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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369화 (369/1,567)

369화. 우린 아무것도 못 본 거야. (4)

"……."

남자명이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하루아침에 이, 이게 대체 뭔 일이란 말인가?'

화적문은 말 그대로 박살이 나 버렸다.

아직 채 다 의원으로 이송되지 못해 바닥에서 신음하고 있는 문도들과, 곳곳이 파괴되고 무너져 엉망이 되어 버린 전각들.

갑자기 강도라도 들지 않고서야…….

'아니, 강도 따위가 아니지.'

남자명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화적문의 문주 조호방은 여전히 의식을 잃은 채 널브러져 있었다.

"……문주님."

남자명에게 이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렸던 유해상이 어찌할 바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대체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

대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이겠으나, 남자명은 딱히 할 수 있는 대답이 없었다.

'만인방이라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만인방이 서안을 노린다는 사실이야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이렇게 전격적으로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심지어 이리 과감하게 말이다.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남자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행동과 달리, 그의 머릿속은 거의 텅 빈 상태였다. 대책이라 할 만한 게 조금도 떠오르질 않았다.

'만인방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만인방이 어떤 곳인가?

저 신주오패 중 하나다.

정파에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있다면 사파에는 신주오패가 있다. 다시 말해 신주오패는 저 구파일방과도 자웅을 겨룰 수 있는 거대 문파다.

그런데 그런 신주오패 중 하나인 만인방의 적사대를 종남 속가가 상대한다고?

"문주님, 어찌……."

"이, 일단!"

남자명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속가의 문주들을 모두 모으시오! 지금 당장!"

"예!"

유해상이 잽싸게 사라지고, 남자명은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는 조호방을 바라보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이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하나, 누구도 그의 말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관은 뭐라 합디까?"

서월문에 모여든 종남 속가의 문주들이 커다란 원탁에 둘러앉았다.

그들의 표정은 대부분 침통하기 짝이 없었다. 화영문에 들어 소리를 질러 대던 때의 표정을 생각하면 같은 사람인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나서지 않겠답니다."

"백성이 강도에게 변을 당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인데 나서지 않는다니요!"

"……본디 관이란 그런 곳이 아닙니까."

의검문(義劍門)의 문주인 동방회(東方廻)가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게다가 저 만인방 놈들이 워낙에 교묘합니다. 화적문을 완전히 박살을 내 놓으면서도 단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 난리를 피우면서도 양민은 한 사람도 건드리지 않았고요. 그러니 관에서도 관여할 명분이 없는 듯합니다."

"만인방을 건드리기가 무서운 건 아니고요?"

"……문주님. 말씀을 가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크흠."

남자명이 크게 헛기침을 했다.

아무리 화가 났다고는 하나, 할 수 있는 말이 있고,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는 법이다.

"제가 조금 흥분했습니다."

남자명이 순순히 인정하자 동방회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관은 말이 통하질 않으니 성주님을 직접 만나 봐야 할 것 같은데…… 일단 요청은 계속 하고 있습니다만 답변이……."

'그렇겠지.'

남자명 역시 눈을 슬쩍 내리깔며 한숨을 쉬었다.

답답하고 속이 터지지만, 그렇다고 저들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무림의 일은 무림에서.

그건 강호를 살아가는 이들의 원칙이었으니까.

만인방이 양민들을 건드리지 않는 이상, 관에서는 절대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설사 종남 속가들이 모조리 망해 자빠진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지금 그 악적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날이 새자마자 서안을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아마도……."

"오늘 밤에 다시 오겠군요."

"그렇습니다."

남자명은 썩썩 소리가 나도록 마른세수를 하더니 그로도 모자란 듯 얼굴을 쥐어짜는 듯 주물렀다.

'빌어먹을. 종남이 봉문만 하지 않았어도!'

만인방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종남 역시 천하에서 열 손가락 안에는 넉넉히 꼽히는 문파다. 종남이 봉문 하지 않았다면 만인방도 감히 서안으로 발을 들이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종남으로 보낸 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돌아왔습니다만…… 문이 열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봉문을 풀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남 문주……. 아시겠지만, 봉문이라는 게 그리 쉽게 풀 수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장문령부로 시행된 봉문은 종남의 장문인이라고 해도 마음대로 풀 수 없습니다. 설사 외적이 쳐들어와 전쟁이 난다고 해도 봉문 한 문파는 문파 외부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원칙 아닙니까?"

"원칙! 원칙! 그 원칙을 따지다가 다 죽게 생겼는데 뭔 놈의 원칙이란 말이오!"

쾅!

결국 참다 못한 남자명이 과격하게 원탁을 내리쳤다.

위에 놓인 찻잔들이 뒤집어지며 엉망이 되었지만 누구도 남 문주를 탓하지 않았다. 속이 썩어 들어가는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하면, 진정 방법이 없단 말입니까?"

"……어쩌겠습니까. 저희끼리 잘 뭉쳐 대항하는 수밖에요."

"대항이 되겠습니까?"

"허어? 그럼 어쩌자는 겁니까? 서안을 버리고 도망이라도 치자 이 말입니까?"

문주들이 옥신각신대기 시작했다.

"서안의 백성들이 종남의 속가문을 우대하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가 신뢰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파 놈들이 쳐들어오는데 줄행랑을 쳐 버린다면, 그 후엔 무슨 염치로 서안에 돌아올 수 있겠습니까!"

"그 사파 놈들이 양민들은 안 건드린다 하지 않소!"

"사파가 괜히 사파입니까? 지금이야 그렇다지만,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떻게 알고!"

"그럼 이대로 앉아 당하자는 말씀이오?"

"창피하게 달아나느니 그게 낫지!"

"그럼 문주께서는 여기서 옥쇄하시오! 나는 살아야겠으니."

"뭣이 어째?"

고성이 오가는 가운데, 남자명은 손에 얼굴을 묻었다.

'빌어먹을.'

평소에는 고상한 군자처럼 굴더니 위기가 오자마자 모두 뒷골목 왈패나 다름없는 모습들을 보이고 있었다.

하기야.

저걸 탓하는 것도 부질없다. 어차피 사람이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법이니까.

천하를 호령하는 왕도 외적이 성 앞까지 몰려오면 새파랗게 질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놈이 정말!"

"이놈? 지금 이놈이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네 사형이라는 것을 잊지는 않았겠지?"

"빌어먹을, 속가가 언제부터 배분을 그리 따졌다고!"

"듣자듣자 하니까 이게!"

숫제 검이라도 뽑을 기세였다. 언성을 높이는 두 사람을 지켜보던 남자명이 다시금 있는 힘껏 원탁을 내리쳤다.

퍼어어억!

튼튼한 자단목으로 만들어진 원탁이 말 그대로 두 쪽이 나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 모습에 다투던 문주들이 입을 다물고 남자명을 돌아보았다.

"추한 꼴은 작작 보이시오."

"……죄송합니다. 문주님."

"면목이 없습니다."

간신히 주변이 조용해지자, 남자명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적사도 엽평.

그 이름은 남자명도 몇 번이나 들어 보았다. 고수들이 득실거린다는 만인방에서도 도의 고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이.

애초에 만인방 내 십여 개밖에 존재하지 않는 무력대의 대주를 맡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강함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저 종남에서도 몇몇 장로들과 뛰어난 일대제자쯤은 되어야 상대할 수 있는 이일 것이다.

그런 이를 대체 어떻게 막아야 한단 말인가?

'밤이 되면 분명 다시 쳐들어올 텐데.'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남자명이 신음하던 그때였다.

"……화산."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귀를 파고들었다.

남자명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지금 뭐라 하셨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에 당황한 그는 눈을 끔뻑거리며 다시 물었다.

"……화산파, 그러니까 화영문에 도움을 청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

겸연쩍은 대답이 다시 돌아왔다. 남자명은 황당함과 당혹이 뒤섞인 얼굴로 말을 한 이를 바라보았다.

태평문의 문주인 단병립(段竝立)이 멋쩍은 얼굴로 슬쩍 얼굴을 붉혔다. 평소에도 대가 약한 면이 있어서 남자명이 그리 좋아하지 않는 이였다.

"냉정하게 말해 종남이 봉문을 풀 수 없다면, 만인방의 적사대를 우리만으로 막아 내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지금 서안에는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화산을?"

"예."

단병립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마침 지금 화영문에는 화산의 본산 제자들이 와 있고, 무엇보다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화정검 같은 이들이 있습니다. 게다가 화산신룡과 그 혜연마저 와 있지 않습니까?"

"……."

그렇지.

화정검도 화정검이지만, 화산신룡이나 혜연이라면 종남의 일대제자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라면, 저 적사도 엽평을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적사대도 적사대지만, 저 엽평을 상대할 이가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니까.'

전장에서 절대고수가 발휘하는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엽평만 없다면 아무리 적사대가 몰려왔다고 해도 이리 절망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병립이 조금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러니 화산에 도움을 청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하지만 남자명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유해상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반대하고 나섰다.

"사람이 부끄러움을 알아야지! 어찌 저 화산의 무뢰배들에게 도움을 청한단 말이외까!"

"……하나 상황이……."

"게다가!"

유해상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우리가 그들에게 한 짓이 있는데! 그들이 잘도 우리를 돕겠습니다."

"아니지요, 아니지요. 이건 꼭 그리 생각할 일만은 아닙니다."

단병립은 흘러내린 땀을 수건으로 닦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어찌 되었건 저들은 명문 정파가 아닙니까?"

"……."

"그 화산파입니다. 아무리 우리와 사이가 좋지 않다고는 하나, 저들이 명문이며 정파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으음."

"명문과 정파를 자처하는 이들이 사파가 쳐들어왔는데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먼저 손을 내밀지야 않겠지만…… 우리가 먼저 고개를 숙인다면 못 이기는 척 손을 잡을 겁니다."

잠자코 듣던 남자명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그럴 거라 생각하시오?"

"물론입니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으니까요."

"진짜 이유?"

"만인방이 종남만 노리겠습니까?"

"……."

단병립의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 단호했다.

"저들이 진정으로 서안을 노리는 것이라면, 종남의 속가를 정리하는 정도에서 끝내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 다음은 당연히 화영문이 그 목표가 되겠지요."

"흠……."

"그러니 화영문, 그러니까 화산도 우리와 손을 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홀로 적사대와 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그렇겠지요."

"그건 너무 무모하고 멍청한 일입니다. 설사 이길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런 어려운 길을 선택할 우자(愚者)는 없지요."

남자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이라.'

화산에 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사실 그만한 방패도 흔치 않지.'

꼴 보기 싫은 놈들이지만, 아군이라면 더없이 든든할 수도 있지 않은가?

"좋은 의견이오."

"남 문주님? 정말 그러실 생각이십니까?"

남자명은 비릿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물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긴 하오. 하나 적당히 자존심을 숙여 주고 이용할 수 있다면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겠소?"

"으음. 그렇지요."

남자명이 더는 말할 것 없다는 듯 단호하게 손을 저었다.

"화산을 끌어들이는 건 내가 할 테니, 다른 분들은 문파들을 단속해 주시오. 그리고 단 문주!"

"예, 문주님."

단병립이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명에게 다가왔다.

"나와 함께 갑시다."

"알겠습니다."

더 지체할 틈도 없었다. 그는 단병립을 대동하고는 방을 벗어났다.

그리고 잠깐 침묵하며 걷다 넌지시 말을 건네었다.

"화산이 순순히 우릴 돕겠소?"

"그들은 우릴 돕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유는? 아까 말한 게 전부는 아니겠지?"

"그들이 정파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전부요?"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 남 문주를 향해 단병립은 살짝 복잡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뻔한 말 같지만 거기에는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정파를 자처하는 이들이 사파가 쳐들어왔는데도 방관한다면 서안의 백성들이 그들을 어찌 생각하겠습니까?"

가만 듣던 남자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병립이 말을 이었다.

"물론 싫은 소리야 좀 듣겠지만, 결국은 우리를 돕고 나설 것입니다. 그럼 그들을 방패막이로 내세워 적사대를 막아 내고, 용도가 끝난 놈들이야 추후에 다시 몰아내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남자명이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럼 내가 해야 할 것은 고개를 숙이는 것이겠군."

"자세가 낮을수록 좋습니다. 거인은 필요하다면 무릎을 아끼지 않는 법이지요."

"하하하. 그럼 어디 거인이 되어 보실까?"

남자명이 기분 좋게 웃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화산은 물론 정파지만, 그 화산을 이끄는 이는 그들이 알던 정파인이 아님을 말이다.

"눼에?"

"……."

"아, 그러니까. 우리가?"

"……."

남자명의 볼이 푸들푸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게, 술병을 든 어린놈이 평상에 반쯤 드러누운 채 계속 그들을 보며 낄낄 웃어 대고 있었다.

얼굴에 떠오른, 고소하다는 표정이 너무 노골적이라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하하하하. 재밌는 농담을 하시네, 이분들. 하하하하하핫!"

"……."

남자명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옆을 노려보니 화산이 그들을 도울 거라 자신했던 단병립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남자명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꼴꼴 소리를 내며 술을 먹던 어린놈, 청명이 외쳤다.

"사숙! 소금 가져와!"

"이 사람들한테 뿌려?"

"뭔 개소리야! 입구에 뿌려야지, 이 인간아!"

한 번씩은 백천이 저보다 더한 놈이라고 생각하는 청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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