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0화. 화산이 개판이 날 겁니다. (5)
“안 됩니다!”
“아, 거!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하십시오!”
거센 반대에 부딪힌 현종이 황당한 얼굴로 입을 쩍 벌렸다.
“아, 아니, 뭐가 말이 안 된다고……. 네놈들은 가지 않느냐!”
“저희랑 장문인이 같습니까?”
“안 됩니다, 장문인. 이런 일에 한 문파의 장문이 직접 나서는 법은 없습니다.”
현영과 현상은 완고했다. 현종의 얼굴에 황망함이 번졌다.
“제자들이 모두 출정하는 일이 아니더냐. 내가 직접 이끄는 게 무어가 그리 이상하더냐?”
“일의 성질이 문제입니다.”
현상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제 더 이상 작은 문파의 장문이 아니십니다. 거꾸로 생각해 보십시오. 소림이나 무당의 장문인이 이런 일로 제자들을 직접 이끌고 녹림으로 쳐들어가겠습니까?”
“그……렇진 않겠지?”
그 양반들이야 워낙에 엉덩이가 무거우니까. 물론 소림의 법정은 최근 들어 조금 가벼워지긴 했지만.
현영이 더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딱 잘라 말했다.
“아무튼 절대 안 됩니다. 본산이나 잘 지키고 계십시오.”
“저 역시 이번엔 현영이랑 정확히 의견이 같습니다.”
“끄으으응.”
현종이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망할 놈들 같으니.’
과거와 달라진 화산의 제자들을 이끌고 강호를 휩쓸 날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그런데 설마 이놈들이 이렇게나 만류하고 나설 줄이야.
그런 현종의 눈치를 잠깐 살핀 현상이 그 마음을 안다는 듯 빙그레 미소 지었다.
“대 화산파의 장문께서 직접 나서기에 이 일은 너무도 사소하지 않습니까. 더 좋은 날이 있을 겁니다.”
“끄응, 알겠다.”
불만이 아주 가시는 것은 아니지만, 현종이라 해서 이들의 말뜻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모양새가 나쁘기야 할 테지.’
명분이야 쌓고 있지만, 결국엔 타 문파의 일에 개입하는 일이다. 이를 문파의 중추라 할 수 있는 장문인이 직접 나서서 진두지휘하는 것은 아무래도 좀 껄끄러운 게 사실이었다.
헛바람으로 부풀었던 가슴을 바늘로 콕 찌른 듯, 현종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신 너희가 신경을 더 많이 써 주어야 한다. 제자들이 모두 나서는 일이다.”
“예, 장문인.”
“걱정하지 마십시오.”
현종의 눈이 좀 더 침중해졌다.
“화산의 명성을 날리는 일은 중요한 일이다.”
“…….”
“녹림을 통해 얻을 이득도, 천우맹을 위한 포석도 중요하다. 대놓고 말할 수는 없지만, 녹림과 어느 정도의 관계를 쌓아 두는 것 역시 그러하지.”
듣고 있던 두 사람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하나.”
현종이 굳은 얼굴로 그런 둘을 보며 말했다.
“제자들의 안전보다 중요한 것은 화산에 존재하지 않는다.”
“…….”
두 장로는 그 목소리에 실린 무게감이 어깨를 짓누르는 걸 느꼈다.
“선택해야 할 일이 있다면 망설이지 말거라. 늘 제자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두면 고민이 덜어질 것이다. 그 어떤 것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모두를 보호하거라.”
“예, 장문인.”
현영이 답지 않게 진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이들이 화산의 근본이자 미래임을 저희도 모르지 않습니다.”
“끄응……. 머리로만 아니까 문제 아니냐. 네 녀석이 따라간다 하니 영 마음이 놓이질 않는구나.”
“아니, 장문인도 청명이 놈 닮아 가십니까? 이런 와중에도 사람을 구박하시게?”
“에휴.”
고개를 휘휘 내저은 현종이 영 못 미덥다는 듯 현영을 바라보다가 현상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네가 부담이 많겠구나.”
현상은 그저 나지막하게 웃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저희가 딱히 무얼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음?”
“청명이 놈이 그 입을 쉬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현종이 수긍하자 현상은 웃음기 어린 얼굴로 말했다.
“그 녀석은 이미 무학으로나 심계로나 저희를 능가한 지 오래입니다. 저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녀석이 너무 막 나가지 않게 제어하는 것뿐이지요.”
“그게 제일 어려운 일일 텐데.”
“그렇긴 합니다만…….”
현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여하튼 너희가 최선을 다해…….”
“아이고, 그만 좀 하십시오! 저희 나이가 벌써 일흔입니다. 이 나이에 잔소리를 끝도 없이 듣고 있어야겠습니까?”
“이놈이 그래도!”
“갑시다, 사형! 여기 있다가는 해 넘어가도록 내내 똑같은 잔소리 듣고 있게 생겼습니다.”
“음, 그럴까?”
현종은 황망한 얼굴로 그 둘을 바라보았다.
“아, 아직 할 말이 무척 많이 남았…….”
“에이이잉!”
하지만 자리를 털고 일어난 현영은 속 시끄럽다는 듯 획 밖으로 나가 버렸다. 현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 뒤를 따랐다.
“가, 같이 가자꾸나! 이놈들아!”
현종이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그런 사제들의 뒤를 쫓았다.
“흐음.”
백천이 날선 눈으로 제자들을 예리하게 점검했다.
복색부터 소지품까지 일일이 확인을 마친 그는 이내 무언가가 거슬리는 듯 눈살을 확 찌푸렸다.
“옷깃!”
“……예?”
“옷깃을 제대로 여며라! 산적처럼 다 풀어 헤치지 말고!”
“예!”
입에서 칼이라도 쏟아지는 양 싸늘한 일갈에, 지적을 받은 이는 헐레벌떡 옷깃을 꽉 여몄다.
백천의 차가운 얼굴엔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했다.
“너희의 복색, 행동 하나하나가 화산이 어떤 곳인지를 보여 준단 걸 잊지 마라! 산에서처럼 마구잡이로 행동한다면 허리를 분질러 버리겠다.”
“아, 알겠습니다, 사형!”
옆쪽에 도열해 있던 조걸과 윤종이 그런 그를 힐끔힐끔 보다가 머리를 맞대고 중얼거렸다.
“왜 저리 까칠하십니까?”
“……화산이 제대로 된 출정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 않느냐. 우리끼리 수레 몰고 다닐 때야 사람들이 관심 가질 일이 크게 없었지만, 이만한 인원이 한 번에 움직이면 누구라도 한 번쯤은 더 돌아볼 수밖에 없지.”
“그렇긴 하죠. 그래도 너무 과하게 신경을 쓰시는 것 아닙니까? 요즘 위장도 안 좋으신데.”
“……그건 이 일 때문이 아니잖아.”
청명이 놈 때문이지.
“인솔이야 장로님들께서 하시겠지만, 저런 부분 하나하나를 직접 두 분이 신경 쓰실 수는 없는 노릇이지.”
“확실히 사숙께서 신경이 많이 쓰이시겠네요.”
조걸이 히죽 웃었다.
하지만 그 순간 갑자기 불똥이 애먼 데로 튀었다.
“웃어?”
“…….”
귀신같이 두 사람을 돌아보며 백천이 말했다.
“너희는 뭐 하고 있는 거냐? 애들 복장 안 살피고.”
“지, 지금 하겠습니다.”
“청자 배들 중 문제를 일으키는 이가 나온다면 너희 둘의 목부터 부러뜨려 버리겠다.”
“……저, 사숙.”
“왜?”
“청명이는 예외죠?”
“…….”
조걸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백천의 말이 급격하게 끊겼다.
심지어 착각인 건지, 순간적으로 백천의 눈 아래에 드리운 그림자가 쑥 내려온 것만 같았다.
“그런데 청명이 놈은 뭘 하고…….”
말이 나온 김에 청명이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조걸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놈 저기서 뭐 하는 거지?”
“응? 어디?”
“저기 있잖습니까. 저놈.”
“……응?”
윤종이 두 눈을 껌뻑였다.
“어? 청명이가……. 음. 그래, 청명이가 맞는 것 같은데…….”
실로 이상한 일이었다.
청명이 놈 덕분인지, 때문인지, 살면서 너무 많은 것을 겪었고 골탕도 숱하게 먹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윤종은 백 장 밖에서도 그를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방금은 청명이의 뒷모습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저 새끼 어깨가 왜 축 처져 있지?’
이건 어지간해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인데?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직감한 윤종과 조걸, 그리고 백천이 청명이가 있는 곳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그리고…….
“헐…….”
“이게 뭐냐?”
“허……. 허허…….”
그들은 이내 입을 다물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청명의 앞에 있는 것을 보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었다.
키이!
사실 딱히 이상할 것 없는 광경이다.
백아가 평소처럼 앞발을 옆구리에 대고 배를 쭉 내밀고 있을 뿐이니까.
녀석이 입고 있는 검은 무복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누가 족제비한테 옷을 입혔어?”
“가, 가슴에 매화 문양도 있는데요?”
화산을 상징하는 무복을 입은 족제비의 모습에, 세 사람은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그 광경을 보기만 했다.
“누, 누가 이런 짓을…….”
“저요!”
그때 옆에서 한 사람이 손을 들고 쪼르르 걸어 나왔다.
“귀엽죠?”
“…….”
나온 이의 얼굴을 확인한 세 사람은 동시에 빙긋 웃었다.
‘소소네.’
‘소소구나.’
‘소소면 못 막지.’
그들도 화산 내에서는 제법 끗발(?) 있는 편이지만, 당소소에게는 감히 딴죽을 걸 엄두도 나지 않았다. 이건 그들이 못나서가 아니었다.
정수리에 대침이 박혀 보면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구라도!
“……이제는 하다못해 짐승까지 문도가 되네.”
“생각해 보면 안 될 것도 없습니다. 짐승보다 더한 놈도 있는데.”
“듣고 보니 그렇구나.”
모두가 그 짐승보다 더한 놈을 슬쩍 돌아보았다.
“…….”
항상 보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거나, 화나게 만들거나, 찜찜하게 만드는 미소를 짓던 청명이건만, 지금은 나라 잃은 독립투사 같은 얼굴이었다.
“시, 신성한 화산의 도복을 지, 짐승 따위가…….”
“왜요? 귀엽잖아요.”
“……사숙.”
청명이 울 것 같은 얼굴로 백천을 돌아보며 물었다.
“……괜찮을까? 진짜 이래도 괜찮을까, 사숙?”
“…….”
백천은 말없이 그의 어깨를 도닥여 주었다.
“진정해라, 청명아. 이런 걸로 당황하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오지 않았느냐.”
“……화산은 글렀어.”
정말이지 아아아주 오랜만에 청명을 향한 진한 공감과 동정을 느끼는 백천이었다.
키이!
“키이는 얼어 뒈질 키이! 확 가죽을 벗겨 버릴라!”
청명이 막 백아와 평소처럼 드잡이를 하려는 순간, 장로들과 현종이 연무장으로 들어섰다. 모두가 후다닥 자리를 찾아 도열했다.
“준비는 다 끝났느냐?”
현종의 물음에 앞에 서 있던 운암이 포권을 하며 답했다.
“예, 장문인. 출정 준비는 모두 마쳤습니다.”
“음.”
현종이 어깨를 쭉 펴며 엄숙히 말했다.
“듣거라.”
“예, 장문인!”
“이 일은…….”
“짧게 짧게 합시다. 장문인. 애들 아아까 전부터 서 있었는데, 또 무슨 잔소리를 길게 하시려고.”
옆에서 속닥이며 초를 치는 현영의 목소리에 현종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이놈은 어찌 나이가 들수록 철이 없어진단 말인가.’
“끄응!”
못마땅한 얼굴로 한숨을 쉰 현종이 버럭 고함을 쳤다.
“다들 윗사람 말 잘 듣고 화산의 명성을 떨치고 돌아오너라!”
“예, 장문인!”
“이상!”
현종이 몸을 획 돌리자 현상이 빙그레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녹림까지는 먼 길이 될 터이니, 모두 문제가 생기지 않게 조심해야 할 것이다.”
“예!”
우렁찬 대답이 돌아왔다.
“너희가 화산의 이름을 짊어지고 있음을 결코 잊지 말거라. 이 산문을 나서는 순간 너희가 곧 화산이며, 화산이 곧 너희들이다.”
그 말에 화산 제자들의 얼굴에 책임감과 긴장이 슬쩍 스쳤다. 현상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출발하자꾸나.”
모두가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이 순간 제자들의 가슴을 채운 것은 녹림을 상대한다는 부담감도 아니고, 화산의 이름을 짊어졌다는 무거움도 아니었다.
‘수련의 성과를 보여 준다!’
‘그렇게 개고생을 했는데, 활약 못 하고 어영부영 돌아오면 억울해서 죽는다.’
‘녹림이고 나발이고 다 쓸어 버리겠어!’
잔뜩 고양된 그들이 막 산문을 향하려는데 순간 그들의 귓가에 싸늘한 목소리가 날아와 꽂혔다.
“어디 자신 있으면 사고 쳐 봐.”
“…….”
모두의 고개가 한곳을 향해 돌아갔다.
두 눈에 핏발을 세운 청명이 놈이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진짜 사고가 뭔지 내가 알게 해 줄 테니까.”
“…….”
한껏 들떴던 마음이 삽시간에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사고 치면 죽는다.’
‘조심 또 조심!’
‘산적은 무섭지도 않아. 저 새끼가 천 배는 더 무섭다.’
현상이 몸을 돌려 현종에게 포권 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장문인.”
“음.”
현종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몸짓을 신호로 현영이 외쳤다.
“가자!”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몸을 돌려 산문으로 행진했다.
현종의 입가에 어찌할 수 없는 미소가 슬쩍 내걸렸다.
‘보고 계십니까? 사부.’
아까부터 선대 장문의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화산이 다시 세상으로 나갑니다. 저들을 지켜봐 주십시오.”
대화산파의 강호행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