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3화. 화산은 네가 지켜야 할 곳이 아니다. (3)
어떤 군세(軍勢)든 우두머리를 잃으면 사기가 급락하는 법.
탈명단창에 이어, 독혈수와 야도마저 쓰러지자, 만인방도들은 더 이상 저항할 힘을 잃어버렸다.
"아아아악!"
"아악!"
앞만 보고 싸울 때와 달아날 곳을 의식하며 싸울 때가 같을 수는 없다.
야도가 그랬던 것처럼, 전투에 대한 집중력을 잃은 이들은 화산 문도들의 검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갔다.
"모조리 죽여 버려!"
"한 놈도 살아 돌아가지 못하게 해라!"
화산의 제자들이 더욱더 기세를 타며 적들을 몰아붙였다. 그리고 원형으로 등을 맞댄 만인방도들을 둘러쌌다.
검이 위협적으로 날아들 때마다 만인방도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만!"
그 순간 커다란 고함 소리가 터졌다.
화산 제자들의 얼굴이 일제히 한곳으로 돌아갔다.
화산의 장문인 현종이 꼬장꼬장한 자세로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더는 피를 흘릴 필요가 없다. 적들은 이제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그 말에 현영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장문인! 저들은 화산을 공격해 왔고 제자들을 다치게 했습니다! 한데 어찌 그런 자비를……!"
"그럼 모조리 죽여야 직성이 풀리겠느냐?"
"그건……."
현영이 잠깐 무어라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현종은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나 역시 적을 상대함에 있어서 자비를 논할 생각은 없다. 나의 도가 아직은 부족함인지, 검 끝에 자비를 실으라는 말은 도저히 할 수가 없구나. 하나."
그의 두 눈엔 심유한 빛이 가득했다.
"의지를 잃은 이를 베는 것 역시 도를 논하는 이가 할 짓은 아니다. 화가 난다고 상대를 모조리 베어 죽인다면 우리가 저들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느냐?"
제자들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얼핏 안쓰럽고 애틋한 기색이 스쳤다.
사실 저들을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이야 현종이 더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일이 제자들의 마음속에 어둠을 남기기를 원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처음이 어렵다.
이런저런 이유로 살인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게 된다면 언젠가는 굳이 살인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도 주저 없이 검을 휘두르고 말 것이다.
화산을 위해서도, 저 아이들을 위해서도 그런 일은 일어나선 안 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제자들 역시 순순히 그의 말에 따르지 않았다.
상처를 입고 쓰러진 동료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바로 눈앞에서 그 모습을 똑똑히 보며 싸운 이들은 현종의 말에도 만인방도들에 대한 적대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감추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다시 싸움이 벌어질 듯 검이 흉흉한 검기를 뿜어냈다.
그 모습에 현종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의 목소리가 천천히 퍼져 나갔다.
"나는 너희가 더 다칠까 봐 겁이 난다."
온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그제야 하나둘 손에서 힘을 풀기 시작했다.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다. 본인의 말을 따르라 소리치지도 않는다. 그저 담담히 본심을 이야기하는 현종의 목소리는 그를 누구보다 잘 아는 화산의 제자들에게 깊이 와 닿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내 말을 따라 주거라."
그들을 지키느라 상처투성이가 된 장문인이 저리 말하는데 누가 감히 그 말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복잡한 시선이 현종에게로 향했다. 미묘한 불만과 미묘한 격정을 담은 눈빛이. 하지만 그 복잡했던 눈빛들은 이내 한 가지 감정으로 정리되었다.
신뢰.
화산 장문인인 현종에 대한 신뢰. 그리고 그의 결정에 대한 신뢰였다.
"무기를 버려라."
백천이 만인방도들을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투항하는 자는 베지 않겠다. 너희는 도를 잊었지만, 화산은 도를 잊지 않는다."
"항복하는 이는 살려 줄 것이오."
그리고 윤종이 그런 그를 도왔다.
하지만 두 사람과는 달리, 조걸은 여전히 흉흉한 눈으로 만인방도들을 노려보았다. 제발 반항해 주기를 바란다는 듯이 말이다.
그 세 사람의 반응을 확인한 만인방도들의 눈에서 희미하게 남아 있던 의지마저 사라졌다.
챙! 채앵!
병장기들이 하나둘 땅에 떨어졌다.
마침내 무기를 버린 만인방도들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모두 투항한 것을 확인한 현종은 크게 외쳤다.
"저들의 단전을 폐하라. 그리고 모조리 포박해 뇌옥에 가두어라!"
명령을 내린 그는 백천을 바라보았다.
"백천!"
"예, 장문인!"
"저들을 가둔 뒤, 덜 지친 아이들을 선별하여 뇌옥을 지키게 하거라!"
"예!"
백천이 깊게 고개를 숙인 뒤 다른 제자들에게 눈짓했다.
화산의 제자들이 만인방도들에게 다가가 목에 검을 겨눴다.
단전을 폐한다는 말에 저항하려는 이들도 있었지만, 이미 상황은 기울었다. 여기서 더 반항해 봐야 목숨을 버리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이해한 그들은 결국 체념하고 눈을 감아 버렸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알리듯 먹구름이 걷히며 천천히 비가 그치기 시작했다.
그제야 현종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다들……."
그때였다.
"뭐야. 벌써 다 잡았어?"
익숙한 목소리에 백천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움찔한 그의 몸이 굳어졌다.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청명아!"
화산의 한쪽 담을 훌쩍 뛰어넘어 유유히 걸어오는 청명을 보며 그의 눈이 잔뜩 일그러졌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처, 청명아!"
"저놈……! 저거!"
비에 젖어 많이 씻겨 내려갔다지만, 피로 물들었던 의복이 본래의 색을 회복할 순 없으니까.
붉은 얼룩과 잘려 나간 의복 자락 등이 그가 얼마나 거친 전투를 치렀는지 백 마디 말보다 확실히 알려 주었다.
"이런 미친!"
백천은 저도 모르게 청명에게 달려갔다.
"이……."
바로 앞까지 달려간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찢겨 나간 의복 사이사이로 보이는 커다란 상처에, 그의 얼굴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처참히 일그러졌다.
"대체 뭘 한 거냐!"
백천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하지만 청명은 한심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보면 몰라? 죽어라고 싸우고 왔잖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그 태연한 반응이 백천을 더 화나게 만들었다.
"몸뚱이를 걸레짝으로 만들어 놓고도 주둥아리는 살아 있구나! 이 빌어먹을 놈아!"
"그럼 주둥아리도 찢겨 와야 속이 풀리겠어?"
"이……."
백천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상처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얼마나 지독한 전투를 겪었는지,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
그런데 이놈은 왜 이런 순간에도 이렇게 태연히…….
"너……."
숱한 말이 떠올랐지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백천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리자 청명은 웃었다.
"신나게 얻어터지고 있을 줄 알았더니……. 알아서 잘 처리했네. 이번에는 칭찬해 주지."
"지금 그딴 말이 나오느냐!"
그런 두 사람의 주위로 제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청명아!"
"빌어먹을! 상처가!"
그들 역시 청명의 몸에 난 상처를 보며 말을 잃었다.
청명이 흑조단을 이끌고 산문을 빠져나갔음을 모르는 이가 있었겠는가? 하지만 모두가 은연중에 청명이라면 절대 그들에게 상처 입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 그들은 확실하게 이해했다.
청명 역시 그들처럼 상처를 입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흉흉하게 베인 상처가 화산의 제자들의 눈에 아프게 파고들었다.
"소소! 소소 어디 있느냐!"
사색이 된 백천과 주변 제자들을 보며 청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뭐 이리 호들갑들이야. 아, 좀 비켜 봐!"
"이놈아! 치료를……."
"안 죽는다고!"
버럭 소리를 지른 청명이 몰려드는 화산의 제자들을 밀쳐 냈다. 평소라면 여럿이 달라붙어 강제로 잡아끌든 했을 테지만, 지금은 감히 청명의 몸에 손을 댈 수 없어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사숙조는?"
"……의약당으로 모셨다. 비가 많이 왔으니까."
"잘했어."
백천의 대답에 청명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청명의 시선은 중앙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만인방도들에게로 향했다.
반항할 의지와 힘을 잃은 그들을 화산의 제자들이 단단히 포박하고 있었다.
"쟤들은 왜 저래 놨어? 그냥 다 죽여 버리지."
"장문인께서……."
"끄응."
청명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진다.
뭔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반항하지 않는 놈들을 죽일 필요는 없겠지."
지금은 그가 살던 시대와는 다르니까. 아니, 이런 상황이라면 현종이 아니라 청문이라 해도 똑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그들은 도인.
본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애초에 이 일에 책임을 져야 할 대가리들은 다들 대가를 치렀으니까.
"정말 괜찮으냐? 상처를……."
"뭐래? 내가 이 정도로 눈이나 깜빡할 것 같아?"
누군가의 물음에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너무도 활기차고 상쾌한 반응에 그를 둘러싼 화산의 제자들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하지만 뒤쪽에서 지켜보고 있던 유이설의 안색은 오히려 조금 어두워졌다.
'무리하는 중.'
청명의 입은 부상은 그리 가벼운 게 아니다. 그리고 청명은 저렇게 부상을 입은 몸으로 험준한 절벽을 한걸음에 뛰어 올라왔다.
그 유이설이 겁을 집어먹을 만큼 서늘한 귀기를 뿜어내며 말이다.
그랬던 청명이 느슨하게 풀린 것은 화산의 안전을 확인한 이후였다.
뭔가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청명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유이설은 그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녀석아."
어느새 제자들을 밀어 내며 다가온 현종이 탄식하듯 말했다.
"이놈아. 상처가……."
"왜 그렇게 많이 다치셨어요."
퉁명스럽다.
하지만 숨길 수 없는 걱정이 묻어났다.
"네가 지금 내 상처를 걱정할 때냐?"
현종은 결국 평정을 잃고 벌컥 소리를 질렀다.
"어찌하여 이리 무리하는 것이냐! 그러다가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대체 어쩌려고!"
"에이. 별일 없었는데요, 뭐."
"이놈아……. 이놈아."
현종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장문인."
그때 곁으로 다가온 현영이 그런 그를 잡아끌었다.
"의약당으로 가시지요. 장문인의 부상도 가볍지 않습니다."
"나는 괜찮다. 그보단 이 녀석을……."
"장문인께서 안 움직이시면 아무도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어서 가시지요."
"……."
그 와중에도 청명의 부상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현종이 한숨을 쉬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다."
"윤종아. 장문인을 모시거라."
"예, 장로님!"
윤종이 현종을 부축해 곧장 의약당으로 향했다.
장문인이 움직이자 몰려들었던 제자들도 조금씩 정리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잠깐 둘러본 현영이 입을 뗐다.
"청명아."
"네."
"당부하고픈 말이 있느냐?"
마찬가지로 주위를 둘러보던 청명이 말했다.
"뇌옥에 가둔다고 안심하면 안 돼요. 무공을 잃었다 해도 개수작을 부릴 수 있으니 잘 감시해야 해요."
"그래."
"그리고 혹시 놓친 잔당이 있을지 모르니 화산을 한번 둘러봐야 해요. 다른 놈들이 또다시 몰려올 수도 있고."
"알겠다. 내 필히 살피마. 다른 부분은?"
"일단은 홍대광 아저씨가 개방도들을 데리러 갔으니 곧 도착할 거예요. 그 사람들 오면 맞아 주세요. 부상자들 치료에 더 필요한 약재는 없는지 확인해야 하구요."
"그럼 된 것이더냐?"
"으음……."
청명이 주위를 둘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그 정도."
현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명의 곁에 선 백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백천아."
"예."
"이놈을 당장 의약당으로 데려가거라!"
"예!"
백천과 조걸이 청명의 좌우로 성큼 다가와 양팔에 단단히 팔짱을 꼈다.
청명이 움찔하며 좌우를 번갈아 보았다.
"왜 이래?"
반항하려 했지만 그의 팔을 결박한 두 사람은 바윗덩어리처럼 단단히 달라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현영이 준엄한 목소리로 일렀다.
"네가 네 입으로 다 됐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제 네가 할 일은 없으니 당장 의약당으로 가거라!"
"그래도……."
"어서!"
현영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청명이 찔끔했다.
"아니,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세……."
청명이 삐쭉거리며 구시렁대기가 무섭게 현영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무시무시한 기세에 찔끔한 청명은 목을 움츠리며 냉큼 외쳤다.
"가, 갈게요! 가면 되지!"
"이놈을 당장 끌고 가 의약당에 처넣어라!"
"예!"
백천과 조걸이 청명을 죄인처럼 의약당으로 질질 끌고 갔다. 그 뒷모습을 가만 지켜보던 현영은 한숨을 푹 쉬었다.
'망할 놈 같으니.'
어쩌자고 그리 몸을 내던졌단 말인가.
물론 안다. 왜 모르겠는가?
저놈이 무리하지 않았다면 반드시 희생자가 나왔을 것이다. 그걸 알기에 나무랄 수 없고, 그걸 알기에 화가 났다.
그때 정리를 대충 끝낸 백상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장로님. 지시하신 대로 이행하겠습니다."
"그래."
진두지휘하는 백상을 잠깐 보던 현영은 멀리로 시선을 던졌다.
저 멀리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참으로 긴 밤이었구나.'
멸문으로부터 돌아온 화산파의 역사에 길이 남을 전투가 끝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