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화. 내가 성질이 뻗쳐서, 내가! 아오! (1)
"……뭔 놈의 산이!"
유령문의 소문주 도운찬은 절벽으로 나 있는 가파른 소로를 오르며 혀를 내둘렀다.
경공으로는 천하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이 있는지라 떨어질 위험은 없었지만, 이토록 가파른 산을 오르는 건 그도 처음이었다.
"끄응."
저릿저릿한 다리를 억누르며 단번에 산을 오른 그의 시야에 안개에 휩싸인 커다란 전각들과 웅장한 산문이 들어왔다.
"……왜 이런 산꼭대기에?"
"그러게 말입니다."
납득이 안 가는 것투성이였지만, 굳이 도운찬이 이해해야 하는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그야 볼일만 보고 돌아가면 그만이니까.
"크흠!"
그는 단호한 걸음으로 산문 앞까지 다가갔다.
보통은 닫혀 있기 마련인 문파의 산문은 누구라도 들어오라는 듯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문 앞을 지키고 있어야 할 사람도 자리를 비운 모양으로 보이질 않았다.
"이거 그냥 들어가도 되는 건가?"
"그렇지 않을까요?"
"흐음."
도운찬이 영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계시오? 화산에 용무가 있어……."
콰아앙!
"……."
그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무언가 바로 옆으로 휙 날아갔다. 그리고 산문 바로 옆 담벼락에 처박혔다.
쿠르르릉.
담벼락이 크게 흔들리며 먼지를 피워 냈다.
'뭐지?'
도운찬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담벼락을 무너뜨린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잠깐의 정적 후, 무너진 담벼락의 잔해 아래에서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으악, 깜짝이야!"
도운찬이 화들짝 어깨를 들썩이곤 눈을 끔뻑였다.
"사…람?"
"……."
"끄으으으으."
잔해를 헤치며 기어 나온 무언가……. 아니, 사람은 핏발이 선 눈으로 앞을 노려보았다.
뭐지?
……잘못 왔나?
아닌데? 분명 현판에 화산파라고 쓰여 있었는데?
"으아아아아아!"
잔해를 떨쳐내며 뛰쳐나온 이는 이내 산발이 된 머리를 휘날리며 앞으로 짓쳐 달려들었다.
"죽어라아아아앗!"
응?
죽어? 적이라도 쳐들어왔…….
콰아앙!
하지만 그 기세가 무색하게, 그는 달려들었던 속도보다 두 배는 빠른 속도로 다시 튕겨 나갔다.
콰아아앙!
'죽었네.'
에이, 저렇게 맞으면 죽어야지.
"미쳐 가지고! 가슴을 열고 달려들어?"
그때 세상에서 가장 심술궂은 목소리가 도운찬의 귀를 뚫고 들어왔다.
"이것들이 지금 장난하자는 것도 아니고!"
먼지가 풀풀 피어나는 연무장 한가운데에서 웬 마귀 놈이 포효하고 있었다.
"칼 좀 휘둘러 봤다 이거지, 어? 손맛 좀 보셨어? 어디 자세가 커져, 콱 뒈지려고! 그러다가 칼 맞으면 안 아프냐? 어? 안 아파? 얼마나 아픈지 내가 한번 알려 줘?"
"……."
도운찬은 살짝 긴장한 얼굴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사파 놈이 쳐들어왔나?
만인방의 마귀 놈과 싸우는 중인가?
그런데 그때 마귀에게로 용감하게 달려드는 한 남자가 보였다.
티 한 점 없는 새하얀 무복!
이마에 두른 새하얀 영웅건!
그 영웅건 아래로 보이는 단호한 얼굴은 도운찬이 이제껏 본 적 없을 만큼 청수했고, 또 준수했다.
누가 봐도 저 사람이 화산을 대표하는 무인이 아니겠는가?
"이노오오오오옴!!"
화산을 대표하는 무인은 마귀 놈에게 매서운 기세로 검을 들고 돌진했…….
'근데 왜 목검이야?'
응?
"죽어라……!"
쾅!
하지만 이내 달려들던 무인의 이마에 시커먼 검집이 틀어박혔다.
"……."
달려들던 속도가 무색하게 그 자리에서 석상처럼 굳어 버린 그는 저항할 힘을 아예 잃은 듯 보였다.
"죽어?"
마귀 놈이 눈을 희번덕댄다.
"오냐오냐 하니까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오냐! 어디 죽어 보자!"
검집이 신명나게 휘둘러졌다.
"허리! 허리! 허리! 허리! 대가리이이이!"
콰아아아아앙!
오른쪽 옆구리에 사 연격을 얻어맞고, 마지막으로 대가……. 아니, 머리까지 야무지게 까인 백천이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엎드린 채 움찔움찔 경련을 일으키는 모습이 눈물을 자아냈다.
'정이 사에 지다니.'
이러면 안 되는데…….
"사숙!"
"사수우우우욱! 으아아아아! 이 악적 놈아!"
화산의 무인들이 울분에 찬 고함을 내지르며 일제히 마귀 놈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어쭈?"
하지만 마귀 놈의 검은 달려드는 이들을 하나하나 차지게 깠다.
"이것들이!"
콰앙! 콰앙!
"간을 아주 배 밖에다 내놓고는!"
콰앙! 콰앙! 콰아아앙!
"뭐 대단한 일 하셨어?"
사람들이 폭죽처럼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새하얀 무복을 갖춰 입은 이들이 허공에 나부끼며 솟구치는 모습은 뭐랄까, 음……. 마치.
'꽃이 피는 것 같네.'
이상하게 예쁘네?
아니, 이게 예쁘면 안 되는데.
쿵! 쿵! 쿵! 쿵!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던 이들이 바닥으로 하나둘 추락했다. 땅바닥에 엎어진 이들은 하나같이 움찔움찔 잘게 경련을 일으켰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도운찬도 귀가 있는 사람이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만인방의 무력대가 화산을 침공했다는 소식은 들었다. 그리고 그 만인방의 무력대를 화산이 훌륭하게 격퇴해 냈다는 소리도 귀에 못이 박이게 들었다.
천하의 명문이라 불리는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가 아니고서야 어디 이런 업적을 꿈꿀 수나 있겠는가?
모두가 화산에 대해 이야기하기 바빴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화산의 기세가 심상치 않느니, 구파일방으로의 복귀가 얼마 남지 않았느니 하며 말이다.
그런데…….
'왜 한 사람한테 저렇게 얻어터지고 있지?'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도운찬의 상식을 벗어나 있었다.
"죽어라."
그때 그의 눈에 머리를 묶어 올린 여인이 나지막한 기합과 함께 마귀에게로 달려드는 모습이 들어왔다.
에이. 설마.
아니겠…….
쿠우우우우웅!
"……."
어김없이 이마에 검집이 틀어박힌 여인이 움찔움찔하더니 풀썩 쓰러졌다.
"이것들이 다 돌아 가지고!"
마귀.
아니, 마귀가 아니라 청명이 눈을 희번덕대며 소리친다.
"어디 검에 쓸데없는 힘을 실어! 동작 커지면 빈틈 생긴다고 내가 그만큼 말을 했는데! 조동아리로만 기본 타령이지! 확 그냥!"
짐승처럼 포효하는 청명을 보며 도운찬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래서, 어? 경험 없는 놈들은 첫 전투에 죽는 게 아니라 두 번째 전투에 죽는 거야! 내가 뭘 좀 안다고 생각하는 놈들이 제일 먼저 뒈진다고! 알겠냐, 이 병아리들아!"
저기요.
당신이 제일 어려 보이시는데…….
"끄으으으응."
"아으으으. 죽겠다."
"……제발. 제발 귀신 좀. 제발……."
화산의 제자들이 차라리 만인방을 상대하는 게 백배는 더 낫겠다고 생각한 그때.
"……이건 또 뭐야?"
마귀 놈의 시선이 산문 앞에 선 도운찬을 향해 획 틀어졌다.
움찔.
멍하니 있다 눈이 마주친 도운찬은 저도 모르게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뭐야?"
"예?"
"누군데 남의 문파 정문을 허락도 안 받고 넘어와? 습격이야?"
"스, 습격이요?"
도운찬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전개가 뭐 이렇게 급박…….
"습격도 아닌데 뭔 배짱으로 남의 문파에 맘대로 막 들어오지? 너 이리 와 봐. 빨리."
도운찬이 차마 걸음을 옮기지 못하자 마귀 놈이 어깨에 걸친 검집을 까딱거리며 직접 다가오기 시작했다.
"자, 잠시만요. 저는 그게 아니라……!"
장문령부를 강탈당한 일을 따져 묻겠다는 마음은 이미 저 절벽 아래로 던져 버린 지 오래였다.
도리? 이치?
그건 말이 통하는 상대한테나 의미가 있는 거다.
그도 살 만큼 살았고, 구를 만큼 굴렀다.
아니, 사실 굳이 연륜과 경험이 없어도 눈앞의 이 새끼에게는 말이라는 게 통하지 않는다는 건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저, 저는……."
"아, 알았으니 이리 와 보라고."
청명이 흡사 뒷골목 건달패처럼 건들건들 그의 앞에 다가와 섰다. 도운찬은 뒤도 안 돌아보고 토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런데 그때.
"도, 도장님!"
"응?"
다급히 산문 안으로 박차고 들어온 계형이 도운찬과 청명 사이를 막아섰다.
"어? 너?"
"모, 모셔 왔습니다! 저희 소문주님을 모셔 오라고 하셨잖습니까! 이분이 저희 유령문의 소문주님이십니다."
청명의 시선이 계형과 도운찬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 소문주?"
"예!"
"이분이?"
"그렇습니다!"
"아아."
청명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도운찬을 향해 성큼 다가섰다.
"으!"
뭔가 날아올 것 같은 공포에 도운찬은 저도 모르게 가슴 앞으로 손을 올리며 질끈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 손은 청명의 손에 획 낚아채였다.
"아이고오! 세상에, 먼 길 오셨네요!"
"……."
도운찬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자신의 손을 잡고 연신 흔들어 대며 환하게 웃는 청명이 보였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하하, 유령문의 소문주시라고요!"
"……."
슬쩍 계형을 바라보았지만, 계형은 자기는 그런 적이 없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내저을 뿐이었다.
"자자. 이러지 마시고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아, 안으로요?"
"예! 객청으로 가셔야죠."
"……개, 객청이요?"
생각 같아서는 장문령부고 나발이고 당장 몸을 돌려 튀고 싶은 심정이었다.
'뭔 도문이 이래?'
사파도 사람을 저렇게 뒤도 안 보고 두드려 패지는 않겠다.
도운찬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계형을 바라보니 그는 눈빛으로 뜻을 전했다.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
아니…….
나는 임무 실패한 놈이 겸연쩍어서 대충 둘러댔다고 생각했지. 정말 그런 놈이 세상에 존재할 줄 알았냐고.
"자자, 여기로.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청명이 도운찬을 질질 끌다시피 안내하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도운찬은 도살장에 끌려들어가는 소처럼 슬픈 눈망울로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게, 내가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계형이 안타까운 눈으로 그런 도운찬을 바라보았다. 그때 청명이 뒤를 획 돌아보며 말했다.
"누가 가서 장문……. 아니, 왜 일어나 있는 놈이 없어! 다들 빠져 가지고!"
네가 다 팼잖아.
네가!
바닥에 널브러진 채 숨만 겨우 쉬고 있던 윤종이 신음을 흘리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사숙."
"……."
백천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듣고는 있을 거라 생각한 윤종이 물었다.
"살아 계십니까, 사숙?"
"……죽었다."
"……예."
연무장 바닥이 화산 제자들의 눈물로 젖어들고 있었다.
"……계형."
"……예, 소문주님."
"이 미친놈아!"
도운찬이 계형에게 와락 달려들어 목을 졸랐다.
"대체 뭔 생각으로 나를 여기로 데리고 온 것이냐! 대체!"
"켁! 케엑! 이, 이거 좀…… 컥! 놓고!"
"대체 뭔 생각으로!"
도운찬의 손을 겨우 뜯어낸 계형이 콜록대며 소리쳤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그걸 어떻게 믿냐, 그걸!"
도운찬은 괴로운 얼굴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딱히 큰 생각 없이 온 것이건만, 이제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적당히 얼굴을 내비치며 문파의 도리를 따져 물으면 도문인 화산은 별수 없이 장문령부를 내어 줄 거라 믿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눈으로 본 화산은 도리고 나발이고 일절 통하는 곳이 아닌 것 같았다.
도리가 어쩌고 했다가 입에 검이 틀어박히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대체 우릴 왜 부른 거지?"
하지만 그 의문에 대한 답을 고민할 여유 따윈 없었다.
객청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선 것이다.
가장 앞에 있는, 막 장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갈 나이쯤의 도인을 본 도운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인은 그런 그를 보며 조금 난처한 듯 웃으며 입을 뗐다.
"손님을 기다리게 하는 무례를 저질렀소이다. 본도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지요."
"아, 아닙니다. 그런데……."
도인이 빙그레 웃는다.
"본도는 화산의 장문인인 현종이요."
"자, 장문인을 뵙습니다!"
도운찬은 고개를 격하게 숙여 인사했다. 속으로는 적잖이 당황한 상태였다.
'다짜고짜 장문인이 나온다고?'
물론 그 역시 한 문파의 소문주다.
하지만 지금 화산이 어떤 문파던가? 그 만인방을 격퇴한 후 중원에서 가장 유명세를 타고 있는 문파이지 않은가.
그런 곳의 장문인이 그를 직접 맞이하다니.
감격해 마땅한 일이건만, 도운찬은 이상하게도 점점 더 불안했다.
"일단 앉으시지요."
"아, 예! 예! 장문인!"
얼이 빠진 도운찬이 자리에 앉자, 현종이 그의 건너편에 앉았다. 그 좌우로 화산의 사람들이 길게 늘어앉았다.
잠깐 침묵하던 현종이 입을 뗐다.
"사정은 조금 전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인자한 미소를 걸었던 그의 뺨이 미묘하게 푸들거리고 있었다.
"……장문령부를 찾으러 오셨다고?"
"그, 그렇습니다."
"장문령부를?"
현종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눈에서 불똥이 튀고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노기에, 도운찬은 영문도 모르고 멀뚱히 앉아 있었다. 그때 현종의 왼편에 앉아 있던 한 노인과 청명이 조금씩 몸을 뒤로 슬슬 빼는 게 보였다.
점점 커지는 듯하던 노기가 폭발한 건 그때였다.
"에라이! 이 미친놈들아!"
현종이 신발을 벗어 두 사람을 향해 냅다 내던졌다.
"이제는 하다 하다 남의 문파 장문령부까지 뺏어서 협박질을 해 대? 니들이 그러고도 도사냐, 이놈들아! 왜? 이참에 산채 하나 차리지 그러느냐! 그리고! 그걸 이제 와 이야기를 해! 이리 와! 이리 안 와!"
쩌렁쩌렁하게 고함을 지르는 걸로도 분이 안 풀렸는지, 현종이 벌떡 일어나 청명과 현영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얼른 그를 붙잡고 늘어졌다.
"자, 장문인! 참으셔야 합니다!"
"외인이 있습니다! 장문인! 부디 체통을……!"
"내가 성질이 뻗쳐서, 내가! 아오!"
고함을 내지르는 현종과 구석으로 점점 밀려나는 청명과 현영.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본 도운찬은 해탈한 듯 빙그레 웃었다.
'나는 이제 모르겠다.'
여기가 어딘지.
허허.
허허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