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6화. 우린 아무것도 못 본 거야. (1)
"……."
청명이 텅 빈 눈으로 연무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뒤에서 화산의 제자들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확실히 끝장을 봤네."
"응. 분명 끝을 내긴 했지."
모두 힘이라곤 한 올도 없는 목소리였다.
"우리가 끝장 난 게 문제지만."
"……."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질 좋은 청석으로 단단하게 다진 연무장 위를 모래바람이 쓸쓸히 쓸고 지나갔다.
단 사흘 전까지만 해도 수련생들로 가득 찼었던 연무장은 지금 개미 한 마리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깨끗(?)했다.
그 을씨년스러운 광경을 보며 청명이 눈을 끔뻑거렸다.
어…….
이러면 망하는데?
"……이젠 파리조차 날리지 않는구나."
허망함이 잔뜩 묻어나는 현영의 말에 청명이 움찔했다.
"허허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단 사흘 만에 이리될 줄은."
태연함을 가장한 위립산의 목소리에도 미세하게 불안이 묻어났다.
"과연, 이게 객지라는 건가?"
"……거참."
백천은 슬쩍 청명을 넘겨다보며 말했다.
"저것도 대가리 못 깨면 별거 없네."
움찔한 청명이 고개를 돌리자 백천이 잽싸게 휘파람을 불며 딴청을 피웠다.
"……끄으응."
하지만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청명은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종남 속가들의 대처는 신속하고도 과감했다.
만일 그들이 적당히 명분을 내세우거나, 화산을 견제하는 데 집중했다면 절대 이런 상황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명분을 찾는 대신에 실리를 추구했다.
"사람이 체면을 내다 버리면 이렇게 무섭구나."
"그래도 그렇지. 흑도방파나 할 짓을……."
"……확실히 좀 과하긴 했어."
"아미타불."
혜연은 연신 불호만 외었다.
'속세란 정말 무서운 곳이구나.'
요 며칠 동안 그는 종남의 속가들이 서안에 저지르는 일들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다는 말은 이런 걸 두고 쓰는 거겠지.'
아무리 종남의 속가가 서안 곳곳에 퍼져 있다고는 하나, 이 넓은 서안에 어디 그들과 관련이 있는 이들만 살고 있겠는가?
화영문에 입문한 이들 중에서는 저 종남이나 종남의 속가와 관계가 없는 이들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칼 든 놈들이 눈을 부라리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평범한 양민들이 무슨 배짱으로 그 서슬 퍼런 칼날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관계가 있는 곳은 관계를 통해 협박하고, 이권이 얽힌 곳은 이권을 통해 윽박지른다. 그리고 관계가 없는 곳은 괜스레 얼쩡거리며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상황이 이리되니 불만이 있더라도 당장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할 수밖에 없다.
청명은 이를 빠득빠득 갈아붙였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정파라는 놈들이 이렇게 치졸하게 나온다고?"
아는 놈 붙들고 협박하는 것까지야 이해했다.
하지만 벌건 대낮에 칼 뽑고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는 짓거리는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최소한 스스로 명문의 속가라는 자각이 있다면 절대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짓이었다.
그때 위립산이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장로님. 차라리 관에 말을 해 보는 것이……."
"그건 안 될 일일세."
현영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말을 꺼냈던 위립산이 살짝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무림의 일은 무림에서……."
"그런 게 아니라, 저 남자명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런 일을 시작할 때 관부와 미리 협의하지 않았을 리가 없네. 이미 충분히 돈을 먹여 두었을 게야."
"아……."
현영이 눈을 찌푸렸다.
"게다가 듣자 하니, 지금 서안의 성주는 종남과 그 연이 깊다고 하더군. 그런 이가 우리 편을 들어줄 리가 없지."
"끄으응."
위립산이 갑갑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어찌해야……."
"그것이……."
현영도 이번만은 딱히 대처법이 생각나지 않는 듯 말끝을 흐렸다.
그러다 결국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일이 더럽게 꼬였어.'
원래라면 지금쯤 종남이 먼저 나서서 서월문을 비롯한 속가들을 벌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종남은 봉문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아닌가?
"저들이 칼을 들고 설치는데, 차라리 저희도 칼로 맞서는 게 어떻습니까?"
"……그게 그리 간단하지 않다."
현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상황에서 화산이 종남의 속가들을 치게 된다면, 옆 문파가 봉문을 한 틈을 타 속가들을 핍박하고 이득을 취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강호가 원래 그런 게 아닙니까. 눈 가리고 아웅이지요."
"……그 아웅이 중요하다."
결국은 같은 결과로 귀결되는 일이라 할지라도, 어떤 명분을 가지고 어떤 과정을 겪느냐에 따라 평가는 천차만별로 달라지기 마련이다.
화산이 정파를 지양하고 협의를 논하는 이상, 외부의 평판을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다.
"끄응."
그 말을 듣던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거 생각보다 골치 아픈 일인데.'
그냥 무력시위를 하는 걸로 쉽게 해결될 일이었다면, 청명도 뒤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장 주먹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을 굳이 머리를 써 가며 해결할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이건 웬만큼 힘을 써서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지금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안면에 철판을 깔고 백성들을 핍박하는 종남의 속가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종남과 그 속가들이 그동안 서안에 쌓아 둔 인식들이다.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어.'
입장 바꿔 종남이 화음으로 쳐들어와 화산보다 뛰어난 실력을 보여 준다고 해서 화음 사람들이 종남으로 홀랑 넘어가겠는가?
아니. 그런 일은 쉽게 벌어지지 않는다.
"어쨌든 서안과 종남은 한 식구라는 거지."
"……응? 그건 무슨 소리냐?"
윤종이 고개를 갸웃하자 청명이 짜증 내듯 말했다.
"보통 이런 일이 벌어지면 서안 사람 중 몇몇은 이곳으로 와서 도움을 청하기 마련 아냐?"
"……듣고 보니."
"그런데 단 한 사람도 이곳에 오지 않는다는 건, 화산과 화영문은 여전히 서안에서 외부인이라는 의미지."
"저만큼 패악질을 부리는데도 말이냐?"
"뭐 어쩌겠어. 본인들이 그리 생각하겠다는데."
청명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이 인식은 쉽게 깨지지 않아.'
화산이 몰락하여 지난 백 년간 제 역할을 하지 못했음에도, 화음의 백성들은 화산을 버리지 않았다.
이건 힘이나 명성만으로는 깨기 힘든 미묘한 부분이다.
'이걸 완전히 한번 뒤집어야 하는데.'
이것만은 청명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아니! 이것들이 미쳤나? 어디서 살기를 내뿜고 있어? 너희 개처럼 처맞아 볼래?"
"응?"
어디선가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에 청명의 고민이 뚝 끊겼다.
그는 고개를 획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난데없이 나타난 홍대광이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며 앞을 막아선 무인들에게 삿대질을 해 대고 있었다.
"……저건 또 뭐야."
무인들이 아 뜨거라 하고 달아나자 홍대광은 씩씩대며 화영문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청명이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거지 아저씨?"
홍대광이 황당하다는 듯 가슴을 친다.
"아니, 갑자기 저것들이 지나가다가 나한테 살기를 뿜잖아! 허어. 세상 각박하지. 지나가던 거지한테 살기를 뿜어 대는 세상이라니."
청명이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찼다.
"가지가지 한다."
아마 그저 행인인 척하며 화영문에 접근하는 이들에게 은근슬쩍 경고를 보내는 이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하필이면 홍대광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에게 살기를 보낸 것이고.
아무리 그래도 오는 이들이 너무 없다 싶었는데, 저런 짓까지 하고 있었구나.
"저것들 뭐냐?"
"종남의 속가들이에요."
"쯧쯧쯧. 상황이 묘하게 돌아간다는 말이 있더니만, 별 희한한 수까지 다 쓰는군. 남자명이 그리 추잡한 인간은 아니라고 들었는데."
홍대광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바깥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런데 무슨 일로 왔어요?"
"아!"
홍대광이 고개를 획 돌려 청명을 바라보았다.
"종남이 봉문 했다."
"……와아. 그것 참 신기하고 놀라운 소식이네요."
"아니. 봉문이나 다름없다가 아니라, 아예 정식으로 봉문을 선언했다니까."
"엥?"
청명이 놀라며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요?"
"그렇다니까. 어제부로 천하의 명문들에게 봉문을 선언하는 전갈을 보냈다고 하는구나. 이제 종남은 앞으로 1년간 대외활동을 완전히 금한다. 이건 장문령부로 선언한 일이라 1년간은 종남 스스로도 어길 수 없다. 흐흐. 이제는 서안에 벼락이 떨어져도 종남은 산문을 벗어날 수 없게 된 거지."
"호오?"
청명이 살짝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리고 홍대광은 그런 그의 반응을 보며 눈을 빛냈다.
"너! 종남이 왜 봉문 하는지 짚이는 데가 있구나?"
"엥?"
홍대광이 눈을 가늘게 뜬다.
"지금까지 내 입에서 이 말을 들은 사람치고 너처럼 태연하게 반응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이놈! 어서 그 이유를 내게 고하지 못할까!"
"……나 말고 그 말을 누가 또 들었는데요?"
"네가 처음이지!"
"확 마."
청명이 한 손을 들어 올리는 시늉을 하자 홍대광이 황급히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뒤로 물러났다.
"폭력은 반대다!"
"……됐어요. 그래서 그 이야기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
"겸사겸사 들렀지. 그런데 종남이 봉문 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구나? 나는 엄청 기뻐할 줄 알았는데."
"끄으응. 지금은 상황이 영 꼬여서……."
청명이 입맛을 다셨다.
차라리 종남이 봉문을 풀고 서안으로 내려왔다면 일이 좀 더 쉬워질 수 있었다.
그런데 종남이 이렇게 정식으로 봉문을 선언해 버린 이상, 이제 서안의 일은 오로지 화영문과 종남 속가 사이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청명의 입에선 한숨이 마를 줄을 몰랐다. 연거푸 땅이 꺼져라 한숨만 쉬어 대니 홍대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그게……."
말을 꺼내던 청명이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홍대광이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하하. 이 어르신을 앞에 두고 고민이라니! 걱정하지 말고 내게 말해 보거라. 개방의 신기제갈이라 불리는 내가 특별히 친구를 위해 귀계를 내어 줄 테니."
"……개방의 밥버러지라 불린다는 소문이 있던데."
"거지가 다 밥버러지지, 뭘 새삼스럽게."
"아. 그건 그러네."
반질반질한 얼굴로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홍대광을 보며 청명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지.'
홍대광은 개방에서도 후대 방주로 거론되는 이들 중 하나며, 세상의 수많은 정보를 다룬다. 청명과는 다른 시각을 보여 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청명이 그간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모든 상황을 들은 홍대광은 별안간 껄껄 웃어 젖혔다.
"허허. 뭐 그런 별것도 아닌 일로!"
"오?"
청명의 눈이 반짝였다.
"해결책이 있어요?"
"이 어르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당연히 있지!"
"그게 뭔데요? 이 일만 잘 해결해 주면 내가 한동안 밥걱정은 없게 해 줄게요."
"흐흐흐. 뭐 어려운 일이라고. 해결책은 아주 간단하지. 이봐, 화산신룡."
"네?"
홍대광이 빙그레 웃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짐 싸서 낙양으로 가자. 서안은 포기하고 더 큰 데 지부를 열면 그만이지!"
"……그게 해결책이에요?"
"어떠냐! 더없이 확실한……."
"에라이!"
청명이 홍대광의 엉덩이를 뻥 걷어찼다. 동시에 그가 악 소리를 지르며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아이고, 하며 나뒹구는 그를 노려보며 청명이 외쳤다.
"안 그래도 속 터져 죽겠는데!"
"속이 터져 죽겠으면 일을 잘 처리했어야지! 처음부터 그냥 적당히 종남 속가에 인사부터 하고 낮은 자세로 엉덩이를 들이밀었으면 저들도 화영문을 어쩌지 못했을 것 아니냐? 뭔 배짱으로 종남이 장악하고 있는 곳에서 너 죽고 나 살자 질러 대!"
"끄응."
엉덩이를 문지르며 일어난 홍대광이 혀를 찼다.
"종남이 봉문 한 이상, 저들은 독이 바짝 올라서 화산에 저항할 거다. 힘으로 찍어 누르지 않는 이상은 절대 물러나지 않겠지. 하지만 저걸 힘으로 찍어 눌러 버리면 화산은 지금 한창 오르고 있는 명성에 찬물을 끼얹게 된다. 결과적으로는 얻는 게 없지."
"명성 따위 누가 신경이나 쓴대요?"
"있으면 정작 쓸데가 없어도, 막상 없으면 또 아쉬운 게 명성이다. 게다가 명문 정파를 자처하는 곳이라면 더욱 그렇지."
"끄응."
홍대광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서라. 일이 이리되어 버린 이상은 방법이 없다. 저 종남의 속가들이 한날한시에 모조리 망해 자빠지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아주 잘 알고 계시는군."
"엥?"
갑자기 들려온 다른 목소리에 모든 이들이 일제히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아……."
청명의 한숨이 다시 터져 나왔다.
화영문의 입구로 남자명을 선두로 종남 속가의 문주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아니. 이 양반들이 여기가 제집 안방인 줄 아나. 확……."
막 소리를 지르려던 청명이 별안간 입을 딱 닫았다.
안으로 들어온 남자명이 손에 들고 있던 자루를 냅다 앞에다 던져 버렸기 때문이다.
쩔그렁!
뭔가 묵직하게 들리는 소리에 청명이 눈을 부릅떴다.
'돈?'
백 장 밖에서 동전 떨어지는 소리도 귀신같이 듣는 청명이 아니던가? 그런 청명이 돈 자루 떨어지는 소리를 잘못 들을 리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돈이라니?
청명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바라보자 남자명이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입을 열었다.
"버틸 만큼 버텼으면 그 돈 가지고 서안에서 꺼지시오. 이 장원은 우리가 사 줄 테니. 어때? 화산에도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닐 텐데?"
"끄으윽."
청명이 뒷골을 움켜잡고 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처, 청명아!"
"정신 차려라, 청명아!"
"뒤, 뒷골이……. 끄윽."
그 모습을 보며 인과응보라는 말이 아직 세상에 남아 있음을 실감하는 혜연이었다.
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