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1화. 빌어먹게 반갑네! (1)
“아우. 좀 살 것 같다.”
“그러게요. 잘 때 발이 시리지 않는다는 게 이리 좋은 것일 줄이야.”
“역시 북해는 사람 살 곳이 못 됩니다.”
천막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뜬 화산의 제자들은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하며 조잘거렸다.
“북해에서는 아침에 일어나면 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는데.”
“새삼 따뜻함이라는 게 얼마나 좋은 건지 알겠다.”
세상 모든 것은 상대적인 법.
남들은 자다가 입이 돌아간다는 초원의 밤이었건만, 북해를 지나온 이들에게는 조금 시원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청명이는 어딜 갔냐?”
“글쎄요? 아까부터 없던데?”
그 말에 백천은 의관을 정제하고는 밖으로 나가 주변을 살폈다.
“청명아?”
그때 연못가에 앉은 청명의 옆모습이 보였다.
모닥불은 이미 꺼졌는지 하얀 연기만 올라오고 있었고, 청명은 그 앞에 멍하니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뭐 해?”
백천의 물음에 청명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응?”
답지 않게 멍한 그 모습에 백천이 고개를 갸웃했다.
“누가 네 돈이라도 훔쳐 갔어? 표정이 왜 그래?”
“사숙.”
“응?”
“헛소리하지 말고 밥이나 해.”
“아, 근데 이 새끼가?”
한숨을 푹 내쉰 청명은 고개를 슬쩍 돌려 라마승들이 묵고 있는 천막을 바라보았다. 안에서 게송 외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아 저들도 일찌감치 일어난 모양이었다.
“……앓느니 죽어야지.”
그 대활불의 환생이라는 꼬맹이는 어제 청명에게 영문 모를 말을 늘어놓더니, 이내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다시 돌아서 버렸다.
천막으로 향하는 대활불을 잡아 보기는 했지만, 그때는 이미 그가 느꼈던 영성과 위압감이 씻은 듯 사라진 뒤였다.
‘돌겠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아이를 붙들고 난리를 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그냥 있자니 아이가 한 말이 자꾸 걸리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밤을 꼬박 새워 버렸다.
한숨을 푹 내쉰 청명은 마침 천막을 나오는 혜연을 보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땡중! 땡중!”
“……시주. 제 법명은 혜연입니다.”
“알았으니까 이리로 좀 와 봐.”
“…….”
시무룩해진 혜연이 다가왔다. 청명이 그런 그를 보며 넌지시 물었다.
“너 어제 들은 이야기 어떻게 생각하냐?”
“어떤 이야기 말씀이신지?”
“그 윤회가 어쩌고, 대활불이 다시 살아나고 어쩌고 했던 거 있잖아.”
“아미타불. 그 말씀이시군요.”
혜연은 조금 난처한 얼굴로 라마승들이 머무는 천막 쪽을 흘끗 보았다.
“서장과 중원의 불가는 모두 석가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기는 하지만, 그 가르침이 온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호오?”
“어제 반선라마께서 하신 말씀 중 윤회에 대한 가르침은 소림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의도적으로 윤회를 하고,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저희의 가르침과는 맞아떨어지지 않습니다.”
혜연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걸 해낼 수 있다면 그야말로 부처라 불려도 할 말이 없지요.”
“사기꾼이라는 거네.”
“그, 그런 의미가 아니라!”
기겁한 혜연이 라마승들이 들을까 겁난다는 듯 천막 쪽을 황급히 살폈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시, 시주. 조심하셔야 합니다. 대활불에 대한 서장불교의 존중은 시주가 생각하는 것 이상입니다.”
“알아.”
청명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는 이미 인간을 신으로 모시는 이들이 얼마나 맹목적일 수 있는지 치가 떨리도록 경험해 보았다. 물론 인간과 부처는 다르고, 저들도 마교와는 다르겠지만 말이다.
‘사람이 그럴 수 있나?’
예전이었다면 헛소리라고 웃어 넘겨 버렸을 것이다. 청명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은 믿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 말은 마냥 넘겨 버릴 수가 없다. 무엇보다 청명이 그 증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청명은 다시 멍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천막이 열리더니 반선라마를 비롯한 라마승들이 합장을 하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청명의 시선은 곧장 반선라마의 뒤에 있는 대활불에게로 꽂혔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얼굴을 보고 있으니, 뭔가 속이 뒤집히는 느낌이었다.
“간밤에는 편히 잘 쉬셨습니까?”
반선라마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 왔다. 마침 천막에서 우르르 나온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포권을 하며 그 인사를 받았다.
“간만에 푹 쉬었습니다. 라마의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배려라니요. 그저 남는 천막을 내어 드린 것뿐입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합장을 하며 빙그레 웃은 반선라마의 시선이 청명에게로 향한다.
“수심이 깊어 보이십니다.”
“…….”
“잠시 걸으시겠습니까?”
청명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마승들과 화산의 제자들을 두고 따로 나온 반선라마와 청명은 드넓은 초원을 가만히 걸었다.
초원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까마득히 넓었다. 걷고 또 걸어도 영원히 그 끝에 도달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기나긴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건 청명이었다.
“대활불은…….”
잠깐 말을 멈춘 그는 조금 더 깊어진 목소리로 물었다.
“스스로가 대활불이라 확신하는 겁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반선라마가 고개를 내저었다.
“옴 마니 반메 훔. 본디 부처란 사람을 넘어선 존재입니다. 사람을 넘어선 이가 다시 사람의 안에 갇혔으니, 자신을 온전히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달뢰라마께서는 이제부터 포달랍궁으로 가 자신을 되찾는 과정을 거치게 될 것입니다.”
“그럼 아직은 그냥 아이라는…….”
“그 또한 아닙니다.”
반선라마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자신을 잃는다 해도 그 깊은 깨달음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지만 부처이고, 부처지만 아이인 셈이지요.”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물론 말 그대로 해석한다면 딱히 어렵지 않은 대답이다. 하지만 반선라마의 말에는 언어로 정제되어 나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서려 있는 듯했다.
가끔 만나 볼 수 있는 현기 어린 선인이나, 깊은 수양을 해 온 불자들과는 또 다른, 그 무언가가.
“그럼…….”
청명이 무언가 말하려 하자 반선라마가 먼저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그 질문에 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
고요하고 심유한 눈이 청명을 응시했다.
“어제 달뢰라마께서 하신 말씀에 대해 묻고 싶으시겠지요.”
“예.”
청명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대처를 하긴 했지만, 그 얇은 천막으로 이 고강한 이의 귀를 막을 순 없었으리라.
“아직 부족한 몸이지만, 불법에 있어서만큼은 나름의 배움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포달랍궁의 라마들을 가르치고 이끌 수 있는 것이겠지요.”
“예.”
반선라마를 겪어 본 이라면 누구도 그 말을 오만하다 욕하고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 저 또한 번뇌와 업에 묶여 있는 인간의 몸. 부처께서 하신 말씀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이해한다는 건 안다는 것이고, 안다는 것은 깨닫는 것이지요. 그럼 제가 이미 부처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반선라마를 보며 청명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달뢰라마께서는 관음의 화신이십니다. 아직은 사람의 틀에 묶여 본인을 자각하지 못하고 계시지만, 성인이 되실 무렵에는 온전한 본인을 되찾게 되실 겁니다.”
“성인이 될 무렵이라…….”
청명이 슬쩍 고개를 돌려 이제는 조금 멀어진 천막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고개는 오래지 않아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럼 아직은 스스로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다는 거로군.’
대활불로서의 드높은 깨달음을 저 육신이 감당하지 못한다는 말일 터. 그러니 다시 대활불과 대화를 나눈다고 해도 청명이 원하는 것을 얻기는 힘들 가능성이 높았다.
반선라마가 굳이 그를 따로 불러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리라.
“청명 도장.”
“예.”
“저는 감히 달뢰라마의 진의(眞意)를 알 수 없습니다.”
“…….”
“하지만 감히 달뢰라마의 깊은 깨달음을 따르기 부족한 저로서도 청명 도장이 남다르다는 것만은 알 수 있습니다.”
반선라마의 진중한 시선이 청명에게 꽂혔다.
“남다르다?”
“저는 달뢰라마의 환생을 확인하기 위해 평생 법안(法眼)을 갈고닦아 왔습니다. 그런 저에게는 청명 도장이 지닌 남다름이 보입니다. 무어라 정의할 수는 없지만, 도장은 다른 평범한 이들과는 분명 다릅니다.”
청명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가만히 곁에 선 노승을 바라보다 말했다.
“라마.”
“예, 도장.”
“불가의 가르침대로라면 사람이 윤회를 하는 것은 긴 시간 동안 수행을 쌓아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이라 하셨죠?”
“그러합니다.”
“혹여 윤회에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습니까?”
반선라마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알지 못합니다.”
“…….”
“세상의 흐름이란 더없이 큽니다. 그 안에서는 어떠한 일도 벌어질 수 있지요. 감히 제가 아제불타(阿提佛陀)의 지엄한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청명은 이번에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도장께 드리고 싶은 말은 하나입니다.”
청명이 의문 어린 눈으로 바라보자 반선라마가 합장을 한 채, 작게 게송을 외었다.
“인간은 누구나 고통을 버텨 내며 살아갑니다. 인간에게는 언제나 번뇌가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번뇌…….”
“옴 마니 반메 훔.”
반선라마는 더없이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불도를 걷는 이들은 자신의 업을 이겨 내고, 번뇌를 극복하기 위해 불법을 배웁니다. 지금 도장께서 겪고 있는 것이 설사 고통이라 할지라도 그 고통이 그저 헛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뜬구름 잡는 것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 뜬구름 잡는 말을 듣고 나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결국은 스스로 할 수밖에 없는 거네요.”
“도가 역시 같지 않습니까?”
“…….”
“깨우친 자는 신선이 되지요. 하지만 누구도 깨우치지 못한 이를 강제로 깨우치게 해 줄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깨닫고 알아야 합니다.”
“……도가의 법도 아세요?”
“허허. 알지요. 중원의 도가 역시 따져 보자면 서장의 불법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중원 도가에서 모시는 무량수불도 원래는 불가의 아미타여래 아니겠습니까?”
“아니, 이 양반이?”
도가를 무시하는 말에 눈을 부라렸던 청명은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거 인간미 없으시던 분이 이제 좀 사람 같네요.”
“하하하.”
시원하게 웃은 반선라마는 온기 가득한 눈으로 청명을 응시했다.
“도장.”
“예.”
“밖에는 답이 없는 법입니다.”
“…….”
“도장께서 간절히 답을 궁구해야 할 때가 오면, 그저 자신을 보십시오. 모든 답은 도장의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를 마주 보던 청명은 천천히 양손을 모아 합장을 했다.
“무량수불.”
웬만해서는 도호를 외지 않는 청명이 반선라마에게는 예외였다. 이는 청명이 표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공경이었다.
“감사합니다, 라마.”
“별말씀을.”
대화를 마친 반선라마가 고개를 돌려 천막 쪽을 바라보았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저는 이제 불자로서 하루빨리 달뢰라마를 포달랍궁으로 모셔 가야 합니다.”
“예. 시간을 뺏어 죄송합니다.”
반선라마가 고개를 저었다.
“인연이란 다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이곳에서 제가 도장을 만난 것 역시 그저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
“…….”
“부디 번뇌를 이겨 내시길.”
합장을 하며 고개를 깊이 숙인 반선라마는 청명을 남겨두고 천막을 향해 걸어갔다.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청명은 그 자리에 아무렇게나 털썩 주저앉았다.
“인연이라…….”
그리고 피식 웃었다.
“도사한테 못 하는 말이 없으시네, 저 양반.”
가만히 눈을 감은 그의 귓가에 바람 소리가 작게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