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9화. 이번에는 반드시 지켜 낼 테니까! (4)
가슬가슬 깎은 머리.
그리고 몸에 두른 자줏빛에 가까운 적포(赤布).
분명 스님의 복장이었지만, 혜연의 복색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라마승?’
백천이 의문 어린 눈으로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천막에서 나온 중들이 합장을 한 채 일제히 노래하듯 게송(揭頌-불교적 교리를 담은 시)을 읊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선두에 선 이가 빙그레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옴 마니 반메 훔. 스쳐 지나는 것조차 인연인 것을, 이런 곳에서 만난다는 건 더없는 인연이 아니겠습니까. 뵙게 되어 실로 반갑습니다.”
“아…….”
당황하여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던 백천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포권을 해 보였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중원 화산파의 이대제자인 백천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제 사형제와 사질들입니다.”
“화산.”
라마승이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눈을 반짝였다.
“귀인들을 뵙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에 화답하여 백천 역시 더욱 깊이 포권 했다.
‘뭐가 뭔지 모르겠네.’
불교와는 조금도 관계없어 보이는 초원에서 갑자기 스님들이 튀어나온 것도 당황스럽고, 아무리 봐도 중원의 복색이 아닌데 이토록 유창한 한어(漢語)가 나온다는 것도 황당했다.
백천의 얼굴에 여러 의문이 스치는 걸 확인한 라마승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리고 시원스레 그 해답을 주었다.
“저희는 포달랍궁의 승려들입니다.”
“아!”
백천이 외마디 탄성을 내질렀다.
‘여기서 포달랍궁의 사람들을 만날 줄이야.’
마침 새외사궁 중 하나인 북해빙궁을 방문하고 중원으로 돌아가는 중이건만, 그 와중에 또 다른 새외사궁의 사람들을 보게 되다니.
공교롭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초원에는 주인이 없으나, 먼저 온 이가 뒤에 온 이를 세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안으로 드시지요. 따뜻한 차와 먹을 것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음……. 그럼 그리하겠습니다.”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대접을 받아야 할 만큼 곤궁한 입장은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서 거절하는 것 역시 예의에 어긋난다.
“모두 이쪽…….”
화산의 제자들을 안으로 안내려하려던 이의 시선이 문득 혜연에게로 닿았다. 그는 더없이 경건한 얼굴로 합장을 했다.
혜연 역시 평소보다 배는 진중한 얼굴로 반장하며 그의 인사에 답했다.
“수행이란 안온한 사찰 안에만 있지 않을 터, 길 위에서 가르침을 구하는 비구를 이리 만나게 되어 무척 반갑습니다.”
“아미타불. 부처의 가르침 아래 어찌 다른 길이 있겠습니까. 수양 깊은 분들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혜연의 답에 라마승이 빙그레 웃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천막 안을 데워 두었습니다.”
그들은 중앙에 있는 커다란 천막 쪽으로 화산의 제자들을 인도했다. 청명이 심드렁한 얼굴로 그 뒤를 따르려던 차에 백천이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청명아.”
“응?”
“괜찮겠느냐? 새외사궁 중 하나인 포달랍궁이 몽골을 오고 간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괜히 엮이지 않는 게…….”
백천의 우려 섞인 말에 청명은 피식 웃었다.
“이미 엮였는데 뭘 엮이지 말라고?”
“…….”
“그리고…… 저쪽에서 마음먹으면 어차피 도망 못 가.”
“……응?”
“악의가 없으니 다행이지.”
백천은 청명의 말을 들으며 순간 고민에 잠겼다.
청명의 말만 들어 보면 굉장히 저들을 고평가하는 듯했다.
물론 다른 이가 이런 말을 했다면 이상할 것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온갖 문파의 장로며 장문인들, 심지어 빙궁에서 상대했던 주교조차도 깔보던 청명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니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가자. 눈으로 봐 둬. 저 안에 거물이 있는 것 같으니까.”
“…….”
화산 제자들은 살짝 긴장한 얼굴로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의 앞에 선 라마승이 안쪽을 향해 합장하며 입을 열었다.
“라마. 객들을 모셔 왔습니다. 중원 화산파의 문하들이라 합니다.”
“화산이라.”
한편 화산의 제자들은 눈앞에 펼쳐진 모습에 적잖이 당황한 상태였다.
‘뭐지?’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사실 딱히 특별할 게 없는 천막이었다. 그들을 인도한 라마승을 제외한 두 명의 라마승과 한 명의 아이가 중앙에 있는 화로에 둘러앉아 있을 뿐이었다.
‘아이?’
백천은 자신이 느낀 위화감의 정체를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다.
사람이 앉는 위치에는 ‘제자리’라는 게 있다. 그리고 이 천막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라고 한다면 입구가 되는 곳의 반대편, 즉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자리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 앉은 이는 나이 든 노승이 아니라, 이제 겨우 철이나 들었을까 싶은 작은 아이였다.
“어서 오십시오.”
먼저 인사를 건네 온 건 아이가 아니라 그 옆을 지키고 앉은 노승이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자리를 내어 주신 덕분에, 긴 여행에 지친 몸을 잠시나마 쉬어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별말씀을.”
백천의 말에 노승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실로 인자하고 부드러운 미소였다.
백천은 이미 소림의 노승들을 만나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눈앞의 이들은 소림의 승려들과 그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수염이 없어서 그런가?’
길게 자란 흰 수염이 인상적이었던 소림의 노승들과 다르게, 라마승들은 수염을 기르지 않았다. 수염 없는 주름진 얼굴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무언가 이질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리 앉으십시오.”
“아, 예…….”
“차인(次仁).”
“예!”
“차를 내 드리거라. 긴 여행에 몸이 식으셨을 터이니.”
“예, 라마.”
노승이 티 없는 미소를 짓는다. 경계를 늦추어선 안 될 상황이건만 그 미소를 보고 나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졌다.
“옴 마니 반메 훔.”
노래하듯 육자진언(六子眞言)을 외운 노승이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화산의 제자 분들을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부처의 법을 따르는 이로, 포달랍의 비구들은 저를 반선라마(班禪喇嘛)라 부릅니다.”
“아, 그러십…….”
“바, 반선……!”
“히이익! 반선라마!”
태연히 대답하려던 백천의 등 뒤에서 기겁한 목소리가 순간 터져 나왔다. 백천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조걸은 목젖이 보일 정도로 입을 쩍 벌리고 있었고, 그 뒤에 앉은 당소소는 숫제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뭐지?’
그때 청명이 대뜸 입을 뗐다.
“귀하신 분께서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대요? 엉덩이가 무거우실 텐데.”
“야, 이 새끼야!”
“말투, 이 새끼야!”
소소야…….
그래도 사형인데 이 새끼는 좀…….
걸아는 그렇다 치고 너까지 그러면…….
어이없게도 청명을 옹호하는 입장이 되어 버린 백천은 희게 질린 당소소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반선라마가 무엇이기에 저 두 사람이 저러는 건가?
그때 무릎걸음으로 다가온 당소소가 백천의 뒤에 바짝 붙었다. 그리고 그의 귀에 아주 작게 속삭였다.
“반선라마는 포달랍궁의 이인자를 지칭하는 말이에요.”
“아, 그렇구……. 뭐?”
순간적으로 당소소를 다시 바라본 백천이 찢어져라 눈을 부릅떴다.
이인자?
포달랍궁의 이인자? 그럼 부궁주급이란 말인가?
화등잔만 해진 백천의 눈이 획 반선라마 쪽을 향해 돌아갔다.
‘이 사람이?’
아무리 보아도 기이했다.
소림의 노승들에게선 확실히 위엄이 느껴졌다. 그들에 대한 호오를 떠나 높은 불법과 무위가 주는 근엄함만은 부정할 이들이 없을 것이었다.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 그 깊은 수양이 절로 와닿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반선라마에게서는 그런 수양의 깊이가 자아내는 향취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도 평범했다.
몸에 두른 승포와 깎은 머리만 아니라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촌로처럼 보일 정도였다.
청명이 말하는 거물의 정체가 바로 이 노승이라는 것을 알아챈 백천은 몇 번이고 눈을 끔뻑거렸다.
‘왜 여기에 포달랍궁의 이인자가?’
그런 백천의 의문을 풀어 주겠다는 듯 청명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물었다.
“이유도 없이 이런 먼 곳에 오실 분 같지는 않은데.”
그러자 반선라마는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모든 이에게는 사연이라는 게 있는 법이지요.”
“혹시 그 사연을 물어도 될까요?”
“그리 대단치 않은 일입니다.”
“흐음.”
청명의 입가에 흥미롭다는 듯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때 마침 차인이라 불린 자가 그들에게 잔을 돌리더니 화로 위의 놋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차를 따르는 움직임이 퍽 정갈하고 공손했다.
졸졸졸졸.
뜨거운 김이 흘러나왔다. 코를 파고드는 차향에 조금쯤 마음이 진정되었는지, 청명은 연신 차를 홀짝였다. 그에게 늘 차를 권하고 실망했던 장문인이 보면 가슴을 칠 광경이었다.
“아, 좋네요.”
“입에 맞으신다니 다행입니다.”
실로 소탈한 모습이었다.
자신의 신분을 밝힌 후에도 반선라마의 태도는 처음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화산의 어린 제자와 포달랍궁의 반선라마 사이에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차이가 있음에도 말이다.
“말씀하기 힘드시면 더는 묻지 않을게요. 캐물으려는 건 아니었어요.”
청명의 말을 들은 반선라마가 살짝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빙그레 웃었다.
“오해가 조금 있었던 모양입니다. 말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정말 대단치 않은 일이라는 의미였습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인 법이지요. 저희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일이 시주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합장을 하고 짧게 게송을 왼 반선라마는 청명 일행을 하나씩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나 궁금하시다면 굳이 숨길 일도 아닙니다. 저는 그저 제가 맡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고, 이들은 그런 저를 따라 포달랍의 행사를 돕는 중입니다.”
“역할이요?”
“예.”
반선라마가 티 없이 맑게 웃었다.
“포달랍궁에서 불도를 걷는 이들은 모두가 자신의 불법을 추구해야 하며, 중생을 구제하는 데 힘을 써야 합니다. 하나 반선라마의 칭호를 받은 이는 조금 다른 일도 해야 하는 법이지요.”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만 집중되어 있었다. 반선라마는 조용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했다.
“바로 달뢰라마를 찾는 것입니다.”
“예?”
달뢰라마를 찾는다?
선뜻 이해하지 못한 화산의 제자들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는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포달랍궁의 법황인 달뢰라마는 수행을 통해 오르는 자리가 아닙니다. 중원에서 오신 여러분은 이해하기 힘든 일일지 모르지만, 달뢰라마가 될 이는 날 때부터 정해져 있습니다.”
“날 때부터?”
“예. 달뢰라마는 그런 이지요. 그리고 반선라마는 그 달뢰라마를 찾아내는 역할을 맡은 이를 칭합니다. 거듭된 수행을 통해 법안(法眼)을 갖추어 다시 태어난 달뢰라마를 알아볼 수 있게 되면 비로소 반선라마가 될 수 있습니다.”
백천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이 대화에서 한 가지 사실을 짐작한 것이다.
북해보다 더 먼 서장에서 이곳까지 반선라마가 직접 행차할 일이 또 뭐가 있겠는가?
“그, 그 말씀은 혹시……?”
백천의 짐작이 맞았다는 듯 반선라마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합니다.”
그러더니 빙긋 웃으며 제 옆에 앉아 있는 작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그저 작은 아이를 바라보는 것이라 보기 힘들었다.
더없는 공경과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이분이야말로 관음보살의 화신이시자, 살아 있는 부처(活佛)이신 달뢰라마이십니다.”
“다, 달뢰…….”
백천은 숨이 막힌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반선라마라는 이름은 오늘 처음 들었지만, 달뢰라마라는 수도 없이 들어 보았다.
대활불(大活佛).
저 서장을 수호한다는 포달랍궁의 법왕이자, 살아 있는 부처로 불리는 불법의 화신.
“얘가 대활불이라고요?”
어지간한 일로는 잘 놀라지 않는 청명도 답지 않게 눈을 크게 뜨고 앞에 앉은 작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눈빛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깊고 그윽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그 눈으로, 소년은 청명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의미를 짐작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