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화. 일을 좀 더 키워 봐도 되겠군요. (3)
"시법평등, 무유고하, 시명아누다라삼막삼보제(是法平等, 無有高下, 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다.
그렇기에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으로 불린다.
눈을 감고 나직하게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을 낭송하던 법정이 가만히 눈을 떴다.
"왔으면 들어오거라."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법정은 다시 한번 재촉하기보다는 그저 기다렸다. 상대가 마음이 있다면 문을 열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돌아설 것이다.
끼이이익.
그런 그의 기다림이 틀리지 않았는지 이내 문이 열렸다. 그리고 익숙하고도 낯선 얼굴이 보였다.
"어서 오거라."
"방장을 뵙습니다."
상대의 예를 받은 법정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없이 익숙하다.
하지만 낯설다.
아직 앳된 얼굴은 수없이 보아 온 그대로였지만, 과거와 달리 흐려진 눈빛과 핼쑥하게 들어간 눈두덩이는 그가 알던 이의 인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앉거라, 혜연아."
"예, 방장."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온 혜연은 장문인의 맞은편에 가만히 앉았다.
반쯤 식어 버린 차를 따라 내민 법정은 그를 보며 물었다.
"미혹에서 벗어났더냐?"
"……."
혜연이 대답하지 않자, 법정이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도 그날의 미혹에서 벗어나지 못했구나. 그저 집착인 것을."
"……."
혜연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청명에게 패한 그날, 혜연은 제 발로 참회동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날 이때까지 참회동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았다.
처음 겪은 패배의 아픔.
그리고 소림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자괴감.
이 모든 감정들이 그를 고행의 길로 이끌었다. 적어도 법정은 그리 생각했다.
"사가에서 말하기를, 승패는 병가지상사라 하였다. 무인이라면 패배를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고, 불자라면 고(苦)를 밀어 내지 않아야 하는 법이거늘. 언제까지……."
"방장."
혜연이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패함에 얽매여 있지 않습니다."
"……하면 어찌 그리 괴로운 것이냐?"
법정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들었다.
"저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스스로를 가두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참오 하고 또 참오 해 봐도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법정의 눈가가 살짝 꿈틀했다.
"무엇이 이해가 가지 않는단 말이더냐?"
"청명."
그 이름을 입에 올리고, 혜연은 입을 닫았다. 그리고 잠시 후에야 다시 말을 이었다.
"더없이 강했습니다. 더 강한 이에게 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렇기에 저는 그의 강함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나약함도 의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혜연의 목소리는 단호하기 짝이 없었다.
"하나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청명이라는 시주의 분노와 슬픔입니다. 그는 더없이 강했고, 그 힘으로 자신의 원하는 것을 얻을 자격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는커녕 분노를 토해 내고는 그저 몸을 돌려 버렸습니다. 그자의 행동이 제 안에 미혹을 빚습니다."
"……혜연아."
"그러니 말해 주십시오."
"……."
잔뜩 가라앉은 혜연의 눈은 흡사 늪처럼 보였다.
"방장께서는 그자에게 모욕을 당하면서도 무례하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방장께서도 그의 분노가 온당타 여기시는 것 같았습니다. 제 말이 혹여 틀린 것입니까?"
"……아미타불."
법정이 대답을 꺼리며 불호만을 외어 댔지만, 혜연은 적당히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불도(佛道)가 참고 인내하는 것이라 한들,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 불도는 아닐 것입니다. 방장, 제가 그 진실을 알 자격이 없는 것입니까?"
법정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하면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이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나아갈 수 없습니다."
혜연의 단호한 뜻에 법정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라면 모르지만, 언젠가 소림을 짊어질 혜연이라면 언젠가는 알아야 할 일이었다.
"……그리된 것이다."
모든 설명을 마친 법정이 가만히 혜연을 바라보았다.
수척한 얼굴에는 이렇다 할 표정의 변화가 없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마침내 혜연이 입을 열었다.
"어찌……."
하지만 차마 말로 다 할 수가 없는지 말끝을 흐렸다. 법정은 고개를 저었다.
"선대의 일이다."
"어찌 그리 치부하실 수 있습니까?"
"하지 않은 짓에 대한 대가를 치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너는 원수가 죽어 그 원한을 풀지 못한다면 그 아이를 베어 원한을 풀겠느냐?"
"……."
"선대에서 벌어진 일을 우리가 온전히 책임질 이유는 없다. 그건 가혹한 일이지. 저들에게 온정을 베풀 수는 있겠으나……."
"방장!"
참다못한 혜연이 버럭 소리를 질러 법정의 말을 끊어 냈다.
"지금 소림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선대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소림의 껍데기를 벗고 그저 한 사람의 불자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면, 어찌하여 선대의 일을 가려 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어리석은 소리!"
법정의 언성도 다소 높아졌다. 단호한 눈빛이 혜연을 향했다.
"그렇게 따지면 소림이 지금까지 저질러 온 잘못이 어디 한둘이겠느냐? 인간이란 본디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법. 지금껏 소림을 거쳐 간 이들이 저지른 죄악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 모든 죄악을 네가 감당할 것이 아니라면 그리 섣부른 소리는 함부로 입에 담는 것이 아니다!"
"……."
"불법이란 스스로를 온전히 세우는 것에서 시작한다. 속세의 정리를 끊어 낸다는 것은 단순히 속(俗)의 이(利)를 끊어 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을 끊어 내고 스스로를 세울 수 있어야 불법을 걷는다 할 수 있느니!"
잠자코 법정의 말을 듣던 혜연이 아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끊으라 하셨습니까?"
"그렇다."
"얽매이지 말라는 의미시겠지요?"
"그러하다. 천겁의 시간이 지난다 하더라도 지은 업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업 역시 과거의 선인들이 온전히 감당해야 할 것. 네가 그 죄를 대신 질 필요가 있더냐?"
"……아미타불."
혜연이 가만히 불호를 외었다.
"방장의 말이 가히 옳습니다."
"이해했더냐?"
"예. 소승은 비로소 이해하였습니다."
법정이 굳은 얼굴을 풀고 빙그레 웃었다.
"다행이구나. 이제 더는 얽매이지 말고 네가 해야 할 일을 하거라."
"예."
혜연이 큰 짐을 내려놓았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가 보거라."
그리고 예를 차려 반장을 취했다.
"방장. 오랫동안 뵙지 못할지도 모르니, 육신을 하찮다 마시고 챙기시길 바랍니다."
법정이 눈을 크게 치떴다.
"그게 무슨 말이더냐?"
"소승은 화산으로 가려 합니다."
"……뭐, 뭐라?"
생각지도 못한 말에 법정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혜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개운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방장의 설법(說法)에서 답을 찾았나이다. 저는 그에게서 불도를 보았나이다. 어찌하여 나이 어린 도사에게 저의 불도가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방장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예."
혜연이 고개를 끄덕인다.
"불도가 그곳에 있다면 당연히 궁구(窮究)해야 함이 옳습니다. 하나 저는 소림과 방장이라는 연을 끊어 내지 못하여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이리 방장께서 연에 얽매이지 말고 불법을 걸으라 하시니 저는 기꺼이 그 말씀을 실천하려 합니다."
법정이 입이 체면을 잊고 쩌억 벌어졌다.
이게 대체 다 무슨 말인가?
"혜, 혜연아. 내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리 당황하실 것 없습니다. 소림과의 연을 끊어 내기에는 제 불법이 아직 그리 깊지 못합니다. 그러니……."
혜연이 고개를 돌려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 너머를 보고 있는 듯했다.
"가서 보고 오겠습니다. 그가 무엇을 하는지. 그가 어찌 살아가는지. 이 두 눈으로 모두 보아야 제가 더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법정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일이 이리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했다.
"내가 허하지 않는다면 어찌 하겠느냐?"
"제가 받은 은혜가 있으되, 어찌 방장의 명을 거역하겠나이까?"
"그렇다면……."
"굳이 저를 막으신다면 저는 참회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길이 있어도 가지 못한다면 그곳에서라도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
법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그러고자 한다면 정말로 그리하고도 남을 아이라 차마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혜연이 다시 한번 반장을 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법정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혜연아."
"……."
"돌아오겠느냐?"
"그러할 것입니다."
"……그래. 다녀오거라."
"예."
혜연이 미련 없이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 적막이 내려앉았다.
홀로 남겨진 법정은 싸늘하게 식어 버린 차를 바라보다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업보인 게야.'
천하는 이 순간에도 뒤흔들리고 있다.
과거 화산과 수많은 문파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 서로가 서로를 도왔다면 지금쯤 세상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중원은 자신들의 잇속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이전투구의 장 속에서, 무너졌던 마교가 다시금 서서히 자신들의 세를 드러내고 있다.
난세.
난세가 오고 있다.
과거에 치렀던 희생들이 무색하게도 말이다.
'그래. 가서 보거라.'
본디 혜연은 사람이 이끌 수 없는 존재다. 용은 인간이 길들일 수 없는 존재니까. 용을 이끌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같은 용뿐이다.
혜연이 용이라면 청명 역시 용.
그렇다면 청명을 보고 혜연이 배울 것도 분명 있을 것이다.
"아미타불."
법정이 나직하게 불호를 외었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를 놓치고 있었다.
아무리 순백의 비늘을 자랑하는 백룡이라 할지라도, 흑룡과 어울리게 되면 그 역시 순식간에 검어진다는 사실을 말이다.
법정이 이 사실을 먼저 알았더라면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져서라도 혜연을 막았으리라.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때의 법정은 그 사실을 짐작하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 * *
"저기로군!"
"오!"
"서안이다!"
화산의 제자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 들뜬 목소리에 청명이 눈살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면박을 줬다.
"소풍 가?"
"너야 은하상단 때문에 서안에 자주 들락거리지만, 우리는 이번이 처음이란 말이다."
"……진짜?"
청명이 되레 황당하다는 투로 묻자 화산의 제자들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화산에서 내려갈 일도 잘 없는데, 서안까지 올 일이 뭐가 있냐."
"……진짜 촌놈들이네."
"시끄럽다!"
윤종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청명이 피식 웃었다.
"뭐, 괜찮아. 이제 곧 제 집처럼 들락거리게 될 테니까."
"그럴 것이다."
현영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거들었다.
"서안은 물론이고 앞으로는 천하 곳곳을 누빌 일이 많아질 테지. 과거 화산의 선인들은 천하를 누비며 협행을 했고, 수많은 공덕을 쌓았다고 하지 않더냐. 너희들도 곧 그리될 것이다."
"예, 장로님!"
화산의 제자들이 기대에 찬 목소리로 우렁차게 대답했다.
하지만 청명만은 심드렁한 얼굴을 풀지 않았다.
'협행은 얼어 죽을.'
이보쇼!
그게 다 구역 관리요!
속가들 있는 곳에 다른 문파 놈들이 설치면 가서 쥐어박고, 속가들 사는 곳에 도적들이 설친다 그러면 가서 때려잡고!
그러다 보면 속가들이 제 손으로 상납금을 갖다 바치니 문파가 풍요로워지고!
세상 다 그런 거지, 협행은 얼어 죽을.
물론 구역 관리 하러 이동하는 와중에, 듣는 것만으로도 빡치는 일이 벌어지고 있으면 난입하여 다 때려 부수는 일이야 종종 있었다. 그러나 협행 자체를 위해 문파를 나설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검을 익히는 데도 바빠 죽는데, 목적도 없이 강호를 나설 일이 뭐 그리 많겠는가?
'뭐, 겪다 보면 곧 알게 되겠지.'
현실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걸 말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건 바로 저곳부터다.
청명이 서안의 높은 성벽을 두 눈에 담았다.
"자, 그럼 어디!"
입꼬리가 싸악 말려 올라갔다.
"일단은 저기부터 접수해 보실까?"
일단은 서안부터 시작해서 섬서를 싸그리 다 먹어 주지! 예전의 화산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낄낄낄낄낄."
혼자서 은밀하게 웃기 시작하는 청명을 보며 모두가 불안이 밀려드는 걸 느꼈다.
'쟤 또 왜 저래?'
'냅둬. 하루 이틀도 아니고.'
왜 저러는지는 몰라도, 저놈이 저리 웃을 때마다 반드시 일이 생긴다는 것만은 경험으로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백천과 나머지 제자들은, 이번만큼은 이 불길함이 빗나가기를 빌고 또 빌었다.