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4화. 빌어먹게 반갑네! (4)
촵촵촵촵촵!
촵촵촵촵촵!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꼴꼴꼴꼴꼴!
꼬올꼴꼴!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도 보조를 맞춰 노래처럼 흘러나왔다.
딱히 특별한 일은 아니다. 화산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니까.
그 소리가 흘러나오는 곳이 식당이 아니라 장문인의 처소이고, 술을 물처럼 마셔 대고 있는 이가 청명이 아니라 백천을 비롯한 그 무리라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크아아아아! 좀 살 것 같네!”
“사형! 사형! 거기 술 좀 줘 봐요!”
“고기 더.”
도가문파의 새파란 제자들이 장문인 앞에서 술과 고기를 탐하는 천인공노할 광경이 펼쳐지고 있건만, 막상 이를 지켜보는 현종의 입가에는 더없이 흐뭇한 미소만이 가득했다.
“천천히들 먹거라. 체할라.”
아이들이 화산으로 올라오자마자 현영은 혹시 모른다며 아침마다 준비하던 술과 고기를 쾌속히 차려 내었다.
처음에야 이들도 눈치를 살폈지만 허기 앞에는 장사가 없었다. 한 술 두 술 뜨다 보니 언제 머뭇거렸냐는 듯 허리끈을 풀어 헤치게 되었다.
“어휴, 이제 좀 배가 차네.”
“중간에 객점이라도 좀 들르자고 했잖습니까!”
“도착해서 먹었으니 됐잖아.”
그때, 익숙한 손놀림으로 청명의 입 안에 당과를 밀어 넣던 현영이 넌지시 물었다.
“한 상 더 차려다 주랴?”
“아닙니다. 장로님.”
“이제 괜찮습니다.”
“그래, 그래. 배고프면 식당에 밥 더 있으니 얼마든지 먹어라. 쯧쯧. 이놈들이 안쓰럽게 다들 퀭해서는.”
안쓰럽단 눈으로 모두를 보던 현영이 혀를 차 댔다.
제자들이 얼추 배를 채운 듯하자 현종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해서, 빙궁의 일은 잘 처리하고 왔느냐?”
“말씀드릴 것이 많습니다.”
슬쩍 등 뒤로 술병을 감춘 백천이 진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좀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럼 내일 듣자구나. 우선은 좀 쉬거라.”
“아닙니다. 내일까지 끌 일은 아닌 것 같으니,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
백천은 살짝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북해에서…….”
그렇게 한동안 긴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들이 북해에 도착해서 본 것들과 빙궁의 사정에 대한 이야기. 마교와 싸웠던 것들까지.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 참 많은 것을 겪었구나 하고 실감할 만큼 길고 긴 이야기였다.
그리고 마침내 백천의 이야기가 모두 끝났을 때, 현자 배들의 얼굴은 이 이상 굳을 수 없을 만큼 차게 굳어 있었다.
“……마교라니…….”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현종과는 다르게 현영의 얼굴에는 과하다 싶을 정도의 노기가 들끓기 시작했다.
“이 정신 나간 놈들 같으니라고!”
이내 커다란 호통이 터져 나왔다.
“마교라니! 마교가 뭔 줄 알고 너희들끼리 그놈들과 전쟁을 벌였단 말이더냐! 그러다가 죽으면 어찌하려고!”
“……몸을 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북해의 상황이 너무도 심각하여…….”
“북해고 뭐고 알게 뭐냐, 이놈들아! 세상에 너희 목숨보다 귀한 것이 어디에 있다고! 그러다가 변을 당했으면 누가 네놈들을 칭송이라도 해 줄 것 같더냐!”
“사제, 진정하게나.”
“지금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진정하라니까.”
현상이 말리자 현영이 영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입을 꾹 닫았다. 하지만 여전히 채 다 풀지 못한 화가 얼굴에 가득했다.
날벼락을 얻어맞은 화산의 제자들은 고개를 푹 숙였다. 현영이 어떤 마음으로 저런 말을 하는지 알기에 차마 변명도 할 수 없었다.
“백천아.”
“예, 장문인.”
“화산의 장문인으로서 나는 너를, 그리고 너희들을 칭찬해야 한다.”
“…….”
“그 이역만리 외딴 곳에서도 협의심을 잃지 않고, 북해인들을 위해 최선을 다한 너희를 어찌 나무랄 수 있겠느냐? 화산이 정파를 자처하는만큼, 나는 응당 너희를 칭찬하고 상을 주어야 할 것이다.”
“장문인…….”
“하나 나는 너희를 차마 그럴 수가 없구나.”
현종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내 심정 역시 현영과 다르지 않다. 그곳에서 너희가 화를 입기라도 했다면 나는 평생 내 결정을 후회하며 살아야 했을 것이다. 대 화산의 장문인 자격이 없다는 말을 듣는다 해도, 나는 이번 일로 너희를 칭찬하지는 않겠다.”
“죄송합니다, 장문인.”
백천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현종은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이 많았다.”
“…….”
“참으로 고생이 많았구나.”
그 말속에 담긴 현종의 마음을 헤아리자니 백천은 어쩐지 눈가가 뜨끈해졌다.
훌륭히 잘했다고 칭찬을 받았다면 기분은 마냥 좋았을 테지만, 지금 같은 감정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화산의 제자들은 지금 현종의 저 말 한마디로 북해에서 했던 모든 고생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북해를 다녀오라고 했더니, 마굴을 다녀왔구나!”
하지만 현영은 여전히 짜증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로 말했다.
“그 망할 소림 땡중 놈이 입을 털어 댈 때 거절을 했어야 했는데!”
“망할 땡중 놈?”
“그 소림 방장 법정인지 뭔지 하는 놈 말입니다!”
“혀, 현영아!”
현종이 화들짝 놀라 혜연의 눈치를 보았다.
“입조심하거라! 여기 우리만 있는 게…….”
“아, 괜찮아요.”
“엥?”
내내 말이 없던 청명이 히죽 웃었다.
“저건(?) 괜찮아요. 마음 놓고 욕하세요.”
“…….”
“지도 욕하더라고요.”
“제, 제가 언제 말입니까, 시주!”
혜연이 당황하여 도움을 구하듯 뒤를 돌아보았지만, 화산의 제자들은 그저 보고 들은 것을 말할 뿐이었다.
“저도 들었습니다.”
“저도요.”
“어휴, 신랄하게 까던데…….”
“…….”
혜연은 세상 억울한 표정으로 입을 벙긋거렸다. 하지만 화산의 제자들은 그런 그를 보며 천연덕스럽게 너스레를 떨었다.
현상과 현종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겠네.’
‘괜찮겠네요.’
아무래도 북해를 다녀오며 혜연과 화산 제자들의 사이가 더욱 깊어진 모양이었다.
문제 아닌 문제가 깔끔히 해결되자 현영이 재차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마교 놈들이 보인다고 조사를 하라더니, 이건 숫제 마굴에다가 사람을 밀어 넣은 꼴이 아닙니까! 북해가 그런 상황인 줄 알았다면 누가 거기에 발이나 들였겠습니까! 대웅전에 불을 질러 버려야 정신을 차릴 놈들 같으니!”
“아, 아미타불! 아미타불!”
혜연은 자신의 귀로 들은 삿된 말을 정화하겠다는 듯 연신 불호를 외어 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또 그 말을 잘못되었다 탓하지는 않았다.
“장문인.”
그때 현상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으음.”
“아무리 그들이 마교의 주류가 아니고 교에서 떨어져 나온 이들이라고는 하나, 천마의 부활을 획책할 정도가 되었다는 것은 다른 마교의 무리들 역시 충분히 힘을 모았다는 뜻일 겁니다.”
“그렇겠지.”
“다행히 우리 아이들이 저들의 계획을 저지했기에 망정이지, 그들의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면 강호에 다시 한번 거대한 환란이 닥쳤을지 모릅니다.”
“음.”
현종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교라는 이름이 가진 무서움을 화산만큼 잘 아는 이들이 또 있겠는가?
“이 일은 우리끼리 논의할 일이 아니다. 이는 강호 전체의 일이다.”
“예.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우선은 소림에 이 사실을 알리고 대책을 강구하라 해야겠구나.”
눈을 감고 도호를 왼 현종이 고개를 들어 눈앞의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래. 잘 알았다. 남은 이야기는 푹 쉬고 난 후에 마저 하자꾸나. 피곤할 터인데 오늘은 그만 들어가 쉬도록 하거라.”
“예, 장문인.”
백천이 고개를 숙이고 몸을 일으키자 모두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청명이 너는 잠시 남거라.”
“저요?”
“그래.”
“네.”
청명이 엉거주춤 다시 자리에 앉자 백천은 슬쩍 불안한 얼굴로 청명을 보다 이내 밖으로 나갔다.
“흐음.”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홀로 남은 청명을 보던 현종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리고 무언가 말하려 입을 떼었다.
하지만 그 순간 현영이 벼락같이 청명에게 달려들어서는 볼을 잡고 좌우로 쭉쭉 늘였다.
“이놈이 또 무리한 짓을 했구나! 으이구, 이놈아!”
“아으아……. 아파여.”
“요놈! 요 고얀 놈! 요놈!”
“아퍼여…….”
“에잉!”
벌게진 청명의 뺨을 놓은 현영은 못마땅한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는 이런 멍청한 짓 하지 말거라! 알겠느냐?”
“그게 뭐 제 맘대로 되나요?”
“이놈이 그래도!”
아예 엎어 놓고 볼기짝을 칠 기세인 현영을 보며 청명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결국 현상이 한숨을 쉬며 사제를 말렸다.
“거 잔소리 그만하고 이리 와 앉거라. 장문인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셔서 청명이를 남긴 게 아니더냐.”
“예, 사형.”
현영이 자리로 돌아오자 현종이 청명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네가 고생이 많았겠구나.”
“고생은요, 뭘.”
“그래. 빙궁과의 관계는 어떤 것 같으냐?”
“한동안은 문제없을 거예요.”
청명이 깔끔한 목소리로 말했다.
“계약도 계약이지만, 일단은 신뢰를 쌓았거든요. 우리가 언제든 저들을 지키려 애쓸 거라는 사실을 안 이상 관계에 문제가 생길 일은 없을 거예요.”
현종은 기꺼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익을 얻는 것은 작되,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더없이 큰 법이다. 네가 참으로 큰 것을 얻어 왔구나.”
청명을 칭찬하는 말에, 현영의 얼굴엔 실로 흐뭇한 웃음이 만개했다.
“아암, 그래야 청명이지.”
현종 역시 현영의 맞장구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너희의 북해행은 분명 의미가 있었지만, 돌아가는 상황은 영 심상치 않은 듯하구나.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 위에서는 무엇보다 방향타(方向舵)를 잘 잡는 것이 중요하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묻건대.”
그는 침착한 눈으로 청명을 보며 물었다.
“이제부터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느냐?”
“…….”
“허심탄회하게 말해 보거라.”
청명은 답지 않게 고민하는 얼굴로 침묵했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모두가 재촉하지 않고 그를 기다려 주었다.
마침내 청명이 고개를 들고 현종을 가만 바라보았다.
“장문인.”
“그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
“이번에 사숙들과 사형들이 없었더라면, 저 역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거예요.”
“으음.”
“화산 역시 마찬가지죠. 언제 마교가 다시 이를 드러낼지 모르는 상황에서 저희 힘만으로 환란에 대비하는 건 어렵습니다.”
“……천우맹이구나.”
“예.”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말뿐인 천우맹을 공식화하고, 서로를 단단히 엮어야 해요. 배는 클수록 안전한 법이죠.”
“공교롭구나.”
현종이 묘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본디 청명이 북해로 간 이유는 소림을 위시로 한 기존의 강자들에게 천우맹의 존재를 공인받기 위해서였다.
한데 북해를 다녀온 뒤 천우맹의 필요성이 더욱 커졌으니 이 어찌 공교롭지 않겠는가?
“당가에 연통을 넣어 개파에 대한 문제를 마무리 지어야겠구나.”
“예. 그게 좋겠어요. 당가와는 따로 할 이야기도 조금 있고.”
현종이 느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화산 역시 나아감을 멈춰서는 안 되겠지. 화산의 명성이 높아지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은 미약할 뿐이다.”
“그렇죠.”
“어렵구나.”
현종의 얼굴에 수심이 깃들자 청명이 슬쩍 눈치를 살피다 입을 열었다.
“그게, 어렵지만은 않아요.”
“으응?”
“그래도 다들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요. 그저 지금처럼만 하면 되겠죠. 느리지만 가장 확실한 길이니까요.”
현종이 말없이 청명을 바라본다. 인자한 눈에 따뜻한 기운이 맴돌았다.
‘기껍구나.’
청명은 언제나 바삐 살던 아이다.
옆에서 보기에는 대체 왜 저렇게까지 급박한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스스로와 주변을 몰아쳤었다.
한데 그랬던 청명이 지금은 그들의 앞에서 느림을 논하고 있다.
‘아니, 느림이 아니지.’
이건 신뢰다.
그가 소리치고 악다구니하지 않아도, 화산과 제 사형제들이 정진을 멈추지 않을 거라는 신뢰.
이는 북해로 떠나기 전의 청명에게는 없던 것이었다.
“이끌겠느냐?”
“함께 가는 거죠.”
뜻 모를 선문답을 나눈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며 빙그레 웃었다.
“너 역시 북해에서 많은 걸 얻어 왔구나.”
“춥기만 했는데요?”
“허허허허허.”
너털웃음을 터뜨린 현종의 입가에 더없이 자애로운 미소가 어렸다.
“그래. 그거면 됐다.”
다시 한번 껄껄 웃어 대는 현종의 웃음소리가 전각 밖으로 울려 퍼졌다.
그리고…….
기나긴 겨울을 지나 봄의 훈풍이 밀려오는 화산의 산등성이 어귀에서, 올해 첫 매화가 소담스레 그 꽃봉오리를 틔웠다.
화산에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
더없이 따뜻한 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