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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370화 (370/1,567)

370화. 우린 아무것도 못 본 거야. (5)

"후욱!"

남자명이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이미 자존심은 바닥에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니, 그렇기에 더더욱 물러날 수 없었다. 이대로 물러나 버리면 자존심만 구기고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되어 버리니까.

그는 심호흡을 하고 최대한 차분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소도장."

"네?"

청명이 해맑은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티 없이 맑고 화사한 웃음을 보고 있으니 속이 뒤집어지다 못해 당장 검을 뽑아 휘둘러 버리고 싶은 충동이 마구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남자명은 최대한의 인내를 발휘해 자신을 다스렸다.

'아니, 저놈이 아니다.'

그래도 남자명이 서월문의 문주로 살아온 경험이 얼마던가?

그는 자신이 진짜로 협상을 해야 할 대상을 찾아내었다.

그의 시선이 청명이 아니라 그 옆에 서 있는 현영에게로 향했다.

"장로님!"

남자명의 목소리에 절절함이 어렸다.

"도와주십시오! 화산이 도와주지 않으면 저희 종남의 속가들은 모두 저 간악한 사파 놈들에게 당하고 말 것입니다!"

장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최대한 올곧고 똑바르게 보일 수 있도록 그는 최선을 다했다.

"물론 저희가 한 짓이 화산의 입장에서 용서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쟁을 하던 이들도 외적이 쳐들어오면 일단 힘을 합치는 법 아니겠습니까?"

"흐음."

현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남자명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이번 한 번만 저희를 도와주신다면, 그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으음. 그렇구려."

"예!"

남자명의 눈에 희망이 피어났다.

확실히 저 화산신룡인지 토룡인지 하는 망종과는 달리 장로는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다. 과연 일파의 장로. 처음부터 무엇이 더 중요한지 알 만한 사람과 이야기를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처참히 무너졌다. 현영이 빙그레 웃으며 청명을 돌아본 것이다.

"청명아."

"네!"

"저분께서 지금 뭐라시는 게냐?"

"아. 그거요?"

청명이 어깨를 으쓱하고 대답했다.

"그래 봐야 니들은 호구 새끼들이니까, 쓸데없이 빼지 말고 와서 화살받이나 하라는데요?"

"……."

"……."

남자명의 눈가가 경련을 일으켰다.

어…….

아, 물론 뭐…… 맞지. 따지고 보면 뜻은 일맥상통하지.

그런데 보통 당사자를 앞에 두고 저렇게 말을 하나? 그것도 도사가?

'아, 아니지!'

지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그, 그렇지 않습니다!"

남자명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이번만 도와주신다면 절대 그 은혜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 말만이 아니라 화산에서 충분히 만족할 수 있도록 보답을 하겠습니다! 그러니 장로님 부디……!"

현영은 이번에도 역시 청명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묻지도 않았는데 청명이 알아서 해석을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재산이고 뭐고 다 날아갈 거지만, 그걸 막아 주면 쥐꼬리만큼 떼어 주고 생색 좀 내겠다는데요?"

"……."

현영의 미소가 더욱 푸근해졌다.

"그렇다는구만."

남자명은 할 말을 잃고 둘을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뭔…….'

사람의 말을 저렇게 삐딱하게 받아들이는 어린놈도 어린놈이지만, 그 어린놈의 말을 대책 없이 믿어 버리는 저 장로는 또 뭐란 말인가?

아무래도 그의 말로 이들을 설득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크흠."

그런데 그때, 지금껏 말을 아끼고 있던 단병립이 헛기침을 하며 앞으로 한 발짝 나섰다.

"장로님. 저는 태평문의 문주인 단병립이라고 합니다."

"아, 그러시구려."

이번에도 현영은 사람 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로님. 물론 화산 분들의 마음이 좋지 않으리란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진 서안을 떠나라고 언성을 높이다가 대뜸 이리 도움을 청하는 저희가 고깝게 보이시겠지요."

"잘 아시네요."

"……."

단병립이 멍한 눈으로 끼어든 청명을 바라보았다.

"왜요?"

"아, 아닙니다."

연신 헛기침을 해 어색함을 날린 그는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하며 다시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장로님. 부디 사사로운 것에 연연하지 마시고 대계를 생각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만인방, 신주오패입니다. 서안이 신주오패의 손에 떨어졌다는 말이 돌면 천하가 뭐라 하겠습니까?"

그러자 청명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종남이 병신이네?"

"……."

해맑은 웃음도 뒤따라왔다.

"맞나요?"

"그……. 어, 그럴 수도 있……."

"단 문주!"

"커허허험!"

남자명의 호통에 단병립은 나가려던 정신을 재빨리 붙들었다.

'빌어먹을, 자꾸 말린다.'

저놈이 너무 해맑은 얼굴로 끼어드니 어쩐지 무시할 수가 없었다.

남자명이 단병립의 말을 대신 이어받았다.

"그…… 물론 종남도 비난을 받을 겁니다. 하지만 화산이 서안에 들어와 있는 이상 화산도 그 화살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천하가 모두 화산의 무도함을 두고 비난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마지막 말은 거의 쩌렁쩌렁 울릴 만큼 우렁찼다.

그리고 그 말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는지 화산의 제자들이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여태 잠자코 있던 백천이 뭔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린 게 그 증거였다. 그 모습에 남자명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런데 그때 백천이 윤종을 보며 말했다.

"별 상관없지 않나?"

그러자 주변 제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네, 뭐 비난쯤이야. 얼마 전까지는 관심도 못 받았는데요."

"……사람들이 화산에 그렇게까지 신경을 쓸까요? 유명해졌다고는 하는데 저는 그렇게 실감을 잘 못 하겠어서."

"……."

단병립은 할 말을 잃고 화산의 제자들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처, 천하가 비난할 것입니다."

"비난이면 욕이잖아."

"욕 먹는 게 뭐 대단한 건가?"

"지금도 욕은 매일 처먹고 있어. 저 망할 놈한테."

"그러게."

단병립과 남자명은 둘 다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니. 이놈들은 사고방식이 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 있는 거지?'

화산 역시 명문 거파가 아닌가?

물론 정파를 자처하는 이들이라 해서 모두가 정의에 목매는 건 아니다.

그리 생각하는 것은 꿈 많은 어린아이들뿐이다. 세상은 늘 생각 이상으로 각박한 법이니까.

'하지만 선함은 접어 두고라도 체면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사파가 쳐들어오고, 종남 속가에서 이리 저자세로 나오는데도 나서지 않는다면 분명 역풍이 불 것이다.

"정말 화산의 체면이 이대로 땅에 떨어져도 괜찮단 말입니까?"

청명이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뭔가 오해하시는 모양인데, 이건 체면을 떨어뜨리는 일이 아니라 체면을 지키기 위한 일이에요."

"……예?"

"아무리 우리가 화산이라지만, 종남이 서안에 가진 영향력을 무시할 순 없죠. 남의 땅에서 벌어진 일에 끼어드는 게 좀 민망하다고 해야 하나?"

"……."

'남의 땅.'

단병립의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저 남의 땅이라는 말은 일전에 남자명이 이곳에서 했던 말이다. 확실히 남자명이 서안은 종남의 땅이며 화산에게는 단 한 평도 내어 주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저 도사 놈이 치졸하게도 그 말을 그대로 기억하고 지금 되돌려 주는 것이다.

"그, 그건……."

"에이. 걱정 마세요."

단병립이 뭔가 말을 하기도 전에 청명이 다시 해맑게 웃었다.

"종남이 어떤 문파인데요! 만인……. 거, 만……. 거기 이름이 뭐라고 했지?"

"만인방! 만인방!"

"아, 그렇지. 만인방 따위가 무슨 수로 종남을 어찌하겠어요? 넘무 걱정하지 마세요. 다 잘될 거예요."

"……."

아니, 왜 그 말을 네가 하냐?

지금 네가 그런 말을 할 상황이냐?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 버린 단병립은 원망 어린 눈으로 남자명을 바라보았다.

'그러게 왜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려서는!'

그의 눈에서 강한 원망을 느낀 남자명은 겸연쩍은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사실 이건 남자명으로서도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내가 이리될 줄 알았나?'

어제 그가 이곳에서 화산을 몰아붙일 때만 해도 통쾌하다고 웃어 젖히던 놈이, 상황이 좀 바뀌었다고 이렇게 책임을 전가하다니.

아무리 세상이 각박하다지만 이럴 수가 있는가?

"그……."

하지만 무어라 항변하려던 남자명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지금은 이런 것을 일일이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화산의 도움을 얻어 내지 못한다면 종남의 속가는 정말 끝장이다.

"장로님! 그러지 마시고, 이번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서안의 백성들이 가엽지도 않으십니까?"

그러자 현영이 푸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오. 안 그래도 오늘부터는 우리도 직접 나서서 서안의 백성들을 지킬 생각이외다. 무림의 일로 양민들에게 피해가 가서는 안 될 일 아니겠소?"

"그, 그럼……?"

"백성들은 우리가 잘 지킬 테니, 문주께서는 걱정일랑 마시고 문파를 잘 돌보시면 될 것이외다."

"자, 장로님!"

세상 무너진 얼굴로 외치는 남자명에게 웃어 보이던 현영은 슬쩍 화산의 제자들을 돌아보며 턱짓했다.

"손님 가신다."

"예!"

백천을 비롯한 화산의 제자들이 우르르 앞으로 달려와 남자명과 단병립의 주변을 둘러쌌다. 그리고 그들을 대문 밖으로 밀어 내기 시작했다.

"자, 장로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장로님!"

"화산! 화산의 명성을 생각하시어…… 장로님!"

현영이 심드렁한 얼굴로 귀를 후볐다.

"아아아아악! 이 천벌을 받을 놈들아!"

"이 사파나 다름없는 것들!"

결국 악담이 쏟아져 나왔지만 현영은 어디서 개가 짓나 하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이윽고 남자명과 단병립이 문밖으로 나가떨어졌고, 화영문의 대문이 굳게 닫혔다.

"쯧."

현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사람이라는 것이 상황에 따라 입장을 바꿀 수밖에 없다지만, 참 염치도 없는 것들이구나. 여기에 찾아와 도움을 청할 생각을 하다니."

그리고 슬쩍 청명을 돌아보았다.

"네 말대로 쫓아내기는 했다만, 어찌할 생각이냐? 이건 길게 끌 만한 일이 아니다."

"체면 때문에요?"

"아니. 장문인 귀에 들어가면 맨발로 서안까지 뛰어오실 것 같구나."

"……."

아, 그렇겠네.

그걸 생각 못 했구나.

"장문인께서 서안으로 안 오셔서 천만다행이네요."

"나도 그리 생각한다."

현종이 있었다면 일이 이리 쉽게 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단 양민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눈이 반은 돌아갔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 오래 걸릴 일도 아니니까요."

"그리고 저들의 말에도 옳은 점이 있다. 아무래도 서안의 양민들에게 피해가 갈까 걱정이구나."

"그렇죠."

"양민들이 피해를 입었단 소문이 나면 장문인이 나를 방에 가두고 사흘 밤낮 동안 도덕경만 읽게 할지도 모른다."

"……차라리 맞는 게 낫지."

"내 말이!"

현영의 얼굴이 삽시간에 달아오르는 걸 보니, 아무래도 비슷한 짓을 당한 경험이 있는 모양이었다.

한동안 씩씩대던 현영이 청명을 보며 말했다.

그의 표정에 미묘한 불안함이 묻어났다.

"네 말대로 하기는 했다만, 나는 솔직히 종남 속가와 손을 잡는 게 그리 나쁜 일은 아닌 것 같구나. 만인방은 사파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강대한 문파다. 일개 대라고 하더라도 웬만한 중소 문파는 하루아침에 쓸어 버릴 수 있을 터."

"확실히 그래 보이더라고요."

"그런데 정말 괜찮겠느냐? 저들과 손을 잡지 않으면 그 적사대를 우리와 화영문만으로 상대해야 할 수도 있는데."

"흐음."

청명은 뒤쪽을 슬쩍 돌아보며 말했다.

"애들은 원래 싸우면서 크는 거죠."

"응?"

씨익 웃는 웃음이 태연하기만 했다.

"슬슬 적당한 실전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비무나 대련으로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현영은 그만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만인방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는 건가?'

아니, 그럴 리는 없겠지.

행동이 엉뚱해서 곧잘 오해하고는 하지만, 청명은 절대 둔한 아이가 아니다. 오히려 과하게 총명해서 평범한 이들과 달라 보이는 것이다.

그런 청명이 만인방과 대적한다는 말의 의미를 모를 리는 없다.

"괜찮겠느냐? 위험할 수도 있을 텐데?"

그 말에 청명이 뚱한 얼굴로 백천과 다른 제자들을 돌아보았다.

"뭐 설마 죽기야 하겠어요?"

"……."

"……."

그 말에 화산 제자들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 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명은 생각에 잠긴 채 중얼거렸다.

"흐음. 종남도 종남인데……."

생각해 보니 만인방이라는 놈들이 서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상황도 어이가 없기는 했다.

'신주오패는 얼어 죽을.'

그가 과거 매화검존으로 한창 활동할 당시에는 천하에 사파라는 것들이 씨가 말랐었다.

그런데 겨우 백 년 사이에 그런 명호를 쓸 만큼 강대해졌다 이 말이렷다?

"한 번에 둘 다 해결해야겠네. 어디 더러운 사파 놈들이 건방지게 남의 구역에 침을 묻히려고!"

"아까는 종남 거라며."

"아. 내가 그랬었나?"

기억이 잘 안 나는거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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