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7화. 사나이가 검을 뽑았으면 목이라도 잘라야지! (2)
“채, 채주!”
고호리(苦狐狸) 이정방(李正方)이 헐레벌떡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광우도 고홍이 슬쩍 언짢은 듯 눈살을 찌푸렸다.
“웬 호들갑이냐?”
“채, 채주! 큰일입니다!”
이정방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고홍은 혀를 차며 그를 꾸짖었다.
“문사철이라는 놈이 저리 엉덩이가 가벼워서야. 그래, 무슨 일이냐?”
“화, 화산…….”
“음?”
“화산파가 다른 채들을 토벌하며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뭐?”
고홍이 눈살을 찌푸린 채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게 뭐 어쨌다는 말이더냐?”
“예?”
“그게 네놈의 계획이지 않았느냐. 가만히 앉아 있으면 그놈들이 다른 채들을 때려잡을 테니, 지켜보고 있다가 꿀꺽 삼키면 된다며?”
“하지만 제, 제가 생각한 것과는 상황이 다릅니다! 저는 화산과 다른 채들이 양패구상 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화산은 일방적으로 다른 채들을 박살 내고 있습니다!”
“박살이라니?”
“마, 말 그대로입니다. 딱히 피해도 없이 일방적으로 토벌해 버렸다고 합니다.”
보고를 마친 이정방은 마른침을 삼켰다. 채주에게서 떨어질 불호령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는 달리 고홍은 그의 보고에도 별다른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히죽 웃을 뿐이었다.
“호오. 그 애송이 놈들이 생각보다 제법인 모양이구나.”
“화산의 전력이 저희 생각 이상입니다! 제, 제 불찰입니다. 야차당이 속절없이 당했을 때부터 짐작했어야 했는데!”
“쯧쯧. 무능한 놈.”
덥수룩한 수염을 두어 번 쓸어내린 고홍은 엎드린 이정방의 등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것이냐?”
“그게 사, 상황이 좋지 않아 보입니다. 일단은 몸을 피하심이…….”
“피해?”
그 말을 들은 고홍이 껄껄 웃어젖혔다.
“이 겁쟁이 놈이 정신이 나가 버렸구나! 이 고홍이 그런 애송이들을 피해 달아나기라도 하라는 말이더냐?”
“하, 하지만 채주……. 저들의 기세가 만만치 않습니다! 이미 두 개의 산채를 정리하며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지라…….”
이정방이 고개를 최대한 낮추며 말했다.
“내리는 비는 피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단은 잠시 몸을 피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쯧쯧쯧. 저 등신 같은 놈.”
고홍이 비웃음을 흘렸다.
“네놈의 담이 그것밖에 안 되니 그 머리를 가지고도 남의 뒤나 닦는 것이다.”
“채, 채주!”
고홍이 넌지시 물었다.
“그래. 그 화산 놈들 사이에 쥐새끼가 있다더냐?”
“……예. 녹림왕도 화산과 함께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하하하하하핫!”
고홍이 배를 잡고 웃어 댔다. 내공 실린 그의 웃음이 쩌렁쩌렁 울리자 모옥이 통째로 흔들리며 천장에서 흙먼지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채, 채주?”
이정방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홍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물론 고홍은 머리가 그리 뛰어난 자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 위험을 자처할 사람은 또 분명 아니었다.
그런 이였다면 이 칼과 음모가 난무하는 녹림에서 채주의 자리에 오를 수도 없었을 것이고, 설령 운이 좋아 올랐다 해도 지금과 같은 명성을 쌓는 것 역시 불가능했을 것이다.
때문에 이정방은 더욱더 지금의 고홍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흐하하하핫! 그 쥐새끼가 머리를 굴리는구나. 지금쯤 의기양양하게 오고 있겠지.”
“채, 채주. 상황을 직시하심이…….”
“그래. 알고 있다.”
고홍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네 말인즉슨, 나를 견제하던 다른 산채는 모조리 박살이 나서 더는 보는 눈이 없고, 그 화산의 애송이들은 사기 백배하여 그 쥐새끼와 함께 이곳으로 들이닥치고 있다는 뜻이 아니더냐?”
“그러합니다.”
“이보다 더 좋은 상황이 또 어디에 있느냐?”
“……예?”
고홍의 눈에 광망이 어렸다.
“그럼 그 화산의 애송이들과 쥐새끼 놈을 쳐 죽이기만 하면, 내가 녹림왕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반대할 이가 누구도 없다는 뜻 아니더냐? 어중이떠중이 같은 것들은 감히 내 앞에서 대거리를 하지 못할 것이고, 나름 힘이 있다는 놈들도 내가 임소병을 잡아 죽인 것을 부정할 수 없을 테니!”
“채, 채주! 물론 그러합니다. 하지만 그건 우리 대별채의 힘만으로 저 화산 놈들을 막을 수 있을 때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물론 대별채는 형산에 함께 들어온 다른 산채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힘을 갖추고 있다. 저 두 산채가 연합을 한다고 해도 대별채 하나를 감당하기가 버거울 것이다.
하나 그렇다 해서 대별채가 저 두 산채를 아무 피해 없이 정리할 수 있는가?
‘말도 안 되지.’
대별채가 그런 힘을 갖추고 있었다면, 굳이 다른 산채와 공동전선을 펼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녹채고 나발이고 홀로 다 쓸어 버리면 그만이니까.
‘채주가 그걸 모를 리가 없는데?’
그럼 대체 저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온단 말인가?
“흐흐……. 그놈의 말이 틀림이 없구나.”
그놈?
이정방이 의혹 어린 눈으로 고개를 드는 순간 고홍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산채 문을 열고 놈들을 맞이해라!”
“아, 안 됩니다! 채주 그…….”
이정방이 기겁하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지만 칼날 같은 고홍의 시선이 꽂혀 들었다.
“…….”
이정방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한 마디라도 더 지껄이면 그땐 아가리를 찢어 버리겠다.”
“…….”
“쯧쯧쯧. 이래서 문사철들은 안 된다니까. 기회가 왔음에도 잡질 못한다니. 쯧쯧쯧.”
고홍의 얼굴에는 실로 패기가 넘쳤다. 그는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무자염라? 탐혈랑? 그런 버러지들이 이 고홍과 감히 비교될 수 있다고 보느냐! 내가 왜 광우도라 불리는지 저 섬서의 촌놈들에게 똑똑히 알려 주겠다!”
이정방은 결국 마른침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제는 막을 수 없다.’
이제 곧 화산이 이곳으로 들이닥칠 것이다. 채주가 저리 나오는 이상 싸움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제발 고홍이 뭔가 비장의 수를 숨기고 있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 * *
“그런데…….”
산을 오르던 백천이 의아하다는 듯 청명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왜?”
“……녹림은 신주오패로 불리는, 천하에서 가장 강한 집단 중 하나가 아니냐.”
“그렇지. 그런데 왜 생각보다 약해 빠졌냐고?”
“음. 약하다기보다…….”
“왜 애들이 매가리가 없냐고?”
“…….”
“왜 오합지졸이라 상대할 가치도 없냐고?”
백천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그들의 뒤를 따라오는 임소병을 바라본다.
비 맞은 버들가지처럼 축 처진 그의 어깨를 보고 있자니, 참 못 할 짓을 많이도 한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니, 꼭 그런 말은 아니고.”
“사숙. 그런데, 녹림을 너무 우습게 보지 않는 게 좋아.”
“응?”
의외의 말에 백천은 눈을 깜빡이며 청명을 보았다. 보나마나 녹림을 무시하는 말이 나올 줄 알았던 것이다.
청명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천 명의 단련된 정병(精兵)도 만 명의 징집병을 당하지 못하는 법이야. 수적 우위는 생각 이상으로 위험하거든.”
이에 백천의 표정도 덩달아 굳어졌다. 청명은 잠깐 생각하다 말했다.
“우리가 백쯤 있으면 산적 오백 정도야 식후 간식거리로 쓸어 버릴 수 있지.”
“……간식거리는 아니지.”
물론 백천도 속으로는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임소병의 귀가 열려 있음을 생각하면 차마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런데 천 명이면 좀 귀찮아지지.”
“그야 그렇겠지.”
“그럼 오천이면?”
“…….”
“만이면?”
“……그쯤 되면 우리는 보이지도 않겠구나.”
동정호에 물 한 바가지 퍼 넣은 느낌일 듯했다.
“각 산채에 산적이 백 명씩만 있어도 녹림도의 수가 벌써 칠천 명을 훌쩍 넘겠지. 그런데 사숙도 알다시피, 산채 하나에 산적이 겨우 백 명밖에 없진 않잖아.”
“……그럼 정말 만 명이라는 거네.”
“훨씬 더 될 수도 있지.”
백천은 할 말을 잃었다.
‘세상에 산적이 이렇게나 많다고?’
그 많은 산적이 한곳에 모인 광경을 상상해 보니 등에 소름까지 돋았다.
“각개격파를 했으니 약해 보이는 것뿐이야. 기본적으로 산적들은 서로 돕지 않아. 그러니 바로 아래 산채가 개박살이 나고 있어도 도우러 오는 게 아니라 되레 박수를 쳐 대지.”
“……난장판이네.”
“그런데 만약 그 산적들을 지휘할 수 있는 이가 있었다면, 우리가 적웅채를 습격하는 순간 이미 도착해 있던 다른 산채들이 힘을 합쳐 우릴 상대했겠지.”
그럼 최소 천오백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백 대 천오백.
오백을 연속해서 세 번 상대하는 것과 한 번에 천오백을 상대하는 것은 아예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무인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정량적이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진다.
“아, 그래서…….”
백천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녹림왕이 중요한 거구나.’
서로 반목하고 자신의 영역을 철저히 지키는 녹림의 산채들을 하나로 엮어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이는 오직 녹림왕뿐이다.
저 사나운 대별채도, 자기밖에 모르던 적웅채도 임소병이 실각하여 모습을 감추기 전에는 적어도 겉으로나마 그의 명을 따르는 척이라도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녹림왕이 사라진 순간, 저들은 녹림이라는 이름으로 엮을 수 없는 평범한 산적들이 되어 버렸다.
“생각보다 대단하신 분이셨군요.”
백천이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러자 임소병이 시들시들한 얼굴로 힘없이 말했다.
“……백천 도장, 본인의 성격이 생각보다 나쁜 거 알고 계십니까?”
“제가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백천을 보며 임소병이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잘하는 짓일까?’
늑대를 피하려다 범을 끌어들인 게 아닐까. 물론 이 범은 위험하다기보다는 뭔가 좀…… 많이 이상하다는 게 문제였지만.
백천은 임소병이 그러거나 말거나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역시 청명과 마찬가지로 화산 외에는 별 관심이 없는 이였다.
역시나 그는 다시 원래의 화제로 돌아갔다.
“그렇게 생각하니 화산이 정말 수가 적긴 하구나.”
저 소림은 무승만 천 명이 넘어가고 무당만 해도 문도의 수가 오백을 훌쩍 넘는다.
화산의 검수 하나하나가 그들을 뛰어넘을 만큼 대단한 실력을 갖추게 된다 해도, 결국 그 수적 열세를 극복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갈 길이 멀구나.”
산채 두 개를 정리하면서 들떴던 마음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뭐 그렇게 시무룩해질 건 없어. 거꾸로 말하면 약해 빠진 놈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머릿수로 들이미는 셈인 거니까.”
백천은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개방도가 여기 없어서 다행이네.’
개방 사람들이 말을 들었으면 입에 거품을 물고 뒤집어졌을 것이다. 진실로 두드려 맞는 것보다 아픈 건 없으니까.
“그런데…….”
“응?”
“저 새끼들은 좀 다를 것 같단 말이지.”
“으응?”
청명은 어느 한곳을 뚫어져라 보며 말했다. 그 시선을 따라가 보니 성채처럼 높이 솟은 봉우리 위에 자리한 목책들이 보였다.
“저 안에 대별채가 있겠군.”
“음!”
백천이 마음을 다잡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의 눈은 슬쩍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렇게까지 멍청하지는 않을 테지.’
임소병을 비롯한 녹림도들은 입을 모아 광우도 고홍을 폭급한 이라 평했다. 하지만 정말로 그리 성질이 과격하고 급하여 생각을 하지 못하는 놈이라면, 지금까지 얌전히 임소병의 말을 듣고 있었을 리가 없다.
‘분명 뭔가 있는데.’
청명이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린다. 생각보다 일이 재미나게 흐르고 있었다.
‘귀신이 나올지, 괴물이 나올지 어디 한번 보자고.’
그는 힘 있게 발을 내디뎠다.
문을 활짝 연 채 그들을 환영하고 있는 녹채를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