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2화. 내가 성질이 뻗쳐서, 내가! 아오! (2)
"그……."
힘겹게 입을 떼었던 도운찬은 이내 다시 입을 닫았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눈앞에는 무릎을 꿇은 이들이 일렬로 늘어앉아 있었다.
"거……."
다들 무릎을 꿇은 것도 기괴하지만, 가장 끝에 있는 마귀가 홀로 양팔을 들고 벌을 서고 있다는 게 더욱 이상했다.
'그런데 저게 벌이 되나?'
사람이 사람을 쳤는데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그만한 고수가 무릎 꿇고 손 좀 든다고 뭐가 그리 힘이 들겠는가.
다만 체면의 문제가…….
"똑바로 안 드느냐!"
슬그머니 팔을 내리려던 마귀가 현종의 호통에 팔을 다시 번쩍 들어 올렸다. 쀼루퉁한 얼굴이지만 말을 곧잘 듣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화산신룡이라고 했었지.'
저게……. 아니, 저 사람이.
화산신룡이라.
'그' 화산신룡이 눈앞에서 무릎을 꿇고 벌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는 도운찬의 심정은 말로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쯔으읏."
현종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호통을 쳤다.
"그래도 도사라는 것들이! 이제는 하다못해 남의 문파 물건을 가지고 협박을 해? 협박을?"
"……아니, 그게……."
"시끄럽다!"
현종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무릎을 꿇고 앉은 백천 일행이 일제히 고개를 푹 숙였다.
평소 어지간해선 화를 잘 내지 않는 현종이다 보니, 세 배는 더 겁이 난 것이다.
"백천!"
"예, 장문인!"
"사질 놈이 사고를 치면 말렸어야지! 네가 서안까지 따라간 이유가 무엇이더냐!"
백천은 한없이 허망한 얼굴로 입만 벙긋대며 말을 잇지 못했다.
장문인.
제가 장문인께서 명하시면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도 몸을 던질 자신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죽어서도 못 하는 걸 하라고 하시면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네 녀석들도 마찬가지다! 도사라는 놈이 이런 패악을 저지르는데 그걸 말리지는 못할망정 같이 낄낄대고 있어?"
"낄낄대지는 않았……."
"닥치라고!"
조걸이 변명을 하려 하자 윤종이 그의 옆구리에 팔꿈치를 박아 넣었다.
"끅."
깔끔하게 조걸을 처리한 윤종은 고개를 푹 숙였다. 유이설 역시 뚱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현종의 눈에 화산(火山) 같은 노기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너는……. 너는 장로……. 끅, 장로라는 놈이……."
"장문인!"
"진정하십시오, 장문인! 몸도 좋지 않으신데!"
"물! 어서 시원한 물을 가지고 오거라! 어서!"
현영을 보는 현종의 손이 덜덜 떨린다. 언제나 투덜대던 현영도 지금 이 순간만은 그 노기를 감당할 수 없는지 슬쩍 시선을 돌려 회피할 뿐이었다.
"에라, 이 말코 같은 놈들아!"
도사가 도사에게 말코라고 소리치는 진풍경이었다.
현종이 다시 달려들려 하자 현상이 뒤에서 그를 끌어안고 당겼다.
"자, 장문인! 외인이 있잖습니까! 외인이!"
"외인? 외인이 뭐! 지금 남의 문파 장문령부를 들고 사람을 협박한 마당에, 더 못 보여 줄 꼴이 어디에 있느냐! 더 창피할 것이 있느냐 이 말이다!"
"이, 일단 진정하시고!"
현상에게 잡히는 바람에 더는 달려들 수 없게 되자, 현종은 분이 풀리지 않는지 하나 남은 신발을 마저 벗어 현영에게 집어 던졌다.
현영이 고개를 싹 움츠려 날아드는 신발을 피했다.
"나가! 나가라! 이놈들아! 내가 저기 적당한 데 자리 하나 내줄 테니 산채 열고 살아라! 이 산적보다 더한 것들!"
청명이 눈치를 살피다가 현영에게 슬그머니 속삭였다.
"많이 화나신 것 같은데……."
"괜찮다. 언제는 안 그랬느냐. 곧 진정되실 게다."
현종이 하늘이 무너진 듯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화산이 어쩌다 이리되었단 말이냐."
"그래도 예전보다는 낫지요, 뭘."
"너는 입 다물어! 너는!"
현종이 눈을 부라리자 현영이 엣헴 하고 헛기침하더니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하아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현종은 그제야 도운찬을 돌아보았다.
"……."
폭풍같이 휩쓸고 간 상황에 넋이 나가 있던 도운찬이 움찔했다.
"……그래, 그……."
힘이라고는 하나도 남지 않은 듯, 현종은 흐느적거리며 말했다.
"내 참으로 면목이 없소이다. 제자들이라고 받아 놓고는 제대로 가르치지를 못해서……. 이 일은 모두 장문인인 나의 잘못이니 나를 욕해 주시구려."
"아, 아닙니다! 장문인!"
현종을 욕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설사 욕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해도,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들고 있는 놈이 '어디 한 마디라도 해 봐' 하는 눈으로 이를 갈아 대고 있는데 무슨 말을 하겠는가?
'여긴 대체 뭐 하는 곳이지?'
그래도 나름 갖가지 문파와 인연을 맺어 왔건만, 이런 곳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 황당하기 짝이 없는 곳이 지금 중원에서 가장 이름을 날리고 있는 화산이라니. 뭔가 배신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장문령부를……. 아니요. 아닙니다. 그것도 관리를 제대로 못 한 저희의 잘못이지요. 저는 그저 장문령부만 받아갈 수 있다면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화산에 도리를 따져 물어야겠다고 다짐했던 것은 이미 싹 날아간 지 오래.
아무리 봐도 이 문파는 도운찬이 감당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저 최대한 엮이지 않고 장문령부를 회수해 돌아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당연히 장문령부는 돌려줄 생각이네."
"그런데 그거 제가 찾은……."
"주둥이!"
이때다 싶어 슬그머니 끼어들려던 청명은 현종의 불호령에 찔끔하여 입을 삐쭉거렸다.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는 확인을 해야겠네."
"예? 어떤 확인을……."
"그대가 정녕 유령문의 소문주이고, 이 장문령부를 받아 갈 정당한 계승자가 맞는가?"
현종의 눈빛은 어느새 준엄하기 그지없는 장문인의 그것이었다.
"장문령부는 더없이 중요한 물건일세. 그대가 유령문에서 왔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네. 한 문파 내에서도 알력은 있는 법. 나는 이 장문령부로 인해 유령문에 혼란이 생겨나는 걸 원치 않네."
"아……."
도운찬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현종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신발을 벗어 던지던 모습만 봐서 결국엔 경박한 이인 줄 알았건만, 그의 생각 이상으로 현명한 이였다.
"예, 장문인. 유령문 내부에 다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모두 정리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 장문령부를 가지고 돌아가는 즉시 유령문의 문주 자리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
"그걸 증명할 수 있겠는가?"
"증명은……."
도운찬이 살짝 곤란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이들을 유령문으로 데리고 가지 않는 이상은 증명할 방법이 딱히 없었다.
"그건 조금 어렵습니다, 장문인."
"흐음."
현종이 살짝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하면 이렇게 하세. 내 장문령부를 제자 중 하나에게 내어 주겠네. 그럼 소문주께서는 그 제자를 데리고 유령문으로 가시게. 그럼 확인이 끝나는 대로 장문령부를 내어 주라 하겠네."
"아! 그러면 되겠군요."
도운찬이 만면에 화색을 띠었다.
장문령부라는 것은 문파의 위신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물건이다. 령부를 손에 넣은 이가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문파에 크나큰 해악이 닥치고도 남는다.
그러니 번거롭더라도 이를 확인을 한 뒤 넘겨주어 유령문에 큰 화가 닥치는 것을 방지하겠다는 것이리라. 충분히 사려 깊은 해결책이었다.
게다가 확인만 되면 바로 장문령부를 돌려주겠다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야말로 선도(仙道)를 따르는 이에 걸맞은 모습이었다.
다만…….
"유령문까지는 먼 길이 될 터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먼 길 가는 데 익숙한 아이들이 많으니 그 정도는 괜찮네. 다만……."
현종이 안색을 싹 바꾸며 청명과 다른 제자들을 돌아보았다.
"……얌전히 다녀올 수 있느냐가 문제겠지. 얌전히!"
그러자 청명이 고개를 돌렸다.
"조걸 사형. 장문인이 부르시는데?"
"너야, 너! 이 새끼야!"
"……둘 다 닥쳐라. 제발."
백천이 울 것 같은 얼굴로 이를 악물고 말했다.
과거 백자 배의 반듯한 대사형으로서 모든 화산 어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그는, 이제 사질이 저지른 짓을 막지 못한 대가로 무릎을 꿇고 잔소리를 듣는 처지가 되었다.
'다 죽었으면 좋겠다, 진짜.'
여파에 휩쓸린 백천은 절망에 빠져 있었지만, 일을 저지른 누구는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다.
"근데요!"
"내가 분명 그 주둥이를 좀……!"
"아뇨, 아뇨. 정말 할 말이 있어서 그러는 건데요!"
현종이 영 못 미덥다는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에이, 장문인. 제가 설마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오라 가라 했겠어요? 저 청명이에요! 청명!"
알지.
네가 청명인 걸 아니까 내가 이러지.
"장문인."
현영도 슬그머니 청명을 거들고 나섰다.
"유령문에도 나쁘지 않은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벌인 일은 아니니, 일단 잠깐이라도 들어 보심이……."
"끄응."
고민하던 현종이 또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해 보거라."
청명이 양팔을 얼른 내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도운찬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씨익 웃었다.
"……왜, 왜 그러시오, 소도장……?"
"저기요, 문주님. 아니, 소문주님!"
"예?"
"혹시 돈 좀 벌어 볼 생각 없어요?"
"……예?"
도운찬의 얼굴이 멍해졌다.
잠시 후.
"그러니까……."
도운찬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유령문의 신법이 천하일절이니까……."
"그렇죠! 되게 되게 빠르던데."
"그 신법을 활용하여……."
눈으로도 모자라, 이젠 도운찬의 입술까지도 살짝 경련을 일으켰다.
"……표사질을 하라?"
"에이. 표사는 아니죠. 특급배송이라니까."
"……."
도운찬은 눈앞의 청년 도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화산신룡이라더니.'
본래 용이란 사람이 감히 파악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정말 잘 붙인 별호였다. 이 새끼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혀 이해를 할 수 없으니까!
"이, 이보시오, 소도장."
도운찬이 더듬대며 입을 열었다.
"소도장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는 알겠으나……. 아니, 우리는 무인이지 표사가 아니오."
"무인이 뭔데요?"
"무인은……."
칼 쓰고 주먹질하는 사람이지.
하지만 그 말 그대로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말문이 막힌 그를 대신해 청명이 먼저 말했다.
"저는 무인이지만, 또 도사이기도 하죠."
"그, 그렇지요."
"그러니까 제 말은, 무인이 다른 직업을 가진다고 이상할 게 없다는 뜻이에요. 표사는 왜 못 해요. 무술 배워서 호위무사를 하거나, 표국에 취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렇긴 한데……."
도운찬이 슬쩍 고개를 돌려 계형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처음 들은 것처럼 당황한 얼굴로 청명을 보고 있었다.
"소도장의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는 알겠소. 하지만 그 일은 이미 많은 표국들이 하고 있는 일이 아니오?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겠소."
"에이, 다르죠."
"예?"
"조걸 사형!"
"응?"
옆에서 가만 듣고 있던 조걸이 고개를 빼꼼 들었다.
"사천에서 북경까지 표물을 보내려면 얼마나 걸려?"
"북경까지?"
"응."
조걸이 살짝 고민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계절이나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성도에서 북경까지는 최소 오천 리는 넘으니까 못해도 석 달은 걸리겠지."
"석 달?"
"이것도 최소로 잡은 거야. 실제로 표물을 옮기는 일은 중간 중간 다른 곳에도 들러야 하기 때문에 두 배는 더 걸리기도 하거든."
"그럼 반년까지도 걸릴 수 있다는 거네?"
"그렇지."
청명이 고개를 획 돌려 도운찬을 바라본다.
"아시겠어요?"
"뭐, 뭘 말이오?"
"물건 하나 받는 데 반년이 걸리면 성질 급한 사람은 어떻게 살겠어요?"
"……."
"유령문도들이 성도에서 북경까지 가는 데는 얼마나 걸리죠?"
"……하루에 천 리는 무리지만 오백 리쯤이야 어렵지 않게 갈 터이니, 열흘이면 됩니다."
청명이 손을 뻗어 도운찬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그걸 열흘 만에 전해 준다고 하면 돈을 더 낼 사람이 얼마쯤 될까요?"
"……."
도운찬의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무, 물건 좀 일찍 받겠다고 추가로 돈을 내는 사람이 있다고?'
아무리 반년에서 열흘로 줄어든다지만…….
"그런 사람들이 있을 리가……."
"있습니다."
조걸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미 여러 표국에서 이러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일정을 당기고 다른 곳에 들르지 않는 대가로 두 배에서 세 배쯤 되는 돈을 지불하고 표물을 맡깁니다."
조걸이 씨익 웃었다.
"시간이 돈보다 중한 사람이 생각보다 꽤 있지요."
고개를 끄덕인 청명이 도운찬의 귀에 속삭였다.
"저 사람이 생긴 건 동네 건달패처럼 보여도 사천 십대상가의 아들이거든요."
"다 들린다! 이 새끼야!"
조걸이 꽥꽥거리는 소리는 도운찬의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돈이 된다고?'
순간적으로 솔깃했다. 하지만 도운찬은 금세 제정신을 차렸다.
"무,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돈의 문제가 아닙니다. 일단은 저희의 본분……."
"모르시는 말씀."
"……."
끼어든 목소리에 도운찬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
현영이 세상 다시없을 온화한 표정으로 깊은 깨달음을 담아 입을 열었다.
"문파는 돈입니다."
"……."
"내가 해 봐서 알아."
"……."
도운찬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