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화. 곱게 죽지는 못할 거다. (1)
낭창하게 휘어졌던 검이 다시 튕기듯 적을 향해 쇄도했다.
카앙!
하지만 날카로운 기세를 품은 그 검은 시커멓게 물든 손에 가로막혀 힘없이 튕겨 나가고 말았다.
'이런!'
현상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어깨까지 검게 물든 독혈수의 팔이 섬뜩하게 빛났다.
강철을 종잇장처럼 찢어 낼 수 있는 현상의 매화검이 저 검게 물든 팔에는 생채기조차 남기지 못했다.
'이게 만인방의 대주급인가?'
만인방에는 십여 개의 무력대가 있다. 각각의 대주들은 만인방을 대표하는 강자들이다.
비록 그 위에 방주와 장로급들, 그리고 대에 속하지 않은 강자들이 즐비하다고는 하지만, 대주직을 맡고 있는 이라면 적어도 만인방의 상위 스무 명 안에 드는 강자라는 의미다.
'구파일방과 대등한 만인방의 고수라.'
묘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현상은 화산의 무각주.
이제는 그를 아득히 뛰어넘어 버린 청명이 녀석이 입산하기 전까진 화산의 최고수 자리를 놓지 않았던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 현상은 만인방의 대주 하나를 감당하기 버거워하고 있었다.
청명이 놈이 챙겨 준 혼원단이 아니었다면, 이미 그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바닥에 쓰러져 있었을지 모른다.
"후우."
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손목이 시큰하고, 허리가 조여 왔다. 심지어 늙어 버린 그와는 달리 눈앞의 독혈수에게는 생생한 젊음까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현상이 물러날 수 없는 까닭은…….
제자들을 지키기 위해? 아니면 화산이라는 이름을 이어 가기 위해?
'모르겠군.'
어쩌면 그런 허울 좋은 이야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현종과 다르다. 그처럼 제자들을 가없이 사랑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현영과도 다르다. 현영은 화산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쉽사리 내던지겠지만, 그는 그처럼 맹목적으로 화산을 위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생각이 많아 보이는군."
독혈수의 말에 현상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적이 얼굴에 내비치는 여유가 현상의 손끝을 저리게 만들었다.
독혈수가 혀를 찼다.
"늙는다는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 십여 년만 일찍 만났다면 좋은 승부가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현상이 어쩔 수 없는 웃음을 지었다.
적의 말이 날카롭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가슴이 시릴 만큼.
"포기하면 곱게 죽여 줄 수도 있다."
마지막 회유 아닌 회유에 현상이 침중한 눈으로 독혈수를 바라보았다.
실로 우스운 일이 아닌가.
"아해야."
현상이 검을 들어 독혈수를 겨누었다.
"네 앞에 있는 이가 무엇으로 보이느냐?"
"……."
"늙어 기력을 잃은 검수? 그게 아니면, 화산의 장로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호가호위하는 늙은이?"
어쩌면 모두 틀린 말은 아닐지 모른다.
하나.
"똑똑히 알아 두거라."
깊게 숨을 들이쉰 그는 정광 어린 눈으로 독혈수를 노려보았다.
"네 앞에 서 있는 건 화산의 역사다."
현종은 화산을 지켜야 했다. 현영은 화산이 망하지 않도록 어떻게든 동분서주했다.
그리고 현상은 그들이 피눈물을 흘리는 동안 그저 화산의 무학에만 파고들었다.
마음이 편해 보인다고?
속 편히 무학만 익히면 되는 일 아니냐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
그는 이제껏 현종에게 수도 없이 간청하고 빌었다.
차라리 산을 내려가 돈을 벌게 해 달라고. 익힌 무학이 그리 가볍지 않으니, 적지 않은 돈을 벌어 화산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 돈이 없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사람 역시 언젠간 다시 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무학이 끊긴다면 아무리 번창한다 해도 그건 화산이라 할 수 없다. 현상아, 너는 화산의 무학을 지켜야 한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
말라비틀어진 화산의 무학을 익히고, 복원하며, 또한 발전시키는 일.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둠 속을 손끝으로 더듬어서 길을 찾는 것처럼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그 길을 현상은 죽어라 걸어왔다. 그것도 무려 수십 년 동안.
그 고통을 누가 이해하겠는가?
그 절망을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지켜 온 화산의 무학이 이제야 열매를 맺고 숲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면 현상의 역할은 끝난 것인가?
늙고 병든 고목은 그저 후대만을 바라보며 말라비틀어져야 하는가?
"포기라고 했느냐?"
남은 것은 없다.
그가 지켜야 할 모든 것들은 이미 후대로 넘어갔다. 화산의 무학을 발전시키는 건 더 이상 그의 일이 아니고, 화산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 역시 더는 그에게 맡겨진 일이 아니다.
역할을 다해 버린 꽃은 그저 스러질 뿐.
하나.
"내 생에 단 한 번도 포기가 허락된 적은 없었다."
현상이 입술을 짓씹었다.
"나는 죽어 거름이 될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다. 아이들의 앞길을 위한 청석이 될 생각도 없다. 비록 늙고 추레해졌다 해도 나는 화산의 검수다. 죽어야 한다면 그저 검수로 죽을 것이다."
"……."
"그러니."
지켜야 할 것은 오직 하나.
자존심뿐.
"오너라. 만인방의 악적이여. 내 오늘 네게 화산의 무학이 무엇인지를 똑똑히 알려 주마."
독혈수의 눈이 차가워졌다.
"잘도 지껄여 대는군. 그 목이 뽑히고도 지껄일 수 있는지 보자."
독혈수의 양손이 검게 물들었다. 동시의 그의 몸에서 칼날 같은 기파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가공할 기파를 전신으로 받으며, 현상은 대지 위에 오롯이 섰다.
'이 검에 무엇이 담겼던가?'
글쎄.
그리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저 수십 년간 휘두르고 또 휘둘러 왔던 검을 그저 펼쳐 낼 뿐이다.
'고목나무에도 꽃은 핀다지?'
그렇다면 그의 검에 매화가 피어나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현상의 검 끝이 파르르 떨렸다.
잿더미에서 다시 피어나는 불꽃처럼, 선연한 매화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놓지 못한 것.
화산에 이십사수매화검법이 다시 돌아온 그날부터 현상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 역시 안다.
그의 나이에 더 강해져 봐야 한계는 극명하다는 것을. 차라리 그 시간에 아이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지원하는 것이 화산에는 더욱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놓지 못했다.
그는 검수.
일생을 검 하나를 잡고 살아온 검수다.
더 강해지지 못한다는 것이 어찌 수련하지 않을 이유가 될 수 있겠는가?
"으음?"
불꽃처럼 피어나는 매화를 본 독혈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한 수가 있었구나!"
그가 양팔을 폭풍처럼 횡으로 휘저으며 돌진했다. 날아드는 매화가 그의 독수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검은 폭풍과 겹겹이 피어 오른 매화가 사방으로 검기의 파편을 날리며 서로를 노렸다.
뚫으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카앙!
날아든 도가 검에 밀려났다.
짧은 충돌 이후 야도와의 거리를 벌린 현종이 깊은 숨을 내쉬었다.
'강하군.'
상대의 실력은 명백히 그보다 뛰어났다. 기껏해야 방어하는 데 급급할 뿐이다.
이마에 흘러내린 땀을 손끝으로 훔친 현종은 가라앉은 눈으로 슬쩍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직은…….'
운검과 현상의 활약 덕에 아직은 크게 밀리지 않고 있었다.
제아무리 기백이 넘쳐난다고 해도, 이곳에 있는 화산의 제자들은 만인방의 무사들에 비하면 아직 그 실력이 처지는 게 사실이다.
전쟁이란 반은 기세로 먹고 들어가는 것.
현종 그를 포함해 적의 대주들을 상대하는 세 사람이 무너진다면, 희생자가 급격하게 불어날 것이 자명했다.
'현상. 운검.'
그러니 두 사람이 최대한 시간을 끌어 주어야 한다. 서안에서 소식을 들은 아이들이 달려올 때까지 말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한눈에 보아도 탈명단창과 독혈수의 무위는 현상과 운검보다 뛰어나니까.
하지만 어떡해서든…….
"이거 나를 앞에 두고 옆을 돌아볼 여유가 있으시다니. 과연 화산의 장문이시구려?"
"……."
현종의 시선이 다시 천천히 정면으로 향했다.
야도가 도면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탁탁 내리쳤다.
"여유가 있는 것은 좋지만, 제 자존심도 조금은 생각을 해 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장문인?"
그는 여유 넘치게 빙그레 웃는 낯이었지만 현종은 굳은 얼굴을 풀지 못했다.
"일 파의 장문을 상대해 보는 일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화산쯤 되는 명문의 장문을 상대해 보는 건 확실히 처음이군요. 제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현종이 투명한 시선으로 야도를 응시했다.
호승심?
그런 것은 없다.
자존심?
그런 건 내다 버린 지 오래였다.
남은 것은 그저 화산의 장문인이라는 막중한 책임감과 부담뿐.
"당신을 넘지 못하면 누구도 죽일 수 없다고 했던가요?"
"그러하다."
"말은 좋지만!"
그 순간 야도의 손에 들린 도가 빛살처럼 현종을 향해 날아들었다.
서걱.
그리고 현종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가슴팍을 길게 가르고 지나갔다.
앞섶이 길게 갈라지며 선명한 선혈이 배어났다.
피륙의 상처.
하지만 그 상처가 의미하는 것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방심한 것도 아니건만 상대의 공격에 반응하지도 못했다. 이는 현종과 야도의 무위가 극단적으로 차이가 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건 강자가 할 때나 의미를 지니는 말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장문인?"
현종은 슬쩍 시선을 내려 길게 갈린 자신의 가슴팍을 바라보았다.
'강하군.'
적은 사선에서 살아온 자.
냉정하게 말했을 때, 감히 현종이 상대할 수 있는 이가 아니다.
쭉정이만 남은 화산의 무학을 평생 갈고닦았다 해도 장담할 수 없는데, 화산을 되살리기 위해 수련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던 현종이 무슨 수로 야도를 상대하겠는가?
하지만.
"그대는 분명 나보다 강하다."
"잘 알고 있구려."
"하지만 그게 내가 물러나야 할 이유는 되지 않지."
"……."
현종이 가만히 검을 늘어뜨렸다.
"본디 무학이란 강함을 겨루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타고난 역량을 어찌할 수 없는 세상에 무학이 생겨나며 약자들도 강자를 상대할 수 있게 되었지. 결국 무학이란 약자가 강자에게 대항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의미다."
"하하."
야도가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그래서 약자의 입장에서 나를 상대해 보시겠다?"
야도가 다시 도를 움켜쥐었다.
파아아앗!
문답무용으로 날린 도격이 현종의 머리를 쪼갤 기세로 쇄도했다.
카앙!
치켜 올린 검이 도를 흘려 냈다. 하지만 그 힘을 완전히 감당하는 것은 어려웠기에, 비낀 도가 현종의 어깨 살점을 한 움큼 뜯고 지나갔다.
촤아아악.
뿜어져 나온 피가 흩뿌려지며 현종의 흑의가 금세 짙게 물들었다.
두 번의 공격.
그리고 두 개의 상처.
실력 차는 명약관화하다.
"말은 이루어야 의미가 있는 법이지. 그렇지 않소?"
야도가 이죽이며 말했다.
"정파라는 놈들이 지껄여 대는 것에는 신물이 나. 항상 돼먹지 못한 궤변을 늘어놓으니까. 하지만 그런 놈들도 목이 잘리기 직전에 되면 좋은 소리를 내며 울더군."
그리고 도에 묻은 피를 바라보며 잔혹하게 웃어 젖혔다.
"장문인은 어떤 소리를 내며 울지 기대되는군!"
야도의 도가 다시 한번 뻗어졌다.
섬전 같은 속도. 그리고 그 속도에 어울리지 않는 가공할 힘.
야도(野刀)라는 별호에 걸맞게 난잡하고 거칠기 짝이 없는 투로(鬪路)였지만, 그 속도와 힘은 그 거친 투로의 단점을 가리고도 남았다.
도기가 맹렬하게 휘몰아쳤다. 마치 태풍을 맞닥뜨린 바다에 파도가 휘몰아치듯 말이다.
그리고 그 쏟아지는 도기를 맞이하는 현종의 자세는 단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카앙! 카앙!
날아든 도격이 튕겨 나갔다. 하지만 전신을 노리고 쏟아지는 도격을 모조리 막아 내는 건, 현종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서걱!
팔뚝이 베였다.
서걱.
종아리에서 피가 솟구쳤다.
서걱.
가볍게 베인 옆구리가 금세 피로 물들었다.
하지만 곳곳이 베여 나가는 와중에도 현종의 눈은 단 한 차례도 흔들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전신이 피로 물든 그는 중단세를 취한 채, 야도를 겨누었다. 그러자 한차례 폭풍 같은 도격을 쏟아 낸 야도가 미묘한 표정으로 공격을 멈추었다.
'뭐지? 이자는?'
짧은 접전만으로도 적어도 다섯 군데는 베어 냈다.
아무리 봐도 저자는 그의 상대가 아니다.
그런데…….
"고통을 느낄 줄 모르는 건가?"
아무리 단련에 단련을 거듭했다 한들 살이 베여 나가는 고통을 저리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고?
이는 수도 없는 상처를 입으며 살아온 야도에게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저건 애초에 베일 것을 각오한 자세다.'
몸 곳곳이 베여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중심선(中心線)만은 확실하게 막아 낸다.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 몸의 중심이 지나는 곳을 베이지 않으면 죽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그건 웬만한 독심(毒心)이 없이는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칼밥을 먹고 들판에서 풍찬노숙하는 야인도 아니고, 고고히 산속에서 편히 살아온 노인이 그 정도의 독심을 보인다고?
"고통이라 했는가?"
그런데 그때, 현종이 핏기가 가신 얼굴로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런 피륙의 상처를 고통이라 느낄 만큼 편히 살아오지 못했다."
그의 눈빛은 지독할 만큼 가라앉아 있었다.
육체에 새겨지는 고통 따위는 눈앞에서 문파가 무너져 내리는 고통에 비할 바가 아니다. 잘린 팔다리는 언젠가 아물 테지만, 썩어 들어간 속은 치유조차 되지 않으니까.
화산을 지켜 온 이들은 그만한 고통을 참아 내며 여기까지 왔다.
그에 비하면 이딴 상처는 생채기만도 못하다.
"자네는 장문이란 자리를 오해하는 것 같군."
"……뭐?"
"장문인은 가장 위에서 존중받는 자리가 아닐세. 오히려……."
현종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야도의 귀를 파고들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물고 늘어지는 자를 의미하지. 그대가 강하여 내 육신을 벨 수는 있을지언정, 내 혼을 베어 낼 수는 없네."
버틴다.
몸의 피가 모두 빠져나가 껍데기만 남는다 해도.
마지막 영혼 한 방울이 사라질 때까지 현종은 결코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내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러니 아직은 쓰러질 수 없다.
"나는 화산의 장문인이다."
그의 담담한 목소리는 그 어떤 호령이나 울부짖음보다 더 강하게 야도를 조여 왔다.
"그 의미를."
현종의 검이 야도의 목을 흔들림 없이 겨누었다.
"똑똑히 알려 주도록 하지."
야도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도를 틀어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