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화. 곱게 죽지는 못할 거다. (2)
'좋지 않아.'
당소소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스쳤다.
"익!"
이내 그녀의 손에서 비도(飛刀)가 발출되었다.
쇄애애애액!
빛살처럼 날아간 비도는 이내 화산의 제자를 공격하던 만인방의 무사에게 박혔다.
한창 기세를 올리던 만인방 무사들이 방심한 틈을 타, 비도는 사각에서 시시각각 날아들었다.
"끄윽!"
"하앗!"
자세가 흐트러진 채로 검을 휘둘러 상대를 가까스로 베어 낸 백자 배 백현(白賢)이 무의식중에 당소소를 돌아보았다.
"고맙……."
"고개 돌리지 마세요!"
"그, 그래!"
"비도 회수해서 뒤로 던져 주세요! 빨리!"
"알겠다!"
당소소가 이를 악물었다.
'안 좋아.'
전황은 한눈에 보아도 좋지 않았다.
그나마 장문인과 장로님, 그리고 백매관주가 앞을 틀어막아 주고 있기에 아직 버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중앙에 격전이 벌어질 공간을 만들어 주고 있던 만인방의 무사들이 천천히 포위망을 좁혀 들어오고 있었다.
가각!
그녀의 손에 들린 비도들이 마찰하며 쇳소리를 빚었다.
'다시는 들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당가의 여식이라는 신분을 버리고 화산의 제자가 되기로 했을 때, 그녀는 평생 지녀 왔던 비도를 손에서 놓고 검을 들었다.
이제 화산의 제자이니 화산의 무학을 써야 한다. 그러니 다시는 비도를 쓰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총명했고, 때문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검수로서의 자신보다, 암기와 의술을 쓸 수 있는 당가인으로서의 자신이 더욱 가치 있다는 것을.
검수로서의 그녀를 대체할 이는 차고 넘치니까.
그녀가 뒤쪽에서 전황을 파악하고 틈틈이 비도를 날려 사형들을 돕지 않았더라면, 이미 사상자가 한참 나왔을 것이었다.
'안 좋아.'
애초에 전력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믿을 것이라고는 하나의 무력대라 믿을 수 없을 만큼 제멋대로 싸워 대는 저들과, 서로 어깨를 맞댄 채 함께 싸우고 있는 화산. 그 둘의 조직력 차이뿐이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
게다가.
시선을 슬쩍 옮긴 당소소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피로 물든 장문인의 의복이 그녀의 눈에 아프게 틀어박혔다.
'장문인!'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팠다.
전신이 이미 피로 물들었음에도 장문인은 굳건히 서서 야도를 상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죽을힘을 다해 버티는 것일 뿐, 승산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운검도 현상도 마찬가지.
'이대로는 안 돼.'
당소소는 입술을 꽉 깨문 채 바삐 머리를 굴렸다.
그런데 그 순간.
"아악!"
그녀의 귀에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파고들었다.
순간 고개를 획 돌린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입에서 찢어질 듯한 비명이 터졌다.
부상을 입은 화산의 제자와, 그의 목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날아드는 도.
"안 돼!"
당소소의 손에서 세 개의 비도가 가공할 속도로 발출되었다.
챙! 챙!
날아든 비도 두 개의 비도는 상대의 도에 튕겨 나갔지만 마지막 하나의 비도는 정확하게 상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당소소의 눈이 일순 크게 흔들렸다.
'주, 죽…….'
털썩.
비도를 맞은 이는 잠깐 부르르 경련하다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살인.
첫 살인이었다.
"내, 내가……."
전신에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사람처럼 떨던 그녀는, 곧 한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뺨을 후려쳤다.
쫘아아아악!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몇 번이나 연거푸.
곧 뺨이 새빨갛게 물들며 부어올랐다. 그리고 찢어진 입술에선 핏물이 흘러내렸다.
"소소야!"
"돌아보지 마요!"
"……."
그녀는 흘러내린 피를 소매로 모질게 문질러 닦으며 독기 어린 눈을 치떴다.
'병신같이 굴지 마, 당소소.'
놀라고 벌벌 떠는 건 나중에 해도 충분하다.
이 상황에서 본인이 흔들려 누구 하나라도 더 죽어 나간다면 당소소는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었다.
"상처 입은 사람은 뒤로! 어서!"
"알았다!"
적의 검의 맞아 쓰러진 이들이 순식간에 뒤로 날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를 아직 부상 입지 않은 이들이 메꾸었다.
당소소는 이를 악물며 부상자의 갈라진 상처에 지혈제를 뿌렸다.
'울지 마.'
자꾸 눈물이 비어져 나왔다.
함께 웃고 수련하고 뒤에서 함께 청명의 욕을 해 대던 사형제들이 적의 검 앞에 힘없이 쓰러졌다.
다행히 아직 죽은 이는 없지만, 한눈에 봐도 심각한 상처를 입은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절대로 안 죽어! 절대로! 그렇게 못 놔둬!'
섬전 같은 손놀림으로 상처를 봉합한 그녀는 피에 젖은 손으로 품 안에서 혼원단을 꺼냈다. 이 싸움이 시작되기 전 장문인이 그녀에게 맡긴 것이었다.
- 부탁한다, 소소야. 부디…….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 사람도 죽지 않게 해 달라는 것.
그 어리석기까지 한, 맹목적인 부탁을 당소소는 받아들였다.
"안 죽어! 절대로! 죽으면 내가 죽여 버릴 거야!"
발작적으로 소리를 지른 당소소의 시야에 또다시 쓰러지는 화산의 제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
"진형을 지켜! 적의 공격에 현혹되지 마라! 등을 맞붙이고 사형제를 믿어라! 그러면 눈앞의 적만 상대하면 된다!"
어디선가 누군가가 고함을 내질렀다.
그 말에 다시금 진형을 가다듬은 화산의 제자들이 서로간의 간격을 좁히며 공세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부상자! 빨리!"
"알았다!"
의식을 잃은 이의 입 안에 잘게 자른 혼원단 조각을 밀어 넣으며 당소소는 저도 모르게 서쪽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사형.'
청명 사형.
제발 빨리 와요. 제발.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지?"
"……."
탈명단창이 운검을 향해 이죽거렸다.
그를 막아선 이 냉막한 검수는 그야말로 검수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더없이 냉정하고 더없이 차가웠다. 그리고 펼쳐 내는 검마저 더없이 정교하다.
하지만.
'어설퍼.'
등 뒤에서 비명이 들릴 때마다 어찌할 수 없는 움찔거림이 명백하게 느껴졌다.
검수로서는 꽤 수련을 해 왔는지 모르겠지만, 이놈은 이런 전투에 익숙하지 않다.
아닌 척하지만, 등 뒤가 신경 쓰여서 어쩔 줄을 몰라 하지 않는가?
"흐흐. 참으로 자상도 하시군."
탈명단창이 그의 애병을 슬쩍 들어 올리며 비아냥거렸다.
"다 망한 화산에 이 정도의 검수가 있을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래 봐야 집 지키는 개에 불과하다는 의미지."
"……."
운검은 굳이 탈명단창의 도발에 응해 주지 않겠다는 듯 자세를 낮추며 무게중심을 아래로 옮겼다.
하지만 탈명단창은 이런 이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빨리 나를 쓰러뜨리고 도우러 가고 싶은 모양이지?"
"……."
"흐흐. 뭐 좋아. 그럼 덤벼 보라고."
"말하지 않아도!"
운검이 한 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벼락같은 속도로 달려들었다.
"그럴 생각이다!"
그의 검이 환상처럼 허공을 가르고 수놓다 이내 유성처럼 떨어지며 탈명단창의 하체를 노렸다.
'막힌다!'
이놈 정도의 실력이라면 이 일검은 반드시 막힐 것이다. 하지만 저놈이 단창을 교차하는 순간에 그걸 흘려 내고…….
그 순간이었다.
자신에게 날아드는 검을 바라본 탈명단창이 기이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단창을 앞으로 찔러 넣었다.
'뭐?'
운검의 눈이 부릅떠졌다.
물론 그저 마주 찌른 거라면 피할 운검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저 단창은 그를 노리고 날아들지 않았다.
그의 옆, 정확히는…….
'안 돼!'
운검이 황급히 검로를 바꾸었다. 급격하게 내력을 뒤트느라 단전이 뒤흔들리고 내력이 역류했지만, 그의 검은 일말의 주저 없이 그를 지나 제자들을 노리는 단창의 앞을 막았다.
카앙!
검이 단창을 막아 낸 그 순간, 탈명단창의 좌수에 들린 또 하나의 창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운검의 허벅지를 꿰뚫었다.
콰드득.
살이 꿰뚫리고, 근육이 찢기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탁.
뒤로 몇 걸음 물러선 운검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탈명단창을 노려보았다.
그의 허벅지에는 어느새 어린아이 주먹이 들어가고도 남을 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검붉은 피가 쉴 새 없이 콸콸 솟았다.
"쯧쯧쯧쯧."
탈명단창은 운검의 허벅지를 꿰뚫은 단창의 날에 묻은 피를 혀로 핥았다.
"엿 같은 맛이군."
"……."
"그리고 머리도 나빠. 제자 하나 죽는 대가로 내게 상처를 낼 수 있으면 이득이라는 걸 알았어야지. 크크크큭."
"이놈……."
운검이 탈명단창의 공격을 막지 않았더라면, 그의 다리 정도는 베어 낼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대가로 단창에서 뿜어진 공력이 한 사람은 확실히 죽이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이곳의 제자들은 아직 이놈의 공격을 막아 낼 실력이 되지 못하니까.
"너 같은 놈들을 상대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지."
"……무인으로서 최소한의 자존심도 없나?"
"이건 효율의 문제지."
탈명단창이 히죽 웃어 댔다.
"그냥 싸운다고 해도 너는 내 상대가 못 돼. 백 번 중에 아흔아홉 번은 내가 이기지. 하지만……."
탈명단창 손월이 손에 든 애병을 들어 올려 옆을 겨눈다.
"백 번 싸워 백 번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내가 왜 정직하게 싸워야 하지? 놀아나기 싫으면 네 제자들이 죽는 걸 그냥 두고 보면 돼. 하하하핫!"
그의 손에서 맹렬하게 회전한 단창이 다시금 화산의 제자들을 향했다.
'이 미친놈이!'
운검의 눈에 핏발이 섰다.
저 개 같은 놈이 날리는 단창의 궤적에는 명백히 자신의 수하들도 속해 있었다. 이대로 단창을 날린다면 오히려 등을 보이고 있는 그의 수하들이 더 위험할 것이었다.
하지만 탈명단창의 손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자신의 수하들과 화산의 제자들을 한 번에 꿰어 버리겠다는 듯 말이다.
"하압!"
파아아아아아앗!
탈명단창의 손에서 회전하던 단창이 벼락같은 속도로 발출되었다.
"안 돼!"
운검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을 날려 앞을 막아섰다.
카가가가가가각!
내력을 잔뜩 주입한 그의 검면에 단창이 파고들었다. 검에 구멍을 내어 버리겠다는 듯 맹렬하게 회전한 단창이 사방으로 불똥을 튀겼다.
우드드득.
손목이 부러지는 듯한 고통에 운검이 이를 악물었다.
일점에 집중해 찔러 오는 단창을 검으로 막아 낸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자세마저 완벽하지 않다면 더욱더.
일순 탈명단창의 눈에 새파란 광망이 일었다.
"병신이!"
그는 손에 남은 다른 단창으로 발출한 단창의 끝을 내질렀다.
까앙!
힘이 더해진 단창은 운검의 검을 그대로 날려 버린 후 그대로 오른쪽 어깻죽지를 파고들었다.
파아아아아아앗!
회전하는 창에 살이 갈리며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피보라가 일고, 뼈가 으스러지는 광경은 실로 섬뜩했다.
"……."
운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어깨를 뚫어 버린 단창을 바라보았다.
뼈가 끊어지고, 살이 찢겨 나간 팔이 겨우겨우 떨어지지 않고 몸에 붙어 있다.
"너는……."
그 순간 탈명단창의 이죽거림이 운검의 귀를 파고들었다.
"제자 때문에 죽는 거야."
콰드드득.
잠깐 회전을 멈췄던 단창이 다시금 회전하며 운검의 어깨를 더욱 깊숙하게 꿰뚫었다.
푸우우우웃!
다시 한차례 피가 뿌려졌고, 말 그대로 뜯겨 나간 운검의 팔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사숙!!!"
"관주님! 으아아아!"
"아, 안 돼!!!!"
그리고 그 광경은 화산 제자들의 눈에 똑똑히 새겨졌다.
오른팔이 허공으로 치솟고, 그 충격을 버티지 못한 운검이 내동댕이쳐지는 그 모습이.
턱.
잘려 나갔음에도 아직 검을 놓지 않은 팔이 하나의 물건처럼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평생.
화산의 제자들에게 검을 가르쳤던 팔.
백매관의 관주로서 수없이 많은 검을 펼쳐 보였던 그 팔이 운검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 충격적인 광경에 화산의 제자들이 울부짖었다.
"사숙! 으아아아아아아아아! 빌어먹을!"
"죽여 버린다! 저 개새끼! 내가 반드시 죽여 버릴 거야!"
절망이 그득한 눈으로 그 자리에 주저앉은 당소소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 앞에 손을 모았다.
'제발!'
제발, 빨리.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