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9화. 화산이 개판이 날 겁니다. (4)
“이걸 중원 전체에 알리라고?”
“네.”
홍대광은 멍한 얼굴로 청명이 건넨 종이를 바라보았다.
“이걸?”
“네.”
“이건 녹림의 입장이지 않느냐? 녹림의 입장을 왜 화산이…….”
“아, 녹림왕이 화산에 와 있거든요.”
“누가?”
“녹림왕이요.”
“누구?”
“아니, 이 양반이 가는귀먹으셨나?”
“…….”
홍대광은 황당함을 어쩌지 못하고 입을 쩍 벌린 채 청명을 보았다.
“대체 노, 녹림왕이 여기에 왜 와 있는데?”
“그냥 지가 오던데요?”
“……그냥?”
홍대광의 입이 아닌 눈이 크게 외치고 있었다.
‘도대체 이 산 구석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가?’ 하고.
하지만 청명은 그 격한 반응에도 귀찮다는 듯 혀를 차 댔다.
“그러니까 거지들 통해서 이거 여기저기 좀 퍼뜨려 주세요. 중원 전체에요.”
“화산신룡. 내가 그러니까…… 개방의 분타주인 것은 맞지만, 전 중원의 거지들을 동원할 수 있을 만큼 힘이 있지는 않다.”
“아, 그건 걱정 마세요.”
“응?”
청명이 친절하게 웃으며 홍대광의 걱정을 덜어 주었다.
“어차피 거지 아저씨가 그걸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으니까요. 애초에 바라지도 않아요.”
홍대광의 뺨이 푸들푸들 경련을 일으켰다.
“아니……. 그건 말이 좀…….”
“현실이 그런데 뭘 어쩌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안 바라니까. 그냥 거지 아저씨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돼요.”
“…….”
분명 부담을 덜어 주는 말이다.
하지만 왜 가만있던 위장이 이렇게 뒤틀리는 걸까?
“그, 그럼 소문은…….”
“거지 아저씨 말고도 소문낼 사람은 있어요. 입은 많을수록 좋은 법이니까요.”
“끄응. 일단은 알았다.”
홍대광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요놈이 요즘 슬슬 나를 무능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정말이지 서러웠다.
얼굴에 젖살도 안 빠진 놈이 쪼르르 달려와선 아저씨, 아저씨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
응?
그런 때는 애초에 없었다고?
아, 있었다니까! 예전에는 그래도 지금보다는 사람 같았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생각해 보면 이건 청명이 놈의 인성에 문제가 있어서 벌어진 일은 아니다.
아니, 그러니까 인성에 문제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분명히 문제는 있는데 이 일의 원인이 그의 인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가 처음 화산신룡을 만났을 때에 비하면 지금 화산의 위상은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이다.
과거의 화산은 일개 분타주인 그가 감당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원하는 정보를 모두 얻어다 주기에 분타주라는 직위로는 한계가 있었다.
‘이건 왕거지와 따로 이야기를 한번 해 봐야겠어.’
화산과 신뢰를 쌓는 건 정말 중요한 문제였다. 아무리 개방이 구파일방의 일원이라고는 하지만, 개방의 힘은 결국 정보에서 나온다.
화산이라는 대어를 놓친다면 개방이 강호에서 가지는 입지가 뒤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럼 이것만 퍼뜨리면 되는 거냐?”
“아, 하는 김에 겸사겸사 이것도 전달해 주세요.”
“응? 어디에?”
“이건 유령문, 이건 당가.”
“……유령문이랑 당가?”
“네.”
홍대광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거기가 어디라고! 이놈이 북해에 다녀오더니 거리감이 아주 없어졌나!’
중원 남부에 있는 문파들에게 서찰을 전하는 일이 쉬울 리 있는가?
하지만 홍대광은 차마 어렵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놈이랑 있으면 내가 계속 무능해지는 것 같다니까.’
결국 청명이 내민 서찰을 받아 챙긴 그는 슬쩍 청명을 넘겨다보았다.
“그런데 너 대체 또 무슨 일을 저지르려 하는 거냐?”
“저지르긴 뭘 저질러요?”
“아니,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은데?”
“왜? 구파에 쪼르르 달려가서 보고라도 하시게요?”
“…….”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만 홍대광을 보며 청명이 씨익 웃었다.
“뭐, 그것도 아저씨 마음이죠.”
홍대광의 가슴 한편이 얼음이라도 뒤집어쓴 듯 서늘해졌다.
‘이놈이?’
별것 아닌 말이지만, 그 한마디에 너무 많은 것이 녹아 있었다.
“아마 개방이 이번 일에 대해 관심이 많겠죠?”
“개방? 구파가 아니라?”
“……아저씨 진짜 방주 후보 맞아요?”
“……미안하다.”
의심의 눈초리를 받으며 홍대광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도 나름 총명하단 소리깨나 듣고 자란 사람인데, 이놈과 대화를 하다 보면 영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개방이 어떻게 몸값을 올렸어요?”
“그야…… 남들이 가지지 못한 정보를…….”
“그럼 아저씨는 어떻게 몸값을 올려야 할까요?”
홍대광이 입을 꾹 다물었다.
“세상 이치가 다 똑같은 거죠. 잘해 봐요.”
청명은 히죽 웃으며 돌아서더니 미련 없이 터덜터덜 멀어졌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홍대광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뭔 뱃속에 능구렁이가 단체로 똬리를 틀고 앉았나.’
그리고 이내 몸을 획 돌려 산 아래로 빠르게 뛰어 내려갔다.
“……히익?”
“사, 사람이 갑자기 왜 저렇게 됐어요?”
“약효가 없었나? 분명 나았었는데?”
회의를 위해 전각에 들어선 백천과 그 무리는 녹림왕의 몰골을 보며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다.
눈 밑의 음영이 턱 끝까지 내려와 있고, 안색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희게 질린 입술과 푸르뎅뎅한 낯을 더욱 기괴하게 만드는 것은 나라 잃은 충신 같은 표정이었다.
‘얼마나 시달렸으면…….’
‘아오, 상상하기도 싫다.’
‘청명이 놈 하나한테만 시달려도 지옥 같을 텐데, 거기에 현영 장로님까지 붙었으니.’
임소병이 그 사이에서 무슨 일을 당했을지 생각해 본 그들은 동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그때 임소병이 힘없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앉으……십시오.”
“예.”
“괜찮으세요?”
괜찮냐는 물음에, 그는 대답 대신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인생…….’
무엇을 위해 그리 아득바득 산단 말인가?
고개만 돌리면 피안인 것을…….
“왔으면 빨리 앉아.”
하지만 이곳에는 사람이 도무지 고개를 돌릴 수 없게 만드는 이가 존재했다.
청명은 임소병과 대조될 만큼 멀쩡한 얼굴로 육포를 쭉쭉 뜯어서 질겅질겅 씹었다. 그러더니 작게, 아주 작게 뜯어낸 육포를 임소병에게 내밀었다.
“드실래요?”
“…….”
임소병은 기력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손을 뻗어 청명이 내민 육포 쪼가리를 받아 들었다.
하나.
착!
뭔가 허여멀건 것이 쏜살같이 날아든다 싶더니, 그의 손에 들린 육포를 칼같이 채어 갔다.
“…….”
백아는 임소병의 손에서 뺏은 육포를 야무지게 쥐고 찹찹대며 단번에 먹어 치웠다.
‘……사람이고 짐승이고…….’
이 동네에는 정말이지 제대로 된 게 없었다.
“크흠.”
그때 안으로 들어온 현종이 크게 헛기침하며 현영을 바라보았다.
“협의는 잘 마쳤느냐?”
“서로 만족할 만한 합의를 보았습니다.”
현종은 슬쩍 임소병과 현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얼굴이 반질반질하다 못해 광채까지 뿜는 현영과, 일주일은 굶고 잠도 못 잔 것같이 퀭한 임소병의 얼굴을 보니 그 ‘서로 만족할 만한 합의’라는 게 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이제는 정말로 산적도 등쳐 먹는구나.’
그래도 한때는 꼬장꼬장한 도인 같았던 놈이 어쩌다가…….
현종은 말없이 자리에 앉아 눈을 질끈 감았다. 사실 저 두 사람에게 임소병을 던져 준 순간부터 그도 공범인 셈이었다.
공범이 할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였다.
“그래, 협의가 잘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예, 장문인.”
임소병이 퀭한 눈으로 그를 보며 빠득빠득 이를 갈았다.
“아주…… 아주 자알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원한……. 아니,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현종이 자애롭게 빙긋 웃었다.
‘사람이란 다 똑같구나.’
처음 보았을 때는 산적답지 않은 여유와 문사 같은 풍모로 그를 감탄하게 만들었던 임소병이건만, 화산에서 며칠 지내더니 이제는 악과 독기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 이제 서로 바쁘니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화산이 정확하게 뭘 도와주면 되는 거요?”
임소병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줄 건 다 줬으니 이제 뽑아 먹을 걸 챙길 차례였다.
“수하들과 이야기해 본 결과, 녹채를 습격한 산채의 수는 적어도 셋 이상입니다.”
“셋이라…….”
“확실치는 않습니다. 저는 다섯을 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섯?”
그 순간 백천이 살짝 손을 들었다.
“예.”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런데…… 녹림은 모두 칠십이 채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공식적으로 녹림의 산채는 칠십이 채이지만, 실제로 그 안에 들지 못한 작은 산채들도 녹림의 관리하에 있기는 합니다.”
임소병이 조곤조곤 대답하자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녹림이 모두 칠십이 채라면, 다섯이라는 건 상대적으로 적디적은 수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 다섯 산채가 반란을 일으킨 게, 이렇게나 큰 문제가 됩니까?”
이런 질문을 예상한 듯 임소병은 웃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칠십이 개의 산채가 있다고 한들, 그 각각의 힘이 모두 같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녹림이 가진 대부분의 힘은 상위 열 개 산채에 몰려 있습니다. 그중 다섯이라면 과장 조금 보태어 녹림이 가진 힘의 절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
임소병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들을 상대하려면 남은 다섯 개 산채의 힘이 모두 필요한데, 그중 저를 확실하게 지지하는 곳은 두 개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러자 듣고 있던 청명이 히죽 웃었다.
“말만 녹림왕이지, 이건 뭐…….”
“끄응. 그건 제 병 때문입니다.”
“병이 왜요?”
“구음절맥에 걸린 사람이 요절하는 것이야 모두가 알 만큼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저도 비슷한 것에 걸렸으니, 오래 못 살 거라는 거죠. 그런데 누가 저를 지지하겠습니까. 제가 죽고 나면 개밥에 도토리가 될 텐데.”
“…….”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영단을 먹고 병이 나았다는 걸 공표를 했어야 하는 건데…….”
말하다 보니 또다시 분노가 치민 듯 임소병은 원독에 찬 눈으로 청명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청명이 휘파람을 불며 고개를 돌렸다.
“그럴 수도 있지.”
“끄으…….”
가슴을 움켜잡은 임소병이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골랐다.
“여튼 그래서 그 세 개의 산채만 처리하면 된다는 거죠?”
“예, 간단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흐음.”
청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현종을 바라보았다.
“장문인.”
“그래.”
“거지 아저씨를 시켜서 소문은 퍼뜨려 놨어요. 저 산채들이 있는 곳에 도착할 즈음에는 아마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을 거예요.”
“그럼 더 해야 할 것은 없느냐?”
“예.”
현종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없이 진중한 눈으로 말했다.
“현상. 현영.”
“예, 장문인.”
“내일 오전까지 출정 준비를 마치도록 해라. 제자들에게 상황을 알리고 출발에 차질이 없도록 모두 준비시키거라!”
“예! 장문인.”
그때 대답을 한 현영이 슬쩍 물었다.
“그런데, 장문인. 제자들은 얼마나 데리고 가면 좋을는지요?”
“모두 준비시켜라.”
“예?”
“본산을 지켜야 할 최소의 인원만 남기고, 될 수 있는 한 모두가 출정하도록 한다.”
현영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화산이 비무대회에 참석하고, 새외를 다녀오기는 했지만 그건 언제나 일부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일의 성질이 바뀐다.
현종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제자들은 듣거라.”
“예, 장문인!”
“크나큰 환란으로 화산의 정기가 쇠한 지가 어언 백 년. 그동안 화산은 외부 활동을 최대한 자제하며 내실을 기해 왔다. 하지만 이제 더는 그럴 필요가 없구나.”
현영뿐만이 아니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는 이들은 이곳에 없다. 화산 제자들의 눈에 기이한 흥분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 결의에 찬 눈동자를 본 현종이 빙그레 웃었다.
“이제 세상에 보여 주자꾸나. 모두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화산이 강해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예, 장문인!”
열기가 전각 안을 휩쓸었다.
수십 년 만에 화산이 문을 열어젖히고 세상을 향해 큰 한 발짝을 내딛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