 입을 놀리는구나.”
“너는 귀하게 자라서 자리 전부 따져보고 누우시나 봐. 나는 이 새끼야, 세상 천지에 못 누울 곳이 없는 사람이야!”
이 말에는 뒤에 있던 백천 무리도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거지 출신이니까.”
“그런데 산적이랑 거지 중에 뭐가 더 나은 것이냐?”
“그건 고민을 좀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숙.”
고홍은 이제 너무 노하다 못해 머리가 부글부글 끓는 느낌이었다.
“네놈들이 내 발 아래서 뼈가 뽑혀 나올 때도 그 방자한 혓바닥을 놀릴 수 있는지 한번 보겠다.”
무시무시한 위협에 청명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말조심하는 게 좋을 텐데.”
“……뭐?”
“그 말 돌려주는 게 내 특기거든.”
청명은 손가락으로 고홍을 가리키고는 씨익 웃었다.
“내가 다 기억해 뒀다, 너.”
“이…….”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뒤로 한 발짝 성큼 물러나 현상의 뒤에 섰다.
현상이 단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화산!”
“예!”
“악적들을 토벌하여 이곳에 화산의 협의가 있음을 세상이 알려라!”
“예!”
챙!
일제히 검을 뽑아 든 화산파의 제자들이 산적들을 압박하며 거리를 좁혔다.
“뭣들 하느냐! 당장 저놈들의 뼈를 모조리 분질러라!”
“예!”
녹림도들 역시 살기를 띠고 병기에 내력을 불어넣었다.
“쳐라!”
“죽여라!”
두 파도가 서로를 향해 동시에 돌진하며 밀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