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9화. 기왕 할 거면 제대로 해야죠! (4)
“다 실었어?”
“응.”
“준비는 다 끝냈고?”
“당연하지.”
청명은 수레에 차곡차곡 쌓인 나무 상자들을 보며 새삼 놀랐다.
‘이제는 따로 시키지 않아도 잘하네.’
예전에는 갓 태어난 굼벵이 같았던 것들이 이제는 알아서 착착 똑소리 나게 준비를 한다.
청명은 끊임없는 갈굼과 잔소리가 효과가 있었다는 걸 확인했으니 앞으로는 더욱더 열심히 구박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때 그의 눈에 못 보던 것이 걸렸다.
“그런데 상자 위에 저 보따리들은 뭐야?”
“식량.”
“응?”
백천이 이 질문만을 기다렸다는 듯 눈에 불을 켰다.
“당가주께서 돌아갈 길에 먹을 식량을 따로 챙겨 주셨다! 내가 눈물이 다 나더라! 누구랑은 다르게 얼마나 사려 깊고 따뜻하신지.”
“그 양반은 왜 쓸데없는 짓을…….”
“그 양반이라니! 우리 아버지한테!”
당소소가 청명의 다리를 획 걷어찼지만, 그는 가볍게 피해 내며 눈살을 찌푸렸다.
“에잉. 애들 자꾸 이런 거 주면 근성 없어지는데!”
“그럼 혜연 스님은 오는 길에 풀 뜯어 먹었으니 천하제일 근성이라도 생겼게? 이 새끼야! 근성은커녕 사람이 피골이 상접을 했더라! 그렇게 빛이 나던 사람이, 얼마나 못 먹었으면 이제 다 꺼져 가느냐고!”
“그래도 머리는 빛나잖아.”
“와…… 나쁜 새끼.”
한쪽에서 누군가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누구도 차마 그쪽으로 시선을 돌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어쨌든 그럼 준비는 끝났다는 거군.”
청명이 고개를 몸을 획 돌렸다.
“자, 그럼 출발하자고.”
그들이 대문을 나서자 당가의 식솔들이 북적이며 몰려 나왔다. 흔치 않은 손님들을 배웅하기 위해서였다.
뭐 그것까지야 그렇다 치지만…….
뿌오오오오오오오!
“……쟤들은 왜 섞여 있냐?”
“여기가 당가인지 야수궁인지 모르겠네.”
야수궁주가 끌고 온 짐승들까지 사람과 함께 열을 맞춰 화산의 제자들을 배웅한다는 게 문제였다.
“하하하하핫.”
마지막으로 수레까지 끌고 나온 화산의 제자들을 향해 야수궁주 맹소가 다가왔다. 그는 흥미롭다는 듯 수레를 보며 물었다.
“흐음. 그걸 끌고 가는 건가?”
“……예.”
제자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야수궁주가 손을 뻗어 수레를 살짝 들어 보았다.
“호오. 괜찮은 수련법이로군. 우리 궁도들에게도 적용하면 좋겠어.”
“…….”
화산 제자들의 얼굴이 슬쩍 창백해졌다.
그런 것까지는 닮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때 청명이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언제 돌아가시게요?”
“자네가 지금 가는데 내가 오래 머물러 봐야 뭐 하겠는가? 이제 나도 슬슬 돌아가 봐야지. 다만 아직 당가와 무역에 대한 부분이 정리가 끝나질 않아 하루 정도는 더 머물러야 할 것 같네.”
“괜히 욕심 부리지 마시고, 서로서로 양보 좀 해 주세요. 좋은 게 좋은 거잖아요.”
“하하하핫. 명심하지.”
야수궁은 이 기회에 사천과의 교역을 조금 더 늘릴 계획인 모양이었다. 실제로 지금 논의하고 있는 부분은 기존의 차 무역이 아니라 다른 물품들에 대한 부분이었다.
그 역시 실제로 들어가는 상단은 사해상단을 비롯한 화산의 상단이겠지만 말이다.
“쩝. 역시 아쉽구만. 야수궁에도 들르면 많은 이들이 환영할 텐데.”
“저도 가고 싶은 마음은 간절한데, 아시다시피 제가 바빠서요. 궁주님 뵀으니 됐죠, 뭐.”
“그래. 다음에는 꼭 들르게. 꼭.”
“네, 약속할게요.”
청명의 약속에 야수궁주는 시원스레 씨익 웃었다.
“일전에 자네가 살려 준 묵린혈망의 새끼들이 꽤 많이 컸다네.”
“술 담가도 될 정도로요?”
“……아니네. 그냥 잊어 주게.”
야수궁주가 질린 얼굴로 물러났다.
그러자 이번에는 당군악이 다가와 인사를 건네었다.
“먼 길이 될 텐데 살펴 가도록 하게.”
“네. 걱정 마세요. 이래 봬도 다들 몸은 튼튼하거든요.”
“그래 보이는군.”
그때 당소소가 쪼르르 달려 나와 당군악을 향해 허리를 접었다.
“아버님! 소녀! 더 강한 무인이 되어 돌아오겠습니다!”
우렁차고 씩씩한 그 인사에, 당군악은 물끄러미 딸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소소야.”
“예!”
“몸만 건강하거라.”
당소소는 바로 답하지 못하고 잠깐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러다 이내 다시 고개를 숙였다.
“……꼭 그럴게요.”
“그래.”
당군악의 입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예전과는 사뭇 달라진 당소소의 모습에, 가문 내의 시비들이나 여인들은 여전히 눈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당군악은 이제 딸의 외양이 변화한 것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이대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만을 바랄 뿐.
그의 시선이 청명에게로 향했다.
“논의한 부분은 최대한 빨리 진행하도록 하겠네. 따로 상의해야 할 일이 있다면 상단을 통해 서신을 보낼 테니, 지체 없이 답변을 주게나.”
“굳이 그럴 필요까지. 어련히 잘 알아서 하실 텐데.”
“문파의 입장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네. 그럼 그건 장문인께 말씀드릴게요.”
“그것도 좋겠지.”
“자, 그럼.”
이제 인사도 나눌 만큼 나눴겠다, 청명은 슬쩍 주위를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출발할…….”
그런데 그때.
파아아아앗!
사람들 틈에서 백색의 섬전이 튀어나와 청명의 다리를 휘감았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어깨에 자리를 잡았다.
“……뭐냐?”
“백아네?”
조걸이 눈을 끔뻑였다.
“쟤 지금 같이 가겠다고 저러고 있는 거야?”
“……그렇게 무서워하더니. 성격 진짜 이상하네.”
모두가 신기하다는 얼굴로 청명의 어깨에 자리 잡은 담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청명은 이상하게 영 달갑지 않은 얼굴이었다. 심지어는 어깨 위에서 떼어 내려 했다.
“뭐야. 안 내려가?”
백아는 그의 어깨를 잡고 악착같이 버텼다.
“왜? 저리 좋아하는데 데리고 가지?”
백천의 말에 청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얘 이름이 백전(白電)이잖아.”
응?
아, 원래 저 담비 이름이 백전이었지. 다들 백아라고 불러서 까먹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왜?”
“마음에 안 들어.”
“응?”
청명은 여전히 불퉁한 얼굴로 백아의 머리를 콩콩 때렸다.
“백전 이놈 아주 허여멀건 게 밥값은 못 하고, 생긴 것만 이쁘장하지, 하는 양은 영 허당이고. 하여튼 쓸데없이 손만 많이 가는 멍청이 같은 놈이라니까?”
“……이 새끼가?”
백천의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하지만 청명은 어깨를 으쓱했다.
“왜 사숙이 화를 내?”
“끄으으응.”
그는 백아의 턱을 긁으며 말했다.
“어휴. 나니까 이런 것도 밥 챙겨 주는 거지. 종남 같았으면 벌써 어디다 팔아먹었을 텐데. 아니, 그 전에 지가 뛰쳐나갔으려나?”
“아, 하지 말라고!”
“흐지믈르그으.”
카아아악!
하다못해 담비까지 백천을 놀려 대었다. 차마 당가인들이 모인 곳에서 발작을 할 순 없으니, 백천은 그저 자신의 허벅지만 움켜잡았다.
청명이 혀를 차며 백아의 목덜미를 쥐고 들어 올렸다. 그때 다가온 야수궁주가 껄껄 웃었다.
“녀석이 자네가 마음에 든 모양이로군. 데리고 가게.”
“네? 나름 영물인 것 같은데요?”
“야수궁은 야수와 함께 사는 곳이지 야수를 종으로 삼는 곳이 아닐세. 녀석이 원한다면야 말릴 수 없는 일이지.”
그러더니 그는 그 솥뚜껑 같은 손으로 머리를 긁었다.
“게다가 음…… 사실 그 녀석은 궁에 없는 게 더 도움이 되기도 하거든. 워낙 성질이 포악하고 다른 약한 짐승들을 괴롭히는지라. 나도 아주 골치가 아파.”
“약한 짐승이요?”
“저기 있는 호아가 대표적이지.”
청명이 고개를 획 돌렸다.
그가 깔고 누워 자던 집채만 한 호랑이가 백아를 곁눈질로 보며 꼬리를 말고 있었다.
“……뭔 호랑이가 덩치 값도 못 하고…….”
“덩치가 중요한 게 아니네. 영물이란 그런 존재거든. 그러니 좀 데려가게나. 밤마다 아주 난리도 아니라니까.”
야수궁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편 그 이야기에 백천과 나머지 제자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짐승계의 청명이네.”
“그 주인에 그 담비네.”
“똑같아.”
청명만이 고개를 갸웃하며 백아의 턱을 톡톡 긁어 주었다.
“이상하네. 엄청 순한 것 같은데.”
“응, 순하지.”
“호랑이 턱주가리도 갈겨 버리고. 진짜 순하더라.”
세상의 모든 것은 상대적인 법이다.
“쯧.”
청명이 작게 혀를 차며 백아를 눈높이까지 들어 올리며 시선을 마주했다.
“네 밥은 네가 찾아 먹어라. 알았어?”
담비는 목이 부러져라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재빨리 청명의 뺨에 달라붙어 자신의 보들보들한 볼을 비비기 시작했다.
“아, 간지러워. 떨어져!”
백아를 밀어 낸 청명이 당군악을 보며 말했다.
“그럼 저희 진짜 갈게요.”
“그래. 조심히 가게나.”
“가자!”
화산의 제자들이 수레를 끌기 시작했다. 그 생경한 광경에 모두 신기해하긴 했지만, 전처럼 놀라지는 않았다. 이제는 화산이 벌이는 일이라면 그러려니 할 수 있게 된 사천당가였다.
“조심해서 가십시오!”
“또 뵙겠습니다!”
“화산 만세!”
열렬한 배웅이 이어졌다.
“흠.”
청명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반쯤 요식 행위에 불과하지만, 언젠가는 저 외침에 진심이 담기는 날이 올 것이다.
대문을 완전히 벗어난 그는 슬쩍 걸음을 멈췄다.
“잠깐.”
“응?”
“기다려 봐.”
뒤로 돌아선 그는 문 안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당군악과 시선을 마주했다.
“당가주님!”
떠날 것 같던 청명이 크게 외치니 당군악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는가?”
모두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자 청명은 씨익 웃었다.
“좋은 검도 받았고, 밥도 잘 먹고 갑니다. 이렇게 환대를 받고 그냥 가기는 뭣하니 선물 하나 드리고 갈게요.”
“……으응? 선물?”
선물이라는 말에 모두가 그를 뚫어져라 주시했다. 이런 상황에 무슨 선물이란 말인가?
그때였다.
스르르릉.
청명의 허리춤에 매여 있던 암매검이 천천히 뽑혀 나왔다.
“오!”
“……세상에.”
이곳은 다른 곳도 아닌, 사천당가.
가까이서 보지 못한다 해도 이 검이 가진 가치를 알아볼 이는 얼마든지 있었다.
검을 뽑아 든 청명이 천천히 암매검을 늘어뜨렸다. 검신에 음각 된 매화의 문양이 햇살을 받아 그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저런 보검이…….”
“아름답구나.”
당가인들 모두가 암향매화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청명은 모두의 시선이 모이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반대가 많았다라.’
그 말인즉 아직 당군악의 선택을 의심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아직도 화산을 믿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탓할 일은 아니다. 화산은 이제 막 기지개를 켠 문파에 불과하니까. 그 능력을 모든 곳에서 인정받는 데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앞으로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당군악에게 힘을 조금 더 실어 주어야 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말로는 안 되지.’
눈으로 보는 것에 비할 수는 없으니까.
스슷.
청명의 검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래로 늘어뜨려졌던 검이 느릿하게 반원을 그리다 이내 하늘을 겨누었다.
그 광경은 지켜보는 이들의 눈에 화인처럼 틀어박혔다.
이윽고…….
얇디얇은 검신이 부드럽게 떨리기 시작했다.
마치 연검처럼 부드럽지만, 연검과는 비할 수 없는 힘을 담고 있다. 당조평이 혼을 불어넣은 검은 처음부터 청명과 함께했던 것처럼 그의 의지를 완벽하게 구현해 냈다.
“화산과 사천당가가 친구가 되었다는 증표로 매화 한 송이를 남기고 갑니다. 이 매화가 지기 전에는 두 문파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을 겁니다.”
개화.
아침의 이른 햇살이 비친 검 끝에서, 매화 한 송이가 선명하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붉디붉어 절로 탄성을 자아내는 매화가 한 송이.
또 한 송이.
당가의 식솔들은 모두 입을 쩍 벌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당가의 대문을 넘어 이어지는 대로(大路).
어찌 보면 삭막한 그곳에 피어난 매화가 바람에 흩날렸고, 이내 또 다른 꽃송이가 연이어 개화했다. 그렇게 피고 또 핀 매화는 순식간에 대로를 아름다운 매화 숲으로 바꿔 놓았다.
“세상에…….”
무공의 경지가 낮은 이들은 그 기경할 광경에 전율했다.
그리고 나름 자신의 무위에 자신이 있는 이들은 그 피어난 매화의 정교함에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 저리 정교한 검초를…….’
‘비무대회에서보다 몇 배는 더 강해지지 않았는가?’
때마침 바람이 길게 불어왔다.
그러자 청명이 피워 낸 매화가 하늘을 가리며 일제히 솟구쳤다. 그리고 마침내 천천히 흩날리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온 하늘에 꽃의 비가 내리는 것처럼(滿天花雨).
떨어져 내린 꽃잎들은 물결치듯 밀려가더니 이내 당가의 대문을 지탱하는 거대한 기둥을 휘감으며 돌았다.
사가가각.
사각.
무언가를 간질이는 듯한 작은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기둥을 휘돌던 꽃잎들은 다시 솟구쳐 마침내 사라졌다.
“오…….”
홀린 듯 그 광경을 바라보던 이들은 사라져 가는 꽃잎을 보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 순간.
“저, 저거!”
기둥을 본 이들 중 하나가 놀라 소리쳤다.
어느새 당가의 기둥에 수십 개의 매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장인이 심혈을 기울인 것처럼, 더없이 생생하고 정교한 매화의 문양이.
스르르릉.
가볍게 납검한 청명은 당가의 식솔들을 향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또 뵐게요!”
“우와아아아아아아!”
“화산신룡!”
조금 전과는 살짝 다른, 말 그대로 진심이 담긴 환성이 우레와 같이 쏟아졌다.
웃으며 손을 흔들어 준 청명은 당군악과 시선을 나눈 뒤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백천이 조용히 물었다.
“한 송이라더니?”
“정 없다 싶어서.”
“싱겁기는.”
백천이 피식 웃고는 소리쳤다.
“가자!”
“예!”
화산의 제자들이 육중한 수레를 끌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가는군요.”
“그렇구나.”
어느새 당군악의 옆에 선 당조평이 아련한 눈으로 멀어지는 화산의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화산의 매화가 강호를 뒤흔들겠구나.”
“이미 그렇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당조평은 청명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가자꾸나. 우리도 뒤처지면 안 되겠지.”
“예, 종조부님.”
하지만 당군악은 대답을 하고도 한동안 몸을 돌리지 않았다.
‘매화가 지기 전까지는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다.’
가만히 곱씹던 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기둥에 새긴 매화가 지는 날이 오겠는가?”
여하튼.
참 재미있는 녀석이다.
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