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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363화 (363/1,567)

363화. 그럼 저는 무슨 일을 하면 됩니까? (3)

"방장!"

소림의 장로, 법계가 굳은 얼굴로 법정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느냐?"

"……혜연을 데려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법정은 말없이 찻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차에서 흘러나오는 곡물의 향이 법정의 코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데려온다라.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어찌 이리 태평하십니까? 혜연은 소림을 이끌어야 할 인재입니다. 그런 아이가 그냥 속세도 아니고 저 화산으로 갔는데……!"

"하면, 뭐라 말하고 그를 데려와야 한단 말이더냐?"

"……예?"

법정이 미소를 지으며 법계를 바라보았다.

"네가 있는 곳에는 너의 불도(佛道)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겠느냐?"

"그건……."

법계가 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물었다. 법정이 부드럽게 말했다.

"부처는 세상 모든 곳에 있는 법이다. 부처란 저 삭아 빠진 경전이나 드높은 불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곳에는 그 어디라도 부처가 있다. 이것이 소림의 가르침 아니더냐?"

반박할 구석이 없는 말이었다. 법계는 잠깐 침음성을 흘리다 답했다.

"그렇습니다."

"혜연을 그리 가르친 것은 소림이다. 한데 어찌 소림이 그 가르침을 스스로 부정할 수 있단 말이더냐?"

"……하오나 방장."

법정은 고개를 내저었다.

"집착인 게다."

"……."

그리고 가볍게 반장을 하고 말을 이어 갔다.

"혜연은 누군가가 가르칠 수 있는 아이가 아니다. 세존께서는 누구의 가르침도 없이 스스로 유아독존 하셨고, 보리달마께서는 자신만의 불법을 만들어 내셨다. 혜연이 정말 그런 인재라면 그곳에서도 자신의 불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화산에서 말입니까?"

"그래. 화산."

법정의 눈이 차게 빛났다.

"화산을 무시하지 말거라. 화산은 천하의 어떤 곳도 이루지 못한 성과를 단기간에 이뤄 낸 곳이다. 그곳에 가지는 감정과는 별개로, 화산이 더없이 훌륭한 문파라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법계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화산의 가르침이 결코 혜연에게 해가 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무학이란 결국 노력 없이는 이룰 수 없는 법. 화산의 올곧음은 혜연에게도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줄 것이다."

"……방장의 깊은 뜻을 몰랐습니다."

"허허."

법정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궁금하긴 하구나.'

그 청명을 만나 서로 교류한 혜연이 어떤 모습으로 돌아올지.

그 기대감에 법정은 벌써부터 마음이 들뜨는 듯했다.

'지금쯤이면 서로의 무학을 비교하며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고 있겠지.'

그 청명도 훌륭한 무인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 말이다.

"아미타불."

법정이 나직이 불호를 외었다.

'더욱 성장해 돌아오너라.'

더욱.

* * *

"으하하하하하하하핫! 마셔라! 마셔!"

"이제 화영문은 대성공이다! 오늘만 해도 문도가 몇백이나 들어왔다고!"

"이게 다 얼마야! 세상에!"

혜연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기가 마굴이구나.'

그의 눈앞에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화산의 제자들과 화영문의 제자들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난장판이 되어 술을 푸고 있었다.

'대체 이게…….'

엄격한 소림의 규율하에 자기를 절제하는 것이 불도로 가는 지름길이라 배워 온 혜연에게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일들은 정말이지 충격 그 자체였다.

'다른 문파들은 다 이렇단 말인가?'

그럴 리는 없겠지.

그가 알기로는 무당 같은 도관은 물론이고, 종남이나 오대세가처럼 속가적 성향이 강한 곳도 나름의 엄격한 규율을 지킨다고 들었다.

이대제자와 삼대제자, 그리고 속가의 제자들과 심지어 장로까지 한 자리에서 머리끈을 풀고 축제를 벌이는 모습은 세상 어딜 가도 여기서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심장이 쿵쿵 뛰어 주체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혜연은 연신 불호를 외며 애써 가슴을 진정시키려 했다.

"크으! 한 잔 받아라!"

"사형! 제 잔도 받으셔야죠!"

"아이고, 문주님! 축하드립니다!"

하지만 아무리 불호를 외어도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다.

'속세를 살아가는 이들은 이런 게 자연스러운 건가?'

평생을 소림에서 살아온 혜연으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크게 혜연을 불렀다.

"뭐 해!"

"예?"

"한 잔 받아!"

"……."

어느새 자신에게 다가와 술잔을 내미는 청명을 보며 혜연이 송아지처럼 큰 눈을 끔뻑거렸다.

"시주. 저는 불자입니다."

"그래서?"

"저, 저는 술을 먹을 수 없습니다."

"뭐래? 내가 아는 중놈들은 다 먹던데."

"예? 누가?"

청명이 피식 웃었다.

'누구긴 누구야. 네 사조들이지.'

지금이야 사이가 개판 나기는 했지만, 과거 청명이 매화검존이던 시절에는 소림과 화산의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물론 소림의 입장에서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세를 불려 나가는 화산을 조금 부담스러워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들의 앞에는 화산을 막아 줄 무당이 있었고, 화산 역시 당장 무당 놈들을 때려잡고 종남 놈들 후려 까는 게 우선이라 소림과 적대할 이유가 없었다.

아마 그렇게 마교의 발호 없이 세월이 조금 더 흘렀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차피 벌어지지 않은 일이니까.

여하튼.

- 거, 한 잔 받으시오, 도장.

- 중놈이 술을 처먹어도 되는 거냐?

- 어허. 병나발을 불고 있는 도사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 거참 희한합니다.

- 화산은 술 먹어도 돼.

- 도사가 할 수 있는 걸 중이 못 할 리가 있나. 그러지 말고 한 잔 받으시오.

- 땡중이네.

소림승들도 나름 술을 먹기는 했다.

물론 계율이 워낙 엄격하다 보니 배분이 높지 않은 이들은 감히 술을 입에 댈 생각도 못했지만, 배분이 높아지면 그 반동 때문인지 오히려 꽤 방종해지던 게 소림 놈들의 특징이었다.

"아무튼 잔 받아."

"아미타불. 소승은 괜찮습니다."

"쯧쯧쯧. 미련하게 구네."

"……예?"

청명이 혜연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네가 소림을 스스로 내려온 것은 다른 이들의 삶 속에서 뭔가를 찾고 싶었던 것 아니었냐?"

"그렇습니다."

"봐."

청명이 턱짓으로 주변을 가리켰다.

모두가 주거니 받거니 하며 불콰하게 취해 있었다.

"이게 네가 보려던 삶이다."

"……."

"삶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스스로 그 삶 속에 뛰어들어야 의미가 있는 법이지. 너는 불경과 소림의 가르침 속에 없던 길을 알고 싶어서 여기에 왔잖아. 그런데 그냥 옆에서 발을 빼고 지켜보겠다고?"

청명이 잔에 술을 따라 혜연에게 내밀었다.

"마셔 봐."

"시주, 저는……."

"부처의 불법이 어디 있는지 나는 모르지만, 네가 알고자 하는 건 여기에 있을 거다."

혜연이 가만히 청명이 내민 잔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나는…….'

계율은 더없이 중요하다.

하지만 때로는 계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잃지 않는다면, 이깟 술 한 잔 정도야 곡차와 다름없지 않겠는가?

혜연은 꽤 경건해 보이는 동작으로 술을 입가에 가져갔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은 채 술잔을 쭉 비웠다.

꿀꺽.

"……크흠?"

혜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술잔을 바라보았다. 살짝 멍한 얼굴이었다.

"어때? 화끈하지?"

"……아니, 그저 달기만 합니다."

"엥?"

혜연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냥 꿀물 같습니다."

"……."

청명은 멍한 눈으로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손에 쥐고 있던 술병을 확인했다.

'이거 백주(白酒)인데.'

술 중에서도 독하기로 유명한 것이 바로 이 백주다.

그런데 술을 난생처음 먹는 놈이, 뭐? 달아?

"안 독하냐?"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한 잔 더 받아 봐."

청명이 혜연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러자 혜연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술을 쭉 들이켰다.

"크!"

"어때?"

"이거 참 신기합니다. 뭔가 목에서는 시원한 듯한데 혀에서는 달고, 배 속은 화끈거리니! 별것 아닌 물 한 잔으로 요욕칠정을 느끼는 것 같지 않습니까?"

"……."

혜연의 눈이 청명이 들고 있는 술병에 꽂혔다.

"불법이란 경전에 있지 않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습니다. 제가 이 술을 먹어 보지 않았다면 세상에 이런 것이 있는 줄 몰랐을 것 아닙니까? 보고 들은 것은 행하는 바 못하고, 행하는 바는 즐기는 바에 미치지 못한다더니!"

"……술 잘 받는다는 말을 참 고상하게 한다?"

어이가 없어진 청명이 피식 웃었다.

소림에서는 기겁할 노릇이지 않겠는가. 그 엄격한 소림에서 이런 주당이 나고, 그게 하필 혜연이라니.

"헛소리하지 말고 한 잔 더 받아라. 네 덕분에 일이 쉽게 풀렸다."

"감사합니다, 시주. 시주께서도 제가 주는 술을 한 잔 받으십시오."

"허허. 중놈이 주도(酒道)를 아는데? 이거 크게 될 중이로다."

청명이 혜연과 주거니 받거니를 시작하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화산의 제자들이 슬금슬금 주위로 몰려들었다.

가장 먼저 나선 것은 다름 아닌 조걸이었다.

"스님! 스님, 절 기억하십니까?"

조걸의 얼굴을 확인한 혜연이 송구하다는 듯 반장을 한다.

"물론입니다. 조걸 도장."

"하핫! 역시! 그럼 제 술도 받으십시오!"

혜연이 조걸이 주는 술을 받아 시원하게 마시자, 그 앞으로 술병이 불쑥 튀어나왔다.

"아!"

"받아."

"유이설 도장!"

유이설을 바라보는 혜연의 눈이 빛났다.

그녀의 검이 그에게 얼마나 깊은 인상을 남겼던가. 아직도 그의 가슴을 베고 지나갔던 그녀의 검이 뇌리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저도 한 잔 드리겠습니다."

혜연이 유이설의 술병을 받아 그녀의 잔에 기울였다. 채워진 잔을 빤히 보던 유이설이 말없이 술을 쭉 들이켰다.

이내 말끔하게 빈 잔이 탁 소리와 함께 탁자 위에 놓였다.

"다음에는 내가 이겨."

"언제나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이들이 혜연에게 다가와 스스럼없이 술잔을 내밀고 술을 받았다. 그들에게도 혜연은 더없이 신기한 사람이자, 친해지고 싶은 이였던 것이다.

혜연의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평소에는 부끄럼 때문에 달아오르던 얼굴이 지금은 취기로 붉어진 것이다.

"크으! 우리 스님 술이 세시네!"

"쭉쭉 들이켜십시오. 쭉쭉!"

"이야. 청명이 말고 이렇게 술 잘 먹는 사람은 오랜만에 보는데?"

"자, 여기 또 한 잔 받으시고!"

"술이 들어간다! 쭉! 쭉! 쭉쭉!"

"주기는 내력으로 날리는 게 아닙니다. 돈 주고 먹는 술을 그렇게 버리면 벌받는 법입니다!"

화산의 제자들이 낄낄대며 혜연에게 술을 먹였다. 그리고 혜연은 멋모르고 좋아하며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한 걸음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백천이 어느새 뒤쪽으로 물러난 청명을 슬쩍 돌아보며 말했다.

"말려야 하는 것 아니냐?"

"왜?"

"……저러다가 큰일 나겠는데?"

청명이 사악하게 웃는다.

"냅둬. 원래 애들은 한잔하면서 친해지는 거지. 서로 못 볼 꼴도 좀 보고 해야 정이 쌓이는 거 아니겠어?"

"……."

백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리고 그가 우려했던 사태는 불과 한 식경이 지나기도 전에 벌어지고 말았다.

"히히히! 기분 좋다!"

"……."

웃통을 반쯤 까 젖힌 혜연이 민머리가 완전히 붉게 달아오를 정도로 취해선 좌우로 휘청댔다.

"아이고! 우리 스님 잘 노신다!"

"한 잔 더! 한 잔 더!"

그리고 혜연에게 술을 먹이다가 덩달아 취해 버린 화산의 제자들도 그 주위를 둘러싸고 반쯤 맛이 간 채 신나게 웃었다.

백천은 그 광경을 보며 쓰게 입맛을 다셨다.

'이게 어딜 봐서 소림과 화산이 같이 노는 광경이냐고.'

숭산채와 화산채가 우의를 다지는 자리지!

뒤쪽에 돼지 한 마리만 걸려 있으면 빼도 박도 못 할 판이었다.

"청명아, 아무래도 좀 말려야……. 청명아?"

백천은 어느새 그의 옆에서 사라진 청명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

청명은 화영문주 위립산의 입에 술병을 꽂아 넣고 있었다.

심지어 그 옆에서는 현영이 낄낄대며 웃어 젖혔다.

"……."

술병을 잡고 뒤로 넘어가는 위립산을 보고 낄낄거리던 청명이 제 입에도 술병을 꽂고 나발을 불어 젖혔다.

그 광경에 백천은 흐뭇하게 웃었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나도 술 줘라!"

마지막 끈을 놓아 버린 백천마저 모두가 있는 곳으로 달려들었다.

혜연의 환영식을 겸해 시작된 술자리는 생각보다 과격하고(?) 즐겁게, 밤새워 내도록 이어졌다.

법정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거품을 물고 뒤로 넘어갔겠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저 먼 숭산에 있는 그로서는 이 모든 일을 알 도리가 없었다.

안타깝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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